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대전법당
천일결사 담당자 김희동 보살님의 수행담

입재식이 다가오면 띠링~ 안내 문자가 날아옵니다. 또 참석 여부를 확인하고 버스에서 인원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 모든 일을 총괄하는 담당자가 법당마다 있습니다. 대전법당에서 6년 동안 천일결사 입재식과 연등불사 소임을 맡은 김희동 님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결혼

저희 아버지는 속정이 깊으셨지만, 자식들을 대할 때 항상 근엄하고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 자란 저는 아주 소극적이며, 내성적이었습니다. 시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있어 2년을 다닌 뒤 그만뒀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나니 결혼을 하면 남편이 벌어 주는 월급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중매로 만난 남편도 결혼을 서둘렀기에 꿈에 부풀어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 1년 뒤, 남편이 아무 상의도 없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제 인생은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다. 경험과 밑천 없이 시작한 공구 상회는 자금 부족을 겪어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친정 근처 한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남편이 심각한 얼굴로 ‘내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서 돈을 벌어, 목돈 쥐어 대전으로 올라오자.’ 제안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확고한 결심을 믿고 대구로 가서 대명동 골목에서 가게를 시작했는데 라면 1박스 떼다가 낱개를 파는 장사, 정말 말 그대로 구멍가게였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을 보며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저 사람들보다도 못 사는지 하루하루가 참 괴로웠습니다. 내 꿈은 이렇지 않았는데, 친정 부모님이 내려와 보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아이들 방학에 맞춰 대전 친정집에 올라와 저는 대구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남편이 한 달 만에 처가로 들어와 처가살이를 10년 동안 하였습니다.

집 장만의 꿈

친정에 있으며 남편은 직업을 몇 번이고 바꿨지만, 돈이 벌리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한테는 왜 돈이 안 붙는지, 다른 사람은 남편이 가정을 잘 꾸려나가는데 왜 우리는 안 되는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며 남편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러다 33살 때, 당시 아이가 집에서 영재 학습지를 했는데 1주일에 한 번씩 오는 대학생 선생님을 매주 눈여겨보니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용기를 내 학습지 선생님에게 ‘선생님, 혹시 영재 수학에서 주부들도 뽑아요?’라는 말을 건넸고, 이후 간단한 테스트를 받고 정식으로 수학 학습지 선생이 됐습니다. 하루빨리 내 집을 너무나도 장만하고 싶어 죽을 둥 살 둥 일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6년 후 내 집 장만을 하고 나니 쉼 없이 달려와서 그런지 몸이 힘들어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남편은 자동차 매매를 해보겠다고 했는데 이마저도 잘 안 돼, 빚은 빚대로 지고, 남편은 자기 마음대로 일이 되지 않아 술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식당, 백화점 반찬가게에서 일하다 억센 사람들에게 적응이 안 돼 일을 그만뒀습니다. 당시 남편은 직업을 바꿔가며 이것저것 해봤지만, 여전히 생활비가 부족해 허덕였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지인의 부탁으로 삼성 생명 시험만 봐 주러 갔다가 열심히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욕심이 생겨 마흔 넘어 삼성생명에 입사했습니다.

영업직은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던 저를 버려야 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교육받은 대로 현장에 적용하며 일에 빠져 살았습니다. 자기 전에도 내일 할 일들만 생각하고 일만을 위해 생활하니 일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보험회사의 경험을 통해 사람은 누구나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험이라곤 절대로 할 수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마음을 내니 좋은 결과가 따랐고, 일을 통해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도 밝고 활기찬 성격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곤 경제적으로 좀 여유가 생기면서 일을 그만뒀습니다.

15년 동안 일을 하면서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것 3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운전이었는데 삼성 생명을 다니면서 운전을 배웠고, 두 번째로는 스포츠 댄스였습니다. 은퇴를 하고 3년 6개월 동안 스포츠 댄스를 배웠고 마지막엔 족저근막염을 앓아 더는 운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불교 공부. 사찰도 가보고, 다른 단체에서 하는 불교대학도 다녀봤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닌 거 같아 항상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온종일 집에서 BTN 방송을 부여잡고 살았습니다.

즉문즉설을 만나다

여느 때와 같이 집에서 BTN을 틀어놓고 지내다 우연히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접했습니다. 자막에는 마산 정토회라는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왜 저런 단체가 대전에는 없는 거야?’라는 의문을 가지고 인터넷으로 정토회를 찾아봤고 대전의 부사법당을 발견했습니다. 열린 법회도 나가고 부사 법당을 나가면서 스님의 법문에 빠져 살았습니다. 2009년 12월에 있었던 시청 강연에선 스님께 책 사인을 받은 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아 그 자리에서 ‘스님! 사랑해요.’라고 떨리는 마음을 표현했고, 스님께서 쓱 쳐다보고 웃어주셨던 그 기억은 제 평생 설레는 기억으로 갖고 있습니다. 2010년 3월부터는 불대도 입학하고, 천일결사도 입학하면서 수행,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

제 마음속엔 남편에 대한 불만과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2010년 초 순회법회 때 스님께 질문했습니다. ‘남편 때문에 저는 온갖 고생을 하고 살았습니다. 남편이 너무 밉고 원망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너무나 괴롭고 힘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스님께서는 저의 질문에 즉설을 해주시며 기도문을 주었습니다.

‘우리 남편은 부처님입니다.’

기도문을 받고 황당하면서 억울했습니다. 절만 하면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눈물이 났습니다. 사시 예불만 해도 눈물을 흘렸고, 관음정근을 해도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분하고 화나고 억울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남편과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남편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에 다닐 당시, 남편은 중이염을 앓고 있었고 귀에서 냄새가 나서 그게 콤플렉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 귀에서 나는 냄새를 저 사람이 알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했었답니다. 결혼하기 위해 직장을 가졌고 이제 결혼을 했으니 아내는 구했으니 그만뒀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번듯한 직장을 그만둔 이유를 알았지만, 남편에 대한 원망은 여전했습니다.

우연히 천일결사 담당자가 되다

2011년 6월, 입재식을 다녀왔는데 전 담당자가 갑자기 몸이 아파 병가를 내는 바람에 제가 담당이 됐습니다. 엉겁결에 버스에서 좀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천일결사, 연등불사 모두 돈하고 연관된 업무입니다. 천일결사란 많은 미입재자를 입재식으로 초대하는 일과 동시에 입재식을 다녀와서도 전산입력, 결사금 처리, 예비자와의 만남 등 할 일이 많습니다. 준비도 안 된 상태고 엑셀을 전혀 모른 상태라 난감했습니다. 법당에서 젊은 도반들에게 묻는 것도 한두 번이지 다들 바빠 묻기도 어려웠습니다. 모름이 당연한데 왜 그리 부끄럽던지. 집에 와 아들한테 배우는데 답답해했습니다. 이걸 해야 하나? 물러서는 마음이 앞서고 갈등이 많았습니다.

한 달여 전부터 입재식 전날까지 자료를 갖춰 나름 완벽하게 참석 동향을 파악해 놓는다 해도 당일 아침에 쉽게 번복되어 참 난감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녔습니다. 당일 아침 입재식 현장에서 참석인원을 정확히 요구하기에 인원 파악하는 것도 예민해 했습니다. 또 결사금 미입금한 분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결사금을 내야 하는 당위성을 말해야 할 땐, 긴장되고 민망하고 어느 땐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정토회 입장에서 안내만 하면 되는데 그때는 내 개인 감정이 이입되었습니다. 이 무렵 정일사 때 법사님께서 짚어주신 법문으로 내 감정이 정리돼 지금까지 천일결사 담당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 또한 내가 담당자로 있었기에 정토회 모든 프로그램(정일사, 새물정진, 명상, 나눔의 장 등등)을 할 수 있어서 지금까지 봉사할 수 있도록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연등불사 역시도 대전법당 크기만큼의 목표액이 있기에 작년의 모연문을 바탕으로 법당에 나오시는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확인하여 참여를 독려합니다. 전화 전법, 카톡, 모연 권유, 1:1 접수 다양한 방법으로 정토행자들 깊숙이 파고들어 가 권유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정토회에서 소임이 주어져 봉사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와 맞물려 내 개인적으로 걸렸던 문제들도 점차 옅어져 지금의 내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업무 중인 김희동 님
▲ 업무 중인 김희동 님

천일결사, 연등불사를 맡아보니 제 업식은 새로운 일이 내 앞에 왔을 때 물러서려는 마음과 뛰어넘고픈 마음 두 마음이 충돌했습니다. 지금의 나, 수행자의 자세는 내 업식을 알고 뛰어넘어 보려는 의지가 있어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돌아보면 정토회의 봉사는 갈등 속에서 나를 보고 살피는 일이 소중한 수행터인 거 같습니다.

대전법당에서 김희동 님
▲ 대전법당에서 김희동 님

나눔의 장: 나를 되돌아보고 남편을 이해하다

작년에 나눔의 장을 갔습니다. 나눔의 장에서 제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20대 때 남편에게 품었고 기대했던 것에 내가 머물러 있음을 알았습니다. 어렸을 적 다정다감한 아빠를 원했듯이 남편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고 지금까지도 남편에게 바라고 있구나. 법사님께서

‘그 사람은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사람이야! 왜? 남자라는 자존심 때문에. 보살님이 더 능력 있고 더 힘 있는 사람인데, 왜 바라고 있냐.’

라고 말씀을 하는데 머릿속이 하얘지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거 같았습니다. 그 사람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인데, 내가 원한다고 해도 나오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는 사람인데, 내가 계속 바라고 원했구나! 깨달았습니다. 법사님 말씀에 남편에게 기대했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의 인생도 돌아봤습니다. 6.25때 태어나 전쟁 속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한 남편. 열악한 상황 속에서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일이 잘 안 돼 남편 또한 힘들었겠구나. 친정 부모님과 같이 사느라 남편 또한 답답했겠구나. 이러한 남편이 있었기에, 저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나를 변화시켜주고 정신적으로 성장시켜준 고마운 사람이었습니다.

인도성지순례 중 법륜스님과 함께
▲ 인도성지순례 중 법륜스님과 함께

혼자 하면 중단하기 쉬운데 천일결사자라는 한 울타리에서 도반과 같이 어우러져 가다 보면 어느새 변해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전히 저는 남편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한 번은 듣고 싶은 중생이지만, 그래도 이 좋은 법을 만나 남편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녹여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접한 이 좋은 법을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려, 과거의 저처럼 번뇌와 괴로움 속에 사는 사람들이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전법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남편은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후 봄 불교대를 다니고 있으며 아들은 경전반을 졸업하였습니다. 여동생도 올해 가을 불교대에 입학하였습니다. 이 좋은 법, 저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제 주변 지인 나아가 번뇌와 괴로움 속에서 사는 누구에게나 전해 그들 또한 행복해졌으면 합니다.

부처님 오신날, 김희동 님 남편
▲ 부처님 오신날, 김희동 님 남편

글_배성화 희망리포터(대전정토회 대전법당)
편집_함보현(대전충청지부)

전체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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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숙

화이팅~!!
소중한 내용 잘 읽었습니당 ~
사랑합니데이 ~ ♡♡

2016-11-26 10:16:05

김은숙

상황따라 주저앉지않고 벌떡벌떡 일어나는 보살님 보며 저를 돌아봅니다. 감사합니다~ ^^

2016-11-22 15:11:07

강민정

보살님 ~
감동입니다.
멋진 희동보살님♡♡♡

2016-11-21 20: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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