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흥덕법당
내게는 최고의 힐링센터, <바라지장>에서 딸을 바라지하다

흥덕법당에서 자주 보는 모습 중 하나는 회계 정리를 하느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박미숙 님 뒷모습입니다. 느린 말투로 “왔어요” 하며 눈웃음으로 도반들을 반기는 박미숙 님의 치열하고 뚝심 가득한 수행담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바라지장에서 박미숙 님
▲ 바라지장에서 박미숙 님

가난하고 고단했던 시절

가난한 집안의 6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왜 그렇게 가난했는지, 흰쌀밥을 먹은 기억이 없었고, 딸인 제가 대학을 포기하고 상업학교에 진학하는 건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엄마와 떨어져 살던 아버지는 나이 들어 병든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셨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스물 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엄마마저 병으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언니, 오빠들은 이미 가정을 꾸려 자기 살기에도 급급했기에, 남은 가족들의 생계와 남동생들의 학비까지 다 책임져야 했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고단한 날들이었습니다.

결혼을 탈출구로 삼다

엄마의 병세가 어느 정도 호전되고, 남동생이 취직하자 난 도망치듯 결혼을 했습니다. 중매로 남편을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약혼하고 남편에게 술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주변의 시선과 체면 때문에 ‘나 하나만 참으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결혼을 강행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술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신혼초엔 하루도 빠지지않고 술을 마시고 밤새도록 술주정을 했습니다. 참고 또 참으며 묵묵히 견뎠습니다.
첫째를 가졌을 때는 아기를 가진 기쁨 때문인지, 그때는 남편도 술을 덜 먹었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덜 받고 책을 읽으며 오직 태교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첫째 딸이 태어나자 시댁에서는 딸이라며 아무도 와보지 않았습니다. 임신중독증으로 힘겹게 낳은 딸이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후, 돈을 주고라도 아들을 사 오라는 시아버지의 요구로 4년 후에 아들을 낳게 될 때까지 냉대는 계속되었습니다.

모듬장 교육에서 도반들과 함께 (오른쪽 두 번째)
▲ 모듬장 교육에서 도반들과 함께 (오른쪽 두 번째)

앞만 보고 달렸더니 낭떠러지

200만원짜리 반지하 전세로 시작해서, 결혼 5년 만에 악착같이 돈을 모아 32평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남편은 술주정은 심했지만 다행히 생활력은 강했습니다. 방 두 개는 세를 주고, 네 식구가 한방에서 살았지만,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재미로 살 수 있었습니다.
결혼 7년이 지날 무렵 남편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평택에 있는 송탄에 식당을 차렸습니다. 영업이 끝나면 남편은 주변 지인들과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술을 마시면 취할때까지 마시고, 그러는 날이면 늘 술주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후 IMF로 식당을 정리하고 청주로 내려와, 경리, 운전학원 강사 등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마치 일에 중독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고 실패를 거듭하던 남편이 건축 자재 판매업을 한다기에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업 자금으로 댔는데, 사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자 남편의 방탕한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저는 마음도 멀어지고, 지치고 고단해져만 갔습니다. 싸움이 잦아지던 어느 날, 남편이 싸움 끝에 썼던 이혼 서류를 제출했고 모든 재산에 가처분신청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무엇보다 충격에 빠뜨린 건 남편이 적은 이혼 사유였습니다. 나는 아내도 엄마도 포기하고 음주와 가무와 향락에 빠진 여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배신감으로 받은 충격과 상처는 컸습니다. 40도가 넘는 고열과 높아진 간 수치로 19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친 뒤, 우여곡절 끝에 28년간의 결혼 생활은 소송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홀가분한 줄만 알았는데 막상 이혼하니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이혼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목을 메었지만, 마지막 순간 주변 정리라도 하고 죽자는 생각에 포기하고 강원도로 갔습니다. 숙식만 해결해준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말하고 간 곳은 식당과 펜션과 힐링 센터를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몸 하나 쉴 곳 없는 사람이라 생각해서였는지, 가리지 않고 엄청난 양의 일을 시켰고, 나는 가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삶에 미련도 여한도 없었기에, 주변을 보며 죽기에 좋은 곳이 많구나 싶었습니다. 열심히만 살면 잘 사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앞도, 뒤도 보지 않고 달린 끝은 바로 낭떠러지였습니다.
그런데 나를 살리려고 했을까? 군에서 휴가를 나온 아들이 이상하리만치 정리가 된 집안을 보고 울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아들은 자기가 무엇이나 다 한다고 집으로 오라며 울었습니다. 아들의 전화를 받고, 양양에서 한계령을 넘어 파주까지 눈보라를 헤치며 7시간을 운전해서 갔습니다. 금촌역에 있으니 저만치서 아들이 걸어왔고, 둘이 한없이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후 집에 돌아온 후에도 우울증은 계속되었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바라지 장으로 열린 새 삶

바라지 장 도반들과 함께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 바라지 장 도반들과 함께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그러던 중 어느 날, 딸의 권유로 팟캐스트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게 되었습니다. 듣고 또, 듣고 계속 들었습니다. 자꾸만 마음에 와닿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걸 계기로 2015년 가을불교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대학 특강 수련을 갔을 때, 바라지 하는 분들의 모습이 고맙고 좋아 보여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깨달음의장>에서 법사님 말씀에 마치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습니다. 결국, 그 무엇도 아닌 돈 때문에 이혼한 꼴이 되었다는 것을 그 순간 알았습니다. 여태 남편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원망했지만 결국 어리석은 건 나였습니다. <깨달음의장>을 다녀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바라지를 갔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 신이 나서 문경수련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비로소 사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바라지는 한 달에 한 번, 일 년 넘도록 이어졌고, 바라지 장은 내게는 힐링센터 그 자체였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하다는 생각은, 바라지를 하면서 다른 도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법사님과의 일문일답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보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잘난 줄 알던 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못되고 독한 사람이었던가. 이런 내가 밉고 싫어서 매일 남편과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울면서 절을 했습니다.
문경수련원에 가면 늘 따뜻하게 맞아주시던 활동가들과 법사님들 덕분에 나는 고통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바라지를 가지 않을 때는 법당에 나가 혼자 500배, 1,000배 절을 했고, 그렇게 마음은 서서히 치유되어 갔습니다.
지난달, 결혼을 앞둔 딸과 나는 수련생과 바라지로 문경에서 만났습니다. <깨달음의장>이 끝나는 마지막 밤, 수련장에 들어갔습니다. 엄마가 스승이라며 우는 딸을 안아주며 나도, 수련생들도, 바라지 하는 도반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 눈물은 슬픈 눈물이 아니고 깨달음의 행복한 눈물이었습니다. 바라지를 하며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더 할 수 없이 행복한 지금 바로 여기!

지금의 나는 여태 살아온 그 어느 시절보다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편히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가난한 어린 날의 기억도, 힘겨웠던 결혼 기간의 고단함도, 죽을 것 같았던 이혼의 고통도 다 벗어버린 지금 모든 것이 좋고 좋습니다. 잘 자라준 두 아이에게 감사하고, 헤어진 남편도 잘살길 기원합니다. 정토회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바라지는 “이 음식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입니다”라는 명심문과 함께 수련생들을 위한 공양 짓기가 시작됩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바라지였음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내가 받은 것이 너무도 커서 조금이라도 갚기 위한 마음으로 앞으로도 잘 쓰이며 살고 싶습니다.

엄마가 스승이라고 말하는 딸과 함께
▲ 엄마가 스승이라고 말하는 딸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으며 지난날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박미숙 님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많은 고난과 역경을 수행으로 이겨내고 마침내, 재앙을 복으로 바꾼 박미숙 님! 그 용기와 힘에 박수를 보냅니다.

글_ 김미경 희망리포터(청주정토회 흥덕법당)
편집_하은이(대전충청지부)

전체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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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걸 새삼 새기며 저도 그 길 걸어왔기에 더 큰 응원의 마음과 축하의 마음으로 박수쳐드리고 싶습니다. 나날이 행복하세요

2019-03-01 08:27:56

이순덕

감동적입니다 짝짝짝~~~
저의 주변을 다시 돌아보며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2019-02-23 22:11:27

강명숙

정말 감동입니다 응원보냅니다^^

2019-02-21 19: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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