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북미동북부지구
총무하고 사람 됐어요
뉴욕정토회 대표 김숙현 님 수행담

뉴욕법당 총무직을 6년간 역임하고 9차 천일결사부터 뉴욕정토회 대표 소임을 맡게 된 김숙현 님을 만났습니다. 4차 천일결사 때부터 정진을 이어온 김숙현 님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수행에 임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괴로움의 씨앗 같았던 총무직

처음 총무직을 맡았을 때는 환경이 많이 열악했습니다. 지금은 워싱턴 DC에 수련원도 있고 일을 하는 시스템이나 봉사 인력도 상황이 많이 나아졌어요. 제가 처음 봉사를 시작했을 때는 수련을 진행하려면 제가 수련장도 구하러 다니고, 참가자도 모집하고, 봉사도 하고, 음식도 준비했습니다. 특히 수련장 구하는 일이 많이 어려웠던 기억이 나네요. 고심 끝에 수련장 하나를 어렵게 구했는데, 수련을 진행하다 보니 그곳이 근처 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지나다니는 길목이었더라고요. 소리가 너무 자주 들려서 수련 진행에 자꾸 방해가 되어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스님도 마음에 안 드셨는지 불편한 기색을 하시더라고요. 그걸 보고, 나름 어렵게 구한 수련장인데 서럽고 속상한 마음이 올라와 울음이 터졌습니다. 그 날 제가 너무 울어서 스님이 저를 달래주시느라 밥도 못 드셨습니다. 한번은 수련장으로 2시간 정도 운전해서 가다가 밥솥을 안 챙긴 것이 생각나 깜짝 놀라 돌아왔던 기억도 있고요. 봉사 후 돌아오는 길에 너무 피곤해서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하다가 뒤따라오던 후발대 차량의 운전자가 클랙슨으로 깨워준 덕분에 사고를 면하기도 했어요.

멀리서 취재 왔다고 비빔국수를 만들어 주고 있는 김숙현 님
▲ 멀리서 취재 왔다고 비빔국수를 만들어 주고 있는 김숙현 님

그래도 처음 3년은 일은 많았어도 저 혼자 일을 하면서 처리하면 되는 상황이어서 괜찮았습니다. 그다음 3년 연임하는 동안은 회의 체제가 도입되면서, 총무직이 훨씬 힘들어졌어요. 도반들과 함께 상의해서 일을 해나가야 하는데, 제가 일을 조직적으로 꼼꼼하게 하기보다는 즉흥적으로 직접 발로 뛰며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두 보살님과 부딪히기 시작했습니다. 한 분은 일을 굉장히 꼼꼼하게 하시는 분이었어요. 준비도 미리미리 시작하시는 스타일이셨죠. 그런데 저는 일이 닥치면 그때그때 진행해나가는 스타일이었어요. 또 한 분은 생선가게에서 남미 사람들을 큰소리로 지휘하며 일을 하시던 분이라 습관적으로 소리를 자주 지르셨어요. 저는 어릴 적 엄마한테 혼나던 트라우마가 올라와서, 누가 소리를 지르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물이 나더라고요.

처음에는 눈물이 나면 꾹꾹 참았는데, 제 마음을 한참 들여다보니 이것도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그 자존심을 놓아버리니까 화나면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정말 많이도 울었던 것 같아요. 제가 하도 울어서, 울면서 일한다고 필라델피아에도 소문이 나고, 스님들과 법사님께도 전부 소문이 나버렸어요.

괴로움의 순간을 수행의 기회로

한번은 도반들과의 관계가 너무 힘들어서 한국에 계신 유수스님께 전화해 울면서 상담도 했어요. 그러자 스님께서 몇 달 후에 미국에 수련 진행차 방문할 때 다 해결해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몇 달 후 스님이 오셔서 어떻게 해결해주길 원하냐고 물으시니, 스님이 해결해주고 가시면 제 공부가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번쩍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두고 가시라고 했어요. 제 마음을 들여다보며 수행하다 보니, 그 두 분이 나를 괴롭히려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그저 하고 싶은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보였어요. 사실 아직도 그 두 분이 아주 편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이나 그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어요. 그때 유수스님께 도움을 받았으면, 수행으로 극복할 기회는 없었을 것 같아요.

▲ 2008년 유수스님을 모시고 한 경전반 졸업식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숙현 님)

업의 대물림, 내가 끊어내리라

수행을 하다 보니 저의 이런 불편한 관계들은 제 어린 시절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어린 시절 맏딸로 엄하게 자라면서 엄마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많이 남아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침 정진 때 참회 기도를 하라는 기도문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엄마에게 참회기도를 하는 것이 억울하게 느껴졌어요. '내가 맞았는데 왜 내가 참회를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올라와서요. 자꾸만 화가 나서 기도 중에 울기 일쑤였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웃으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무슨 이야기만 나오면 울었습니다. 한참 눈물 빼며 기도를 하다 보니, 어느 날 기도 중에 외할머니 앞에서 혼이 나고 있는 엄마가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엄마 앞에서 떨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나도 보였어요. 제 외할머니도 무척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거든요. 엄마가 나를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도 외할머니 앞에서 무서웠겠구나 하고 공감도 되었고요. 이렇게 대물림이 되어 나한테 온 거구나 하고 깨닫자, 원망하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법륜스님의 법문처럼 이 업식이 대물림 된다는 걸 알고 나니, 저와 딸의 관계가 저와 엄마의 관계와 같다는 것도 인정하게 되었어요. 저는 딸을 엄하게 혼내거나 한 적은 없지만, 마음을 한참 지켜보다 보니 제가 엄마에게 내는 마음과 딸에게 느끼는 마음이 같다는 걸 알았어요. 딸도 약간 불편하거든요. 딸을 임신했을 때가 이민 초,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시골에서 외롭게 지내던 때라 제가 편안하지 못해 딸의 성격도 편안하지 못하게 형성되었던 것 같아요. 이 대를 물리는 업식을 꼭 제가 끊어내고 싶었습니다. 업식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들면 스님께서는 어릴 때 형성된 건 그냥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하지요. 그 말씀을 들을 때면 절망적이었지만, 묘덕법사님께서 열심히 수행하면 가능하다고 희망을 주셔서 그 말을 믿고 수행을 했어요. 틈만 나면 한국으로 수련을 다녔고 인도도 4번이나 다녀왔어요. 수련 때마다 최대한 다 꺼내놓고 업식을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작년에는 딸 집에서 한 달간 지내게 되면서 300배를 매일 했어요. 그래도 아직 이 업은 완전히 끊어내지 못한 것 같아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업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제 수행 과제라고 생각하고 꾸준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 2006년 인도 성지순례 (맨 왼쪽이 김숙현 님)

총무하고 사람 되어 감사합니다

그때 일 할 때는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아마 스님과 법사님들의 법문이 없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아직 업식을 다 고치지는 못했지만, 수행을 통해 괴로움은 없이 살 수 있게 되더라고요. 올라오는 업식을 지켜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고요. 외도를 하며 날 힘들게 했던 남편도 참 미워했는데, 돌이켜보니 제가 정토회 활동을 하도록 가장 큰 서포트를 해준 것이 남편이었어요. 요즘은 남편에게도 참 고맙습니다. 문제는 다 제게 있었을 뿐이더라고요. 그래서 지난번에 스님을 만났을 때 3배를 하고 왔어요. 총무 시켜주신 덕분에 사람 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요.

김숙현 님의 첫인상은 인자한 어머니 같았는데, 수행 이야기를 하다 보니 소녀 같은 열정이 느껴졌습니다. 기쁘게 봉사를 하시는 것 같아서 어떤 마음으로 봉사하시냐고 물으니, 너무도 쿨한 말투로 "저는 그냥 합니다."라고 하십니다. 뉴욕정토회와 역사를 함께하신 분의 마음가짐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해외사무국장을 맡고 계신 이정인 님은 김숙현 님과의 특별한 인연을 설명하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제 어머니와 김숙현 님의 어머니가 친분이 있어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는데, 비슷한 시기에 미국으로 오게 되어서 아이들도 친한 친구 사이예요. 3대째 이어지는 인연이네요. 특히 2003년 가을 한참 힘들어하던 저를 안내해준 김숙현 님 덕분에, 그 힘듦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좋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큰 번뇌 없이 가볍게 살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죠. 김숙현 님은 안과 밖이 같은 솔직하고 편안한 사람이에요. 언제 어디서든 남을 도와주려는 자비심이 많아요. 또 활력이 넘치고 추진력이 있어 초기 뉴욕정토회가 자리 잡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초창기에 법당이 없어 보따리를 싸서 이리저리 다니며 법회를 하던 와중에, 어느 날 목이 좋은 사무실이 나왔다며 벼락같이 추진을 하더라고요. 초기에는 비용문제로 반대하던 회원들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전 회원의 지지를 끌어냈어요. 2006년 그렇게 시작한 뉴욕정토회를 밑거름으로 2010년 뉴저지법당, 2012년 맨하탄법당이 만들어질 수 있었어요.”

법륜스님은 불사 승인을 정말 까다롭게 하시기로 유명한데,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짐작이 갔습니다. 이렇게 불사를 위해 수고해주신 분들 덕분에 저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인터뷰 시간이었습니다.

글_ 이윤희 희망리포터 (북미동부 맨하탄법당)
편집_이진선 (해외지부)

전체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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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호

"괴로움의씨앗같았던총무직"

제목이너무 멋집니다.
저 제목에서100마디, 1000마디말 보다 더 많은사연이 전해옴을느낍니다.

2017-09-10 20:31:34

유주영

숙현보살님
뵐때마다 푸근하고 행복한 마음이 듭니다.
도반이 슬픈 나누기를 할때 저처럼 보살님도 영락없이 눈물을 흘리셨던 기억이 나네요. 다행이 저도 이제 많이 단단해졌어요. 보살님 보고 싶어요^^

2017-08-26 13:15:25

고명주

흘리신 눈물 만큼 업식도 녹여내셨을것 같아요? 아름답습니다

2017-07-22 0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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