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홍성법당
어머니 한숨 속에 섞인 슬픔을 이제야 이해합니다!

불법(佛法)을 만나고 어머니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최인미 님. 앞으로 작은 원이 있다면,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고향을 떠나와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과 특히,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틈틈이 준비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항상 수행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무심한 듯 담백하게 그렇지만 쉽지 않았던 최인미 님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뷰 중에 환하게 웃음 짓는 최인미 님
▲ 인터뷰 중에 환하게 웃음 짓는 최인미 님

친정 어머니의 혹독한 삶

친정 엄마의 동생들이 아주 어릴 때 돌림병으로 모두 죽자, 외할아버지는 새 외할머니를 데려와 어린 친정 엄마와 함께 살았습니다. 얼마 후에 이복동생이 태어났고, 새 외할머니는 아직 어린 엄마를 굶기고 집안 일을 시키며 행여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더욱 더 무섭게 때리고 굶겼습니다. 그렇게 매일 맞거나 굶주리는 일이 많다보니 엄마가 열 살 무렵 되었을 때는, 배가 고프고 사는 것이 고통스러워 죽으려는 생각까지 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밤에 몰래 빠져나가 물 속에 빠져 죽으려고 했습니다. 막상 다리 위에서 물속을 내려다보니, 그 시커먼 물이 너무 무섭고 두려워 다시 집으로 돌아와 외할아버지 등 뒤에서 외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눈칫밥을 먹고 살던 엄마는 어느덧 결혼할 나이가 되자, 엄마를 무척이나 예뻐하고 아끼던 동네 오빠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 때 전사해서 엄마 곁을 떠나자 남편도 없는 시댁에서 3년을 살다가 갈 길 가라는 어른의 말씀으로 집을 나와 서울에서 홀로 지냈습니다.

친정아버지는 북한에서 1·4 후퇴 때 인해전술로 내려와 거제수용소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때 엄마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아버지는 가끔 상념에 빠져 있었지만,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우리 6남매를 건사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깊어 가는 마음의 상처

나는 6남매 중 셋째여서 언니가 집에 있을 때 만해도 집안일은 조금씩 돕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공부를 잘해서, 집안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고도 다닐 수 있는 대구 국군간호사관학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온갖 집안일과 엄마가 요구하는 일들을 하니 무척이나 힘들고 지쳤습니다. 가끔 엄마의 한숨이 나에게는 세상이 끝나는 천 길 낭떠러지 앞에선 기분이 들게 했습니다. 깊은 슬픔으로 미끄러지는 것 같은 마음에 왠지 더 큰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어릴 때 6남매 중 유난히 내 주장을 하지 못했던 나는 처음으로 새 시계를 받아든 날 ‘먼 길 떠나는 언니에게 줘라’하는 엄마의 한마디에 왜 줘야 하느냐는 투정 한번 부리지 못한 채 줘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끔 생일날이면 사주던 빵을 내 생일에 깜박 잊어도 사달라는 말이 안 나와서 밤늦게까지 혼자 서운한 마음에 속상해하며 울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내 마음의 상처는 깊어서, 점점 곪아가는 줄도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2017년 인도성지순례 때 (아랫줄 왼쪽에서 첫번째 최인미 님)
▲ 2017년 인도성지순례 때 (아랫줄 왼쪽에서 첫번째 최인미 님)

쉽지 않은 결혼생활과 아들의 우울증

안양에서 살던 나는 33살에 형부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몇 개월 만에 결혼했습니다. 그렇게 결혼생활을 하던 중에, '내가 결혼에 대해 다른 사람과 사는 것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나는 집안일과 직장생활을 같이 하기엔 너무 버거웠는지 유산을 몇 번 하니, 그제야 남편은 집안일을 조금씩 함께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업이 교사이다 보니, 내 아이는 더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다 보니 이곳저곳 돌아다녔습니다. 좀 더 믿을만하고 안전한 그리고 아이들이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대안학교로 두 아이를 함께 보내게 되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잘 다녔지만, 큰아들은 연년생으로 태어나 만 두 살이 되기 전부터 혼자 놀아야 했습니다. 큰아들은 어릴 때부터 보살핌이 부족해서였는지 많이 산만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아 마음고생이 많았는데, 결국 5학년 때 우울증을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청련암에서 우연히 알게 된 정토회와 법륜스님

2006년 5월 어린이날이라 경남 고성에서 열리는 공룡엑스포로 가족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옥천사가 풍경이 좋다는 말을 듣고 올라가다 보니 청련암이 있었습니다. 청련암 스님이 우연히 차담을 하던 중에 정토지와 법륜스님 법문테이프를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듣는데 너무 좋아서 올라오는 내내 들었습니다. 이렇게 명쾌하고 좋은 법문을 해주는 법륜스님이 있는 정토회를 나도 가보자 하고 바로 그다음 주부터 수행법회에 나갔습니다. 그해 7월에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고, 11월에는 천일결사에 입재까지 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반까지 졸업하고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천일기도 회향때(왼쪽 첫번째 최인미 님)
▲ 천일기도 회향때(왼쪽 첫번째 최인미 님)

어머니를 이해하게 해준 불법(佛法)

6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에 차례로 죽어가는 동생들을 지켜봐야 했고, 그 슬픔에 상심한 엄마마저 떠나자 홀로 남아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야 했던 어머니!

삶과 죽음과 이별 속에 내던져진 채, 그리고 잠깐의 행복이 지나자 또다시 찾아온 전쟁과 죽음, 상처가 상처인 줄도 모르고 아픈데 아픈 줄도 모른 채 평생을 그렇게 견뎌야 하는 줄 알고 무조건 견뎌내기만 하며 살아온 나의 어머니!

어머니를 이제야 있는 그대로 봅니다. 당신도 몰랐던 우울한 슬픔을 한숨으로 토해낼 때 나는 그 한숨 속에 섞인 슬픔이 내 것인 양 받아먹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법륜스님의 법문은, 내가 엄마로부터 자립하지 못했듯이 나 또한 나의 감정을 아들에게 물려주게 되었다는 이치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안개 속을 헤매던 내가 불법에 의지해서 한 줄기 빛을 보게 했고, 원하는 삶을 살아도 된다는 마음의 힘을 주었습니다.

언제나 바른 가르침을 주는 법륜스님과 함께 수행정진하는 정토회 도반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나는 이제 나의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엄마와 아버지가 나에게 준 은혜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자식들을 놓을 수 없었던 두 분의 희생과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없습니다. 그동안은 내가 잘나서 견뎌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더 큰 아픔 속에서도 견뎌낸 엄마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깨우칩니다. 너도 자식 낳아서 키워보라는 그 한마디가 내내 서운했는데, 이제 그 말을 할 때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어머니, 이렇게 키워주어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토회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는 다섯자매(왼쪽에서 두번째 최인미 님)
▲ 정토회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는 다섯자매(왼쪽에서 두번째 최인미 님)

글_신명옥 희망리포터(대전정토회 대전법당)
편집_하은이(대전충청지부)

전체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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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행

수행담 잘 읽었습니다.
최인미보살님도
보살님의 어머님도
모두 진정한 보살님이십니다!!!
앞으로 두 보살님 행복한 웃음만 지으시길 기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2020-03-02 20:56:17

이지훈

감사합니다

2020-02-28 20:41:30

선경

환한 모습 그리울 것 같아요.
인미보살님의 새로운 출발 응원합니다~^^

2020-02-21 11: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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