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검암법당
아내를 아내라 부르지 못하는 문덕수 님

30년 전 친구에게 빌려준 돈 50만 원이 정토회와의 인연을 맺어주었습니다. 지금은 검암법당 상근 직원으로 오해받으며 이곳저곳에서 출몰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아내라 부르지 못하고 부총무님이라 부르며, 잘 따르고 있는 검암법당의 문덕수 님의 사연을 들어보았습니다.

문덕수 님과 검암법당 부총무이자 아내인 신현금 님
▲ 문덕수 님과 검암법당 부총무이자 아내인 신현금 님

은혜갚은 빌려준 돈

30년 전인 1991년, 당시 직장인 한 달 치 봉급을 친구에게 빌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이웃처럼 지내고 왕래도 하며 가깝게 지냈습니다. 저도 굳이 돈을 받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 친구가 용인으로 이사하고 어느 날 연락이 와서 《스님의 주례사》라는 책을 주며 시간이 되면 어떤 수련 프로그램이 있는데 한번 가보라고 추천해주었습니다. 20년 만에 저에게 빌린 돈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정토회 〈깨달음의 장〉에 등록을 해주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다

별다른 생각 없이 《스님의 주례사》의 책장을 넘기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장〉을 경험하면서 삶이라는 것과 인간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학생운동,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세상에는 아군과 적군이 있고, 대립과 갈등이 있으며 투쟁을 통해 이겨서 쟁취해야 한다는 관념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세상은 갈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와 너, 아군과 적군이 아닌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에 너무 강한 충격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통일의병 활동(중간 문덕수 님, 아내 신현금 님)
▲ 통일의병 활동(중간 문덕수 님, 아내 신현금 님)

또 뭐에 미쳐서 저러고 있나...

가톨릭에서 유아 세례도 받았고, 고등학교 때는 기독교 세례까지 받았던 저는 미지의 세계였던 불교의 가르침이 너무 궁금해졌습니다. 궁금증을 해소하려 아침저녁으로 정토회 홈페이지에 있던 경전 강의를 찾아보았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재미있고,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당시 저를 지켜보던 아내(현재 검암법당 부총무)는 ‘또 뭐에 미쳐서 저러고 있나’하고 궁금했다고 합니다.

부부 도반의 탄생

때마침 정토회 인천법당이 생긴다고 하여 너무나도 당연히 불교대학에 입학하였고, 아내는 제가 어디에 또 미쳐있는지 확인하러 따라왔다가 함께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반까지 2년 동안 큰 걸림 없이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일상이 조금 잔잔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정토회와의 인연을 끝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정토회는 자원봉사로 운영되니까 우리도 받은 것에 대해 봉사를 하고 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 도반의 정토회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하면 안되는 건가보다...

수행 법회 사회를 시작으로 경전반 담당 한번, 불교대학 담당 네 번, 총 다섯 번의 교실 담당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불교대학 담당을 할 때는 한 학기를 못 넘기고 교실이 폐강했습니다. 봉사라고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스스로 실패라고 받아들이게 되었고 ‘나는 하면 안 되는 건가 보다’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주로 여성인 불교대학 학생들과 나누고 공감하는 것에 대한 어색함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았습니다.

행복학교(왼쪽 문덕수 님)
▲ 행복학교(왼쪽 문덕수 님)

연락두절의 미스테리

두 번째는 마지막까지 5명이 남았는데 정말 열심히 다니던 분이 졸업수련도 마쳤지만, 수업을 2번 남긴 시기에 문자로 함께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당연히 오늘 수업에 못 나오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연락이 두절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지금도 미스터리입니다. 아쉽고, 자괴감도 들고 게다가 졸업생 4명이 모두 경전반을 안 간다고 합니다. 또 생각이 많았습니다. 나는 담당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나 때문에 피해가 가는듯한 마음도 올라왔습니다.

남고 떠남에 너무 연연하지 마라

새로이 검암법당이 생기면서 봉사자가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담당을 맡아야 할 상황이였습니다. 담당자 직무교육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학생들이 남고 떠남에 너무 연연하지 마라, 여기 모인 담당자 당신 하나라도 끝까지 남으면 그게 성공한 것이란 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이번엔 그 말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내가 의무감을 가지고 봉사한다고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나의 수행과정이었습니다. ‘내가 성숙해졌구나’하는 앎이 있었습니다. 맨날 ‘나는 행복한 수행자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가식에 불과했구나'하는 생각과 더불어 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마음으로 담당한 학생들이 이번에 경전반 졸업을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오히려 나의 공부가 정말 많이 되었습니다.

가을불교대학 입학식(앞줄 맨오른쪽 문덕수 님)
▲ 가을불교대학 입학식(앞줄 맨오른쪽 문덕수 님)

수행차원에서 한 번만 더 해보라

4번째 담당을 하기 전에는 약간 투덜댄 적이 있었습니다. 매번 하던 사람만 하면 나도 집중력과 성의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 그만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사님께 질문하니 그러면 수행 차원에서 한 번만 더 해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눔의 장〉을 다녀와서 4번째 불교대학 담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존에 문제라고 받아들였던 소통, 부담감, 의무감 등이 다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성별의 차이에서 분별한다거나, 학생들의 오고 감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이라던가 하는 부분이 다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학생의 상황이 이해되고, 제 마음의 흔들림은 없어졌습니다. 그만두는 학생에 대해서도 계속해보는 것에 대해 권유는 하지만 강요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3번의 경험에서 단련이 된 건지 어찌한 지는 몰라도 인연에 대해 소중히 여기지만 집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산순례(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문덕수 님)
▲ 남산순례(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문덕수 님)

왜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고 있나?

솔직히 수행의 절실함은 없었습니다. 남들처럼 괴로움을 해결하겠다거나, 어떤 목표의식을 가지고 과업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기도 수행을 해야 한다는데 목적의식 없이, 내가 왜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일결사 나누기 때 수행할 목적도 없고 수행이 되지 않는다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수행은 목적이 아니다. 우리 수행문 안에 왜 수행을 해야 하는지가 다 있는데 왜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고 있느냐'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수행문을 다시 봤습니다. 그곳에 있었습니다.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기도는 나를 낮추고 실상을 보는 것이었는데 특별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수행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수행문의 문구 하나하나가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고, 그때부터 수행이라는 것을 연속성 있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 있게 수행에 관해서 권유할 수 있고, 스스로 당당해졌습니다. 지난시기에는 말로만 수행하자고 했지,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으니 말에 힘이 들어있지 않았을 거라 돌이켜 볼 수 있습니다.

JTS거리모금(플래카드 앞  문덕수 님과 아내 신현금 님)
▲ JTS거리모금(플래카드 앞 문덕수 님과 아내 신현금 님)

정토회가 나를 흔들다

투자신탁회사에 다니다 IMF 때 회사가 문 닫았습니다. 회사 노동조합 활동 등으로 전직이 안 되어 4년 정도 공부해서 감정평가법인에 입사했습니다. 2년 정도 예상했던 준비 기간이 4년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아내가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2002년에 입사하게 되어 일도 열심히 하고, 술도 일이라 생각하며 술도 열심히 마시고, 사람과의 관계, 사회적 활동에 저의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되자 마음에 허전함도 있었고, 그때 만난 정토회가 강하게 저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불교대학 담당자가 되고 정토회 일을 하나둘 맡다 보면 사회생활과 시간상으로 부딪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한창 일하고 있는데 봉사 관련 대답도 해줘야 하고, 정토회 일정을 참여하다 보면 회사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안에서 내적 갈등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가다가 모든 인연 다 끊어지고, 나중에 정토회에 안 다니게 되면 나는 여기저기서 고립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일종의 불안감도 있었습니다.

정토회 일이 내 삶의 일부가 되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을 돌이켜보면 정토회는 어느 정도 봉사하다 떠날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양손에 떡을 쥐고 둘 다 조절해서 가지려고 하니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노력한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 한 부분을 내려놔야 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50대50으로 맞추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정토회 일이 내 삶의 일부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반대쪽 생활이 줄어들고 재미도 떨어졌습니다. 때마침 회사에서 직책이 변경되면서 접대도 안 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 시점에 맞게 자연스럽게 변화되었습니다. 지금은 모임에 빠지는 것이 불안한 게 아니고 오히려 더 잘됐다는 생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내적 문제, 갈등이라고 했던 부분이 지금은 많이 해결되었고 오히려 삶이 더욱 편안해졌습니다.

JTS거리모금
▲ JTS거리모금

우리는 부부 정토인

검암법당이 아직은 봉사자가 적어 부총무, 불교대학 담당, 팀장 등 두루두루 해야 하다 보니 둘이서 많은 부분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부분이 좀 아쉽기는 합니다. 이 부분은 점점 개선되리라 봅니다. 좋은 점은 정토회 봉사나 행사들이 많으면 수시로 소통하고 회의하고 연락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일일이 시간도 맞춰야 하고 소통이 잘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공간을 같이 공유하다 보니 별도의 소통이라고 맞출 필요가 없이 일상 대화가 법당 이야기입니다. 그 안에서 서로 조언과 도움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냥 일상이 소통이고 회의입니다. 한 명이 싫증을 느껴서 안 한다고 하면 갈등이 생기겠지만 둘 다 봉사하기로 마음 내고 중추 역할을 하니 오히려 관계 속에서 이야깃거리도 많아집니다. 그냥 지금이 우리 삶이고 잘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평안하게 잘 살 수 있겠구나

대외적으로는 우리나라 한반도에 꼭 통일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더라도 화해와 협력의 물꼬가 트여서 작은 한 걸음이라도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이가 들다 보니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있습니다.

잔잔한 호수의 물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편안함을 주고 싶다는 원은 있습니다. 꼭 수행자로서 수행적 삶을 살겠다는 것이 아닌 지금처럼 이렇게 살면 평안하게 잘 살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조금만 나를 단속하면 큰 무리 없이 잘 살 수 있겠다고 봅니다. 사회에서 만난 주변 지인이 하나둘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는 걸 보면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깨어 있어야겠구나’하는 책임감도 생깁니다.

9-9차입재식(맨뒷줄 오른쪽 두번째 문덕수 님)
▲ 9-9차입재식(맨뒷줄 오른쪽 두번째 문덕수 님)


정토회 봉사자들을 보면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결국 나는 못 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어쩌다 한번 책임감 적은 일은 하겠지만, 몇 년씩은 절대 못 한다며 발을 빼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에 문덕수 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금강경에 나온 “하되 함이 없이한다”는 말이 무슨 얘기인지 어렴풋이 배울 수 있었고 어쩌면 가장 강력한 힘은 노력이 아닌 진심이 아닌가 돌이켜봅니다.

글_강주원 희망리포터(인천정토회 검암법당)
편집_고영훈(인천경기서부)

전체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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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너무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직장생활과 정토회 활동을 병행하는 것에 이직까지 두려움이있는 제 자신이 부끄럽네요. 큰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신 도반님 정말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01-27 21:02:06

고경희

정말 가슴 따뜻 , 사랑스런 부부 도반님이시네요~♡
저도 남편을 남편이라 부르지못할 상황이?되기를?^^

2020-01-26 11:05:42

이동헌

진솔한글 잘 보았습니다.

2020-01-25 00: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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