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콜럼버스법당
미국 생활 40년, 정토회 나이는 이제 7살입니다.

콜럼버스는 미국 중동부에 위치한 오하이오주의 주도입니다. 오하이오주는 우리나라 남한 크기와 비슷한 면적인데요, 산과 바다가 없이 평평한 대지가 주를 이룹니다. 주도인 콜럼버스에는 한인이 약 3,000명 정도 거주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정토행자는 미국 콜럼버스 법당에서 총무와 회계 소임을 맡고 있는 이옥식 님입니다.

이옥식 님은 2013년 스님의 강연으로 콜럼버스 법당과 인연을 맺어 이후 5년 동안 회계, 3년간 총무, 그리고 2년간 법회 담당을 하고 있는 콜럼버스 법당의 보배입니다. 최근에는 인도 성지순례까지 다녀오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건해졌다는 이옥식 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유튜브와 스님 강연으로 알게 된 정토회

내년이면 미국에서 산 지 어느덧 40년이 되어 갑니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지만 7년전, 법륜스님을 만나고 정토회를 만나고 달라진 제 삶과 수행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유행(?)에 민감하지 못해서였을까요, 저는 2012년에야 비로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유튜브 속 법륜스님 덕에 마음이 많이 편안해질 무렵, 2013년에는 제 동료가 콜럼버스에 스님이 오신다고 알려주어 스님을 직접 뵐 수 있었습니다. 강연장에 가서 직접 스님의 말씀도 듣고 책도 여러 권 샀습니다. 그런데도 콜럼버스에 법당이 있다는 건 여전히 모르고 (정보가 있었을 텐데, 제가 못 본 것 같아요) 있었습니다. 몇 달 후에 우연히 콜럼버스법당 홈페이지를 보고 연락처로 전화를 하여 고창미 님과 통화 후에 그때부터 법당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2018년 부처님 오신날. 콜럼버스 법당에서 (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이옥식 님)
▲ 2018년 부처님 오신날. 콜럼버스 법당에서 (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이옥식 님)

‘사랑고파병’을 채워 줄줄 알았던 두 번째 남편

전남편이 미국에 와서 공부할 때나, 취직 준비할 때 자기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고심하느라 저와 대화를 잘 나누지 못했습니다. 사랑고파병을 앓던 저는 취직 후에도 바뀌지 않는 그와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어서 이혼했습니다. 그 후, 자원봉사를 하던 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좀 엉뚱한 데가 있긴 하나 직업이 사회복지사이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혼자서 키우고 있기에, 분명히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라 내 사랑고파병을 고쳐줄 거라고 확신하며 재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같이 살아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어린애처럼 마음만 순수하지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회사에 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같이 못 살겠다’ 선언 후

게다가 남편은 아침에는 짜증을 많이 내었습니다. 차츰 저의 잔소리가 늘어가면서 남편의 아침 짜증이 화로 바뀌고 더 잦아졌습니다. 결국 저는 남편에게 '당신 계속 이러면 난 같이 살 수 없다'고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없으니까 그런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깜짝 놀란 남편이 의사를 만나 상담도 받고 화를 조절하는 약도 먹기 시작하면서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남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이 제게 남아있어서, 별 것 아닌 것에도 얼굴을 찌푸리곤 했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흠이 전혀 없는데 동료들이나 매니저들이 비양심적이거나 일을 잘 못 하는게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에 깔려 미팅할 때마다 화난 목소리로 말을 하는 바람에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는 동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불평불만하며 무척 불행하게 지냈습니다.

직장 요가클럽에서(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이옥식 님)
▲ 직장 요가클럽에서(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이옥식 님)

지옥에서 천국으로… 눈 뜨기 시작!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법륜스님의 말씀을 매일 유튜브로 들으면서, '아,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 지혜롭게 사는 게 저런 거구나' 하면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저를 일깨워주신 말씀은, "문제 아닌 것을 문제 삼지 마라.", "너나 잘해라.", "회사에서 돈값은 해라." 이 세 가지였습니다. 이 말씀들을 늘 마음에 새기며 생활하다 보니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수행문’과 ‘참회문’을 매일 읽으면서 실천하려 노력하니, 예전에는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상대의 언행에만 분별심을 내었던 제가 어느 새부턴가 나의 언행을 계속 살펴보고 고치려고 애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행복해지고, 주위 사람들도 함께 행복해졌습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준다면 어떤 종교이든 상관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의 업식 때문인지, 부처님 말씀과 그 말씀을 전해주시는 법륜스님의 방법이 제게는 아주 효과적입니다.

정토회 소임을 맡게 되고 카톡을 배우다

생존에 꼭 필요하지 않으면 일거리를 만들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어, 재혼 후에 성도 바꾸지 않고, 영주권 받은 지 30년이 되었으나 시민권 신청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휴대폰도 안 쓰고 SNS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토회 소임을 맡으니, 카톡, 밴드, 엑셀, 이메일 등의 사용이 필수더군요. 친절한 도반들의 도움으로 이젠 많이 익숙해졌으나, 처음에는 엄청나게 헤매었습니다. 또 알게 된 저의 업식은 다른 사람들도 다 나와 같을 거라 착각하여, '법륜스님 법문이 좋으면 계속 법당에 나올 거라고', 또 '본인의 업식이 정토회와 맞으면 정토회 회원이 될 거라'고 믿어서, 회원들 관리를 매우 소극적으로 한 것입니다. 새로 법당에 오신 분들을 잘 도와드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회원들도 여러분 떠나게 한 것 같아 아주 죄송합니다.

콜럼버스법당 천일결사 입재식(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옥식 님)
▲ 콜럼버스법당 천일결사 입재식(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옥식 님)

어? 스님이 휘청거리신다?!

정토회 회원이라면 인도 성지순례는 당연히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노상에서 볼일을 본다' 라는 잘못된 정보만을 믿어 인도 성지순례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수련차 워싱턴 법당에 갔다가, 스님께서 계단을 오르시다 발을 헛디디어 휘청하시는 걸 보고, '나중에 스님이 연로하시게 되면 어쩌지? 스님이 건강하실 때에 인도순례를 다녀와야겠다!' 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순례 신청 기간이 지났기도 했고, 우울증이 재발하여 만사가 귀찮기도 하여 포기했습니다. 어느 날 (미네소타에서 영어법회를 담당하는) 김세희 님이 제게 전화하여 아직 신청 기간이 남아있으니 함께 순례 가자고 하며 비행기 표 구매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길래 바로 표를 사게 되었습니다. 에너지 넘치는 세희 님과 함께라면 저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았던 인도성지순례

무변심 법사님과 임금이 지구장님에게서 순례 전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면서, '와! 정말 힘들겠구나, 바닥이 축축한 데서 잔다니 얼마나 추울까, 새벽과 밤엔 오리파카가 필요할 정도니 감기 걸려서 드러누우려나, 버스로 한참 갈 때도 자주 있고 중간에 설 수 없을 때도 있다니 약해진 방광 때문에 버스 안에서 실수하지 않을까, 엉뚱한 짓 잘하여서 단체에 민폐되지 않을까, 가끔 이런 병 저런 병이 생기는데 순례 중에 생기면 어쩌지' 하는 여러 가지 걱정으로 맘이 무거웠습니다. 순례 한 달 전부터 짐을 싸기 시작했는데 이런저런 고민으로 떠나는 날 오전에야 비로소 짐싸기를 끝냈습니다. 필요한 물품을 구매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도 소개해 주고, 여러 가지 의문점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의논해 주었던 김세희 도반에게 참 감사했습니다. 여러 가지 도움 말씀과 이것저것 필요한 것 챙겨준 법당의 도반들, 특히 따뜻하면서도 부피는 작은 침낭을 빌려준 도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그렇게 마음 준비와 물품 준비를 하고 인도에 갔는데, 첫날 비행기 놓쳤을 때를 제외하고는 예상보다 모든 일이 무척 쉬워서 다행이라고 좋아하면서도, 순례라면 좀 더 힘들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하는 저 자신을 보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2019년 인도 성지순례중에(뒷줄 오른쪽 끝이 이옥식 님)
▲ 2019년 인도 성지순례중에(뒷줄 오른쪽 끝이 이옥식 님)

허용된 것은 오직 구걸뿐

순례 중 걸으며 이동할 때는 사진에서와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아기를 안은 여인들, 노인들, 장애인들이 자주 보였고, 6살에서 12살 정도의 아이들은 우리 일행을 계속 따라오면서 구걸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을 보았을 땐 안타깝고 불쌍하게 보였습니다.불가촉천민들은 대부분이 구걸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또 매일 어느 곳에서나 같은 모습을 보다 보니, 물건 사라고 외치고 끌어당기기도 하는 상인들과 비슷하게 보여서 불쌍하다는 감정은 사라지고 오히려 구걸이 직업인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경험 후에, 불가촉천민 아이들을 위해 법륜스님께서 세우신 수자타 아카데미에 도착하니, 활기 있고 발랄한 학생들이 개교기념일 행사를 위한 준비를 열심히 해놓고 기념일엔 초대된 몇천 명의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구걸하던 아이들과 너무 대조되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가 없었다면 이 아이들도 지금 거리에서 구걸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이런 학교가 여러 곳에 생겨서 더 많은 아이가 구걸 대신에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2019년 인도 성지순례 53조 조원들과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이옥식 님)
▲ 2019년 인도 성지순례 53조 조원들과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이옥식 님)

경건하고 아름다웠던 그 날의 기억

순례 중 많은 순간들이 경건하고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아쉬웠던 것은 제가 늦게 합류하는 바람에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강가 화장터를 못 본 것입니다. 한 가지 인상깊었던 것은, 네팔 탄센에서 산으로 가는 골목길의 모습이 인도와 비슷했으나, 다른 점은 상점 앞의 길을 깨끗이 청소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네팔 경제는 인도보다 좋지 않은데, 그렇게 깔끔하게 해 놓으니 사람 살기에 더 좋은 곳 같아 보였습니다. 한 군데만 보고 이렇게 두 나라를 비교하면 안 되겠지만, 청소와 정리정돈의 중요함은 확실히 배웠습니다. 각자 다양한 개성을 가진 우리 53조, ‘영심이’조장 (김세희 님)을 비롯한 열 명의 조원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참 재미있게 순례를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콜럼버스 법당 총무로서 세운 원이 있는지 여쭈었더니, 기존 회원들이나 처음 오신 분 누구라도 다시 오고 싶은 편안한 공간으로 콜럼버스 법당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원이라 하였습니다. 자그마한 체구에 천지를 모두 품고도 남을 넓은 마음을 가진 이옥식 님의 큰 원을 응원합니다.

글_이옥식 (콜럼버스법당)
정리_정혜진희망리포터 (콜럼버스법당)
편집_박승희 (해외지부)

전체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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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명화

비행기 놓치고 당황하시지도 않고 처음 가보는 인도를 혼자 공항에서 밤을 보내시고 또 그 복잡하고 정신없는 곳에서 차분한 모습으로 뿅하고 나타난 보살님의 모습이 아직 기억에 생생합니다^^ 의지의 한국인 이옥식 보살님 화이팅!!

2019-02-26 01:28:21

윤태임

반갑습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그리운 콜럼버스에서 행복하게 불법이야기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한껏안아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2019-02-25 16:07:31

임금이

이옥식총무님의 수행담을 읽으며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면을 보게 되네요.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정혜진님, 박승희님 기사가 나오기까지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2019-02-25 14: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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