정토행자의 하루

옥교법당
그 많던 기미는 누가 다 가져갔을까

옥교법당에는 핑크뮬리처럼 사랑스러우면서도 강인한 실천력을 탑재한 정토행자가 있습니다. 일당백의 내공으로 각종 봉사에 솔선수범하는 옥교의 보배이자, “정토회 가더니 스무 살 연애 시절의 네가 돌아왔어”라는 남편의 뭉클한 고백을 듣는 수행자! 10차 천일결사를 앞둔 이 봄, 사랑으로 빛나는 경전반 담당 윤나은 님의 아름다운 수행담을 나눕니다.

2019년 남편과 함께 윤나은 님
▲ 2019년 남편과 함께 윤나은 님

행복톡... 셋째 오빠가 보내준 선물이었을까?

저와 정토회의 인연은 2016년 초가을의 늦은 밤, 누가 보내준 지도 모르는 ‘행복톡’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날은, 제 손으로 병수발을 들었던 셋째 오빠가 4년간의 투병 생활을 끝으로 임종을 맞은 지 보름이 지난 후였습니다. 앞장서 오빠의 장례를 치러내고, 그때껏 해오던 대로 제가 계속 조카를 키우기로 결정하면서도 저는 큰 동요 없이 의연했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오랜 세월 형제들의 의지처로 살아왔던지라 그 또한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웬만한 일에는 힘들다는 소리 한번 안 하고 열 사람 몫을 뚝딱해냈던 것처럼 그날도 저는 곧 다가올 셋째 오빠의 49재를 준비하면서 어린이집에 출근하고, 남편과 자식들 건사하고, 아버지 잃은 조카를 돌보고, 시부모님 간식거리까지 챙겨 보내며 능수능란하게 일상을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짜증 나는 것이 있다면 새까맣게 기미로 뒤덮여버린 얼굴! 셋째 오빠의 병수발을 들면서부터 시작된 기미가 어느새 얼굴 전체로 펴져 시커멓게 변해버린 것이었습니다. 더는 화장으로 감출 수 없는 상태라 피부과 시술이라도 받아볼 심산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 밤! 대충 보다가 뭐에 홀린 듯 다시 보게 된 카톡이 바로 ‘행복톡’이었습니다.

생명줄처럼 내게 온 불교대학

낯선 번호라 평소라면 삭제하고 말았을 메시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행복톡 하단에서 마치 저를 부르는 것처럼 깜박깜박 빛나던 불빛 때문이었습니다. 그 불빛을 따라 클릭해 들어가니 ‘2016년 가을 정토 불교대학’ 홍보 창이 열렸습니다.

지도법사님도 모르던 시절이라 불교대학이라는 이름 자체가 생경했는데, 입학을 권유하는 짧은 글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 몇 마디가 뭐라고 눈물 바람인 저를 보며 스스로도 적잖이 당황했던 그 날, 돌이켜보면 저는 생애 처음으로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지금 너, 버티고 있는 거니? 서러워?’라고 말입니다. 날짜를 가늠하니 개학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던 울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불교대학 졸업 갈무리에서 윤나은 님
▲ 불교대학 졸업 갈무리에서 윤나은 님

불교대학 시절 도반들과 함께 윤나은 님(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 불교대학 시절 도반들과 함께 윤나은 님(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아, 살았다! 불교대학에 가면 나는 이제 죽지 않고 살겠구나! 우리 가족은 살겠구나!’

예감대로 불교대학은 제게 단비였습니다. 불법을 공부하면서 마음을 알아주는 연습을 하니 거짓말처럼 기미도 사라져갔습니다. 그제야 저는 그 지독했던 기미가 당시 제 마음의 상태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셋째 오빠의 병수발을 드는 4년 동안 200번에 걸친 비상 호출을 받으면서 죽음은 늘 제 곁에 와 있었고, 그 불안과 초조 속에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던 절대 공포의 기억까지 온전히 되살아나 있었으니 마음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늦게라도 그 절망을 알아주면서 얼굴은 더 환해졌지만 저는 제가 정말로 행복해지려면 큰오빠 부부에 대한 원망을 풀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모 없는 더부살이 설움이야 말해서 뭐해 정도로 대충 덮어놓고 살아왔으나 마음속 깊은 곳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던 더부살이 상처들! 그 상처를 풀지 않으면 가족들과 의좋게 잘 살다가도 한 번씩 뒤집혀 평지풍파를 일으키던 제 울화증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제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때마침 불교대학 담당자님이 〈깨달음의 장〉을 안내해주었습니다. 입학 이후 많은 변화를 체험했던 저는 정토회의 수행 프로그램에 대한 확신을 갖고 〈깨달음의 장〉에 다녀왔고 다녀오기를 참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교대학 학생들과 함께 윤나은 님(왼쪽에서 네 번째)
▲ 불교대학 학생들과 함께 윤나은 님(왼쪽에서 네 번째)

서러움이 산산이 부서지다

어린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갑자기 엄마까지 돌아가시고 저에게는 큰오빠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릴 외면했던 큰오빠의 무정함, 그래도 거기밖에는 갈 데가 없어 큰오빠 집으로 들어간 첫날부터 큰올케 눈치 보면서 밥하고, 청소하고, 갓 난 조카들이 하루에 수십 장 씩 싸놓는 똥 기저귀를 맨손으로 찬물에 다 빨아 놓은 뒤에야 학교에 갔던 제 어린 시절의 서러운 기억들이 줄줄이 떠올랐습니다.

자기 딸들은 철철이 드레스에 구두 신기면서 어린 저와 저보다 더 어렸던 막내 여동생에게는 양말 한 짝 안 사주었던, 탄광촌에 살았어도 광산 관리소장이라 큰오빠 살림은 넉넉했던 기억이 떠오르니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는 마지막까지 꽉 틀어쥐고 있던 상처를 떠올렸습니다.

탄광촌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쉰밥!

유난히도 무더웠던 중학교 3학년 여름, 학교 갔다 오면 배가 너무 고픈데 큰올케는 제게 쉰밥을 주었습니다. 한번은 실수였다 쳐도 서너 번 반복되니 3년 동안 참았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버렸습니다. 개를 줘도 안 먹는 쉰밥을 자꾸 주는 것은 먹고 죽으라는 뜻이구나 싶고, 그렇게 한번 생각이 비틀리니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다 결국 농약에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앞집 할머니한테 발각되어 한 모금만 넘기고 미수에 그쳤지만, 그 일로 탄광촌이 발칵 뒤집어지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산업체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함께 윤나은 님(왼쪽)
▲ 산업체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함께 윤나은 님(왼쪽)

끝없이 떠오르던 질문... 질문...!

그런 시절을 겪은 제가 큰오빠 내외를 원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속에서 끝없는 질문이 올라왔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쉰밥이 정말 죽을 이유가 아닌가? 속옷 한 장 못 얻어 입고 식모처럼 살았는데 그게 원망할 일이 아닌가? 동네 사람 모두가 나를 동정하고 큰올케를 욕했는데 그게 아닌가?...아닌가?...아닌가??’ 그렇게 수백 수천 가지 질문을 해도 답은, ‘원망할 이유가 있다!’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하는 탄식과 함께 마음의 질문이 뚝 끊겼습니다. 원망할 이유가 확실하다는 답에 이어 ‘그렇게 구박받은 내가, 나는 지금도 너무 불쌍해’라는 말이 뒤따라 붙는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오십 줄에 다다른 그때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고아의 형상을 나로 삼고 있음을 알게 된 저는 제 울화의 원흉이었던 자기연민을 통렬하게 부숴버렸습니다.

아모르파티! 내게 온 인연(운명)을 사랑합니다!!

스스로를 동정하는 마음이 사라지니 큰오빠 내외를 원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제가 겪은 모든 일이 자긍심이 되었습니다. 3년 동안 큰오빠 집에서 집안일을 했기에 저는 살림의 고수가 되었고, 산업체 고등학교를 스스로 선택할 정도로 결단력과 판단력이 빼어났으며, 낮에는 방직공장에서 3교대로 일하고 밤에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의 유명대학에 너끈히 합격하는 끈기가 있었고, 그 와중에도 힘들게 번 돈을 모아 오빠들과 여동생을 챙기며 살았으니, 다시 돌이켜 본 제 삶은 행복! 행복이었습니다!!

불교대학 담당자 시절 학생들에게 받은 꽃을 들고
▲ 불교대학 담당자 시절 학생들에게 받은 꽃을 들고

불교대학 졸업식에서 도반들과 함께 윤나은 님(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 불교대학 졸업식에서 도반들과 함께 윤나은 님(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마음을 묶어 놓은 봉사!

〈깨달음의 장〉 이후 저는 수행을 하며 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깨달음의 장〉에서 느꼈던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몸을 기둥에 묶어 놓는 심정으로 봉사에 마음을 묶어두었던 것입니다. 경전반에 올라가 학생이면서 담당자 소임을 맡았던 것도, 경전반 졸업 이후 불교대학 담당자가 되었던 것도 봉사를 통해 알아차리지 않으면 언제 다시 제 마음이 뒤집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조금만 게을러지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어리석음! 불교대학에 이어 경전반을 맡고 있는 요즘도 저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제 마음을 살핍니다. 덕분에 이제 기미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환하게 빛나는 얼굴빛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지만 제 변화를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남편입니다. 제 울화증이 사라지니 언제나 우리가 처음 만났던 스무 살 봄날 같다며 좋아하는 남편! 신기한 건 수행을 하면 할수록 남편이 제게 해주었던 고마운 일들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친정 식구들 챙기는 거 타박 한번 안 했던 일, 제 마음이 뒤집어져 성낼 때에도 그저 묵묵히 바라봐주던 눈빛,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마치지 못했던 대학을 다시 보내준 일 등등.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고마운 기억들이 떠오르니 남편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일어났습니다.

다혈질이었던 엄마 밑에서 마음고생 했던 아이들도 이제는 엄마 뚜껑 열릴 걱정 안 하고 속마음을 내놓고, 친딸보다 더 저를 많이 닮은 조카도 무탈하게 자라 어느새 대학 신입생이 되어 독립을 하고 나니 저를 둘러싼 모든 인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카와 함께 가족사진
▲ 조카와 함께 가족사진


하면 할수록 봉사만한 행복 방편이 없는 것 같다는 윤나은 님. 불법을 통해 자잘한 울화증이 교정되고 봉사로 그 뿌리를 다스리니 가정에 대 평화가 도래했다며 환하게 미소 짓는 윤나은 님의 앞날에 무궁한 행복과 평안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글_정진옥 희망리포터(울산정토회 옥교법당)
편집_방현주(부산울산지부)

전체댓글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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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희

글 잘 읽었습니다
행자의 하루에 올라온 선배 도반님들의 글을 보고 힘을 얻습니다
에너지 충전해서 힘내서 봉사하겠습니다

2020-05-03 14:22:03

이덕기

대단합니다. 저는 읽으면서도 이건 남 탓이지 이러고 있는데 이걸 깨닫다니.. 저를 많이 돌아봅니다. 내가 가진건 고민축에 들지도 않네 하면서요.

2020-03-02 18:38:10

명륜행

도반님의 수행담을 읽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것에 집착하고 살았구나 싶네요 도반이 힘이라는 걸 알아차립니다

2020-02-29 22:4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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