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정읍법당
정토회가 아니면 이걸 극복할 수 있었을까?

3년만 봉사하며 공부해보라는 총무님 조언으로 시작해 벌써 6년째 정토행자로 사는 민영진 님.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지금도 좋고 미래도 좋은 이 길에 함께 갈 수 있어 행복하다는 민영진 님 이야기를 함께합니다.

맨 왼쪽이 민영진 님
▲ 맨 왼쪽이 민영진 님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두 아이를 낳고 삼십 대 중반이 훌쩍 넘어서 제 마음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아이들을 끔찍이 아끼는 남편과, 일과 가사를 병행하며 열심히 살았던 저는 서울의 귀퉁이 작은 마을에서 가족처럼 터놓고 지냈던 이웃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아이들은 매일 들로 산으로 나들이하며 자연 속에서 살았고, 국가의 자원으로 길들여지기보다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대안학교엘 다녔습니다. 삶의 정답이 그곳에 있는 듯 저는 '내가 잘살고 있다'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 속에 있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될 것 같았죠. 아이들 모두가 평화롭고 각각의 고유한 색깔로 피어날 거라고, 우리는 이다음에 나이가 들어서도 함께 마을을 이루고 살 거라고 종종 얘기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졌고 삶은 온갖 위선과 부조리, 탐욕과 배신으로 버무려진 도가니처럼 느껴졌었습니다.

불편한 사람들과 교류를 끊었고, 제 마음을 치유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재택근무를 했던 저는 단순한 일을 할 때면 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곤 했는데, 새로이 시작한 관계가 다시 틀어지기 시작한 어느 날 즉문즉설 말미의 불교대학 광고를 듣고는 바로 원서를 냈습니다.

입학식 날 처음 듣던 청법가의 ‘옛 인연을 이어서 새 인연을 맺도록’ 구절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선배도반들의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도 뒤돌아 볼 수는 없지’ 노래에 괴롭고 어리석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졌죠.
불교대학 공부는 그야말로 새로이 열린 세계였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세상에는 선과 악이 분명히 있어 ‘윤회’는 인과응보의 매서운 위협이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오로지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유일신 사상과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했는데, 업식으로 고와 락의 반복에 빠지는 것이 윤회이며, 고귀한 존재임을 자각해 세상을 평안케 하는 것이 붓다의 마음이구나 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지은 관계 속에서의 괴로움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로부터 생겨났으며, 내가 옳다는 아집과 한 치 앞만 봤던 욕심으로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편에게 큰일이 벌어지고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외할머니와 이모 손에 자란 저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정서적으로 불안했고 자존감이 낮았으며 관계에 집착하곤 했습니다. 이런 자신을 알고 있었는지 생존본능처럼 그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장애를 가졌음에도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고,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아 안정감이 있었으며, 제게 굳건한 믿음을 줄 뿐 아니라 제가 어려워하는 일을 나서서 척척 처리해주는 사람이었죠. 제가 정토회에서 활동이 점점 많아지자 말로는 ‘광신도’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새벽길, 늦은 밤을 마다치 않고 차로 마중 나와 주었습니다. 또한 평화운동 서명을 할 때는 지인들에게 알려 서명을 받아주기도 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 아들과 함께

그러던 남편이 허리통증으로 종합검진을 받다가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믿기지 않아 의사에게 되물었지만, 의사는 확신에 찬 진단을 하였죠.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짐을 꾸려 부안으로 이사오기전 다니던 서울의 큰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오래전 시어머니도 간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셔서 남편 나름대로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방심한 사이 병이 커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시골 생활의 불편함을 투덜댔던 것, 아이 문제를 떠넘기며 비난했던 것, 수행한다며 순간순간 자만했던 것 등 모든 잘못했던 일이 떠올라 후회되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모든 수행을 중단하고 벌을 받으리라 마음먹었죠.

마침 정일사 기간이라 이런 상황을 법사님과 나누었는데 법사님께서는 ‘아무 일도 아니다. 일상을 살아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진 듯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법사님께서는 그 행동이 남편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저밖에 모르는 행동이었다는 걸 알게 해주셨습니다. 무엇 하나에 꽂히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 용기 있는 듯하지만, 겁 많고 다치고 싶지 않은 사람. 전에는 몰랐던 제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제 곁에서 아이들도 남편도 힘들었겠구나 하는것을 알았습니다.

진행하던 행복학교를 도반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치고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서도 수요일이면 가까운 법당을 찾았습니다. 병원 안의 법당에서, 혹은 법당 문이 닫히면 옆의 천주교 기도실에서,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보호자 침대에서 기도를 놓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에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성당다닐때 읊조렸던 ‘모든 영예와 영광 영원히 받으소서.’란 기도문만 떠올라 그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하였음에도 막상 수술실에 남편을 혼자 들여보내고 나니 어찌 해보려 해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습니다.

정토회를 만나 수행을 하며 어린 날에 입었던 상처를 털어내고, 어디서든 무엇이든 혼자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생각하니 다 큰 어른인 남편을 챙기는 게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졌었습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나는 훨훨 문경으로 가서 원 없이 수행자로 살 텐데.’라고도 생각했는데, 저는 아직 그 수준이 아님을 알게 되었죠. 제가 얼마나 남편에게 아이처럼 의지하고 있는지, 지금 여기를 떠나 달리 어디에서 하는 게 수행이라는 건지 예전에 스님이 하셨던 말씀이 저를 두드려 깨웠습니다.

남편과 함께
▲ 남편과 함께

다행히 남편은 수술이 잘 되었고 지금은 틈틈이 운동하며 체력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전보다 더 끼니를 잘 챙겨 먹으며, 운동도 잘하고, 더 잘 웃고,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생활의 지나침이 없는지, 과욕을 부리지는 않았는지 일상의 신호등을 하나 얻은 셈입니다. 이제 저는 남편의 아이에서 어머니로 소임을 바꾸었습니다.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느냐 요구하지 않고, 지금 마음은 어떠냐고 불편한 곳은 없느냐고 먼저 살피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부안에서 다시 예전처럼 행복학교를 열었고, 어려웠던 경험을 나누며 우리는 조금 더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행복학교 이야기

부안의 행복학교는 즉문즉설 강연에 오셨던 여덟 분의 신청자와 함께 2017년에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읍의 손미옥 님이 먼 거리를 오가며 진행자로 스텝으로 지원을 해주셔서 가능한 일이었죠. 스님의 강연을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 경제적 어려움 등 개인적·사회적 고뇌를 종교와 상관없이 행복학교 프로그램으로 접근해 참가자들이 일상에서 집착과 욕심을 알아차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을 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행복학교를 진행하면서 바라는 바 없이 법을 전했을 때, 얼마나 큰 기쁨으로 돌아오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줄 맨 왼쪽이 민영진 님
▲ 앞줄 맨 왼쪽이 민영진 님

진정성과 신뢰를 기반으로 우리와 지역의 행복을 일구어나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움직임. 쉬지 않고 열고 있으면 새로운 분도 예전에 오셨던 분들도 다시 찾게 되는 밝음이 거기에 있어서, ‘행복학교가 한다.’라면 무조건 믿음과 지지를 보내주시는 소중한 참가자분들도 생겼습니다. 무언가 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가볍게 함께 배우는 마음으로 하니 제게도 더없이 큰 도움이 됩니다.

글_민영진 님(전주정토회 정읍법당)
정리_백경 희망리포터(전주정토회 정읍법당)
편집_양지원(광주전라지부)

전체댓글 13

0/200

윤혜진

감동적인 글 잘읽었습니다.
체험담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03-17 04:45:13

정명

\"무언가 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가볍게 함께 배우는 마음\" 감사합니다.

2018-09-30 20:53:52

채송화

시골로 내려가서 힘든 일을 겪으셨군요. 그래도 밝은 웃음 잃지 않고 행복학교도 계속 열고 있다니 제가 힘이 납니다. 여리지만 강한 민영진님, 존경스럽습니다.

2018-09-29 0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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