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샌프란시스코법당
저도 모자이크 붓다의 한 조각이 되었습니다!

정토행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에 새로 북미서부 지역 희망리포터 소임을 맡게 된 정영진입니다. 저는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당 소속으로 국제국에서 운영하고 있는 제3기 온라인 불교대학 학생이며, 새로 주어진 봉사 소임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는 신참 정토행자입니다. 감동적인 ‘수행담’은 아니지만, 모자이크붓다의 한 조각이 되어 ‘소확행’을 찾아가는 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온라인 불교대학을 아시나요?

저는 3기 온라인 불교대학1 학생입니다. 북미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등 각지에 흩어져 사는 열두 분이 저의 도반입니다. 얼마 전까지 저는 법당과의 거리가 멀어 불교대학을 수강할 수 없어 ‘차라리 이 미련을 버리는 것을 수행으로 삼자!’ 마음먹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온라인 불교대학 학생이 되고 보니, 매주 수요일 두 시간의 수업 시간이 금쪽같습니다. 어느덧 열두 번의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저의 집에서 온라인으로 불법을 만날 수 있도록 이 소중한 기틀을 마련해 주신 선배 도반님들께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3기 온라인 불교대학 입학식 (‘인’을 들고 있는 정영진 님)
▲ 3기 온라인 불교대학 입학식 (‘인’을 들고 있는 정영진 님)

저는 고등학교 때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왔습니다. 모태신앙이 기독교이다 보니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은 제가 성인이 되어 독립했을 무렵이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서부에 살지만, 처음 가족들이 이민을 온 지역은 미국 동부 뉴저지였습니다. 2013년 뉴욕으로 인턴쉽을 다니던 무렵, ‘뉴욕에 절이 있을까?’ 하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그때 미국에 정토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용기를 내어 전화 통화까지는 했지만, 법당까지 찾아가는 인연으로 연결되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한국 절에서 명상수련을 하기도 하고, 친구들 덕에 인연을 맺은 힌두교 사원에서 수행을 이어갔습니다. 법륜스님의 법문을 유튜브로 듣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깨달음의 장>을 이끌어주신 선주법사님과
▲ <깨달음의 장>을 이끌어주신 선주법사님과

내 마음속 상처와 마주하다

제 어린 시절 상처를 떠올리면 거기에는 늘 한 살 터울의 오빠가 있습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일을 하셨기 때문에 제가 다섯 살 될 무렵까지 저는 대구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오빠는 서울 외갓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저까지 외갓집에 1년 정도 맡겨졌는데, 그 1년 동안 오빠와 저는 늘 싸웠고 그때마다 외할머니께 호되게 야단을 맞는 것은 언제나 저였습니다.

오빠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우리 둘은 함께 대구 부모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구 사투리가 심해 서울에서 적응을 못 했던 것처럼 서울말만 하던 오빠는 대구에서 적응을 어려워했습니다. 중학교에 가서도 오빠는 학교생활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이 미국에 이민을 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국 뉴저지에는 큰외삼촌이 자리를 잡고 계셨기에 어머니는 외삼촌의 사업체에서 함께 일을 하셨고 아버지는 일명 ‘기러기 아빠’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게 된 저는 다행히 영어도 금방 배우고 나름대로 잘 적응을 해나갔습니다.

Golden Gate Park 미술관에서
▲ Golden Gate Park 미술관에서

어머니는 당신이 희생한 만큼 저희에게 큰 기대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 남매는 명문대가 아닌 평범한 주립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을 마친 저는 인도로 장기 봉사활동을 가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은 그런 저를 설득해 보건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게 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미국에 금융위기가 크게 왔고, 석사학위를 취득했지만, 취업은 잘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그런 저를 보며 또다시 박사과정 진학을 원하셨지만, 그것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백수가 되었고, 어머니는 저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셨습니다.

동네 농장에서 과수원 수확 봉사 중에
▲ 동네 농장에서 과수원 수확 봉사 중에

어른이 되지 못한 마음 속 어린 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지던 백수의 공백기가 끝이 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수행의 고마움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그 무렵 제 가족은 엄마와 오빠 모두 한국으로 되돌아가고 저 혼자 살 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생활하며 경계에 부딪힐 일은 없어졌지만, 직장생활은 또 다른 수행거리를 주었습니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오빠한테 얻어터지고, 외할머니께 야단맞고, 엄마와 죽어라 싸우던 아이가 튀어나왔습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유튜브를 통해 익히 알고 있던 〈깨달음의 장〉 프로그램을 신청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저는 다섯 살 무렵부터 다 자랄때까지 오빠에게 괴롭힘당한 것에 대한 억울한 심정이 아직도 제 안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상담 치료를 받으며 오빠도 그저 아이였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빠의 입장에서는 애초에 외갓집으로 보내졌을 때 엄마 아빠를 저에게 뺏긴 것 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작용이 자연스럽게 저를 향한 공격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고나니 제 마음속 억울함도 사라졌습니다.

남편과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을 배경으로
▲ 남편과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을 배경으로

수행 삼아 가볍게, 또 가볍게

작년에는 결혼을 하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왔습니다. 집이 법당과 거리가 멀어 매주 나가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천일결사 입재식 만큼은 꼭 참석하려고 합니다. 또한, 국제국에서 진행하는 3기 온라인 불교대학에 입학해 수업 중입니다. 온라인 불교대학 역시 봉사활동이 필수 과정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불교대학 수업 나누기 녹취 소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유튜브 법문을 들으며 통역 봉사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번에 국제국을 통해 유튜브 자막 번역 봉사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영문 유튜브 채널에 스님의 즉문즉설이 업로드되면 밴드에 링크를 올려 도반들에게 알리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9-10차 천일결사 입재식 (앞줄 가장 오른쪽 정영진 님)
▲ 9-10차 천일결사 입재식 (앞줄 가장 오른쪽 정영진 님)

그리고 최근 샌프란시스코법당에서 받은 소임으로 ‘희망리포터’가 되었습니다. 그간 해오던 받아 적거나, 통역하는 일에는 어느 정도 익숙한데,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거나 글을 쓰는 일은 아직은 낯설고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수행 삼아 가볍게 해나가려 합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주변에 훌륭한 도반님들 이야기를 담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동안 별생각 없이 읽고 보았던 여러 콘텐츠 뒤에 많은 모자이크 붓다들의 노고가 있었음을 이렇게 알아갑니다.

글_정영진 희망리포터(샌프란시스코법당)
편집_박승희 (해외지부)


  1. 온라인 불교대학은 법당이 없는 지역에 거주하거나 법당이 있어도 2시간 (200km) 이상 걸려서 법당에 가기 힘든 분들이 온라인으로 공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는 주로 해외에 개강하고 있습니다. 

전체댓글 13

0/200

이현정

저는 모든것이 갖추어져 있어도 그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니 안들어 가고 있는데 대단 하십니다.
참회 합니다.
저도 한조각이 되어 모자이크 붓다 되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2020-03-26 06:35:02

한인오

온라인 수업시간을 끔쪽같이 하신다는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
스님 영문 즉문즉설 등 국제국 봉사 소임 응원합니다~

2020-02-05 08:16:44

달오 이창석

소박한 마음을 엿볼수 있는 글 감사합니다. 누구 누구나, 마음의 상처도, 또한 별것 아닌 자랑거리 같은 것도 한아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중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크고작은 번뇌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승화하여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도반들의 의지삼아 수행들 해 갑시다. 저도 샌프란시스코 법당출신이라 더 관심이 갔습니다.

2020-02-05 02:06:03

전체 댓글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샌프란시스코법당’의 다른 게시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