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강화법당
통일이여 오라, 어서 오라
강화법당 교동도 평화기행

통일기도 4년 한겨울에도 염천에도 멈출 수 없다

인천시 강화군은 여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도인 강화도를 비롯해서 보문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석모도, 그리고 평화의 섬으로 불리는 교동도와 친환경 섬인 볼음도, 주문도, 아차도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중 최북단 섬인 교동도는 2014년 7월에 연륙교가 놓이고부터 24시간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검문을 하는 군인은 출입자들에게 해가 지기 전에 섬에서 나와야 한다며 주의를 주었습니다. 교동도에 통행금지 시간이 있는 것은 민통선 안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6월 18일에 강화법당에서는 교동도로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강화군 양사면에 있는 평화전망대에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비는 기도를 올린 후 교동도로 건너갔습니다. 강화법당에서는 매달 세 번째 주 토요일마다 평화전망대에서 통일기도를 올립니다. 한겨울 찬바람에 손이 곱고 발이 시릴 때도 기도회는 계속되었고 폭염이 내리쬐는 염천의 계절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2013년부터 시작했으니 햇수로 벌써 4년이나 되었습니다.


시간이 멈춘 교동도 빤히 건너다보이는 고향 땅

교동도를 들어가려면 검문소를 두 개나 거쳐야 합니다. 늘 보는 사람에게는 별다르지 않을 이런 것들도 처음 보는 사람은 신기하고 또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분단된 우리나라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직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교동도는 시간이 멈춰있는 섬입니다. 오래 고립되어 있던 곳이다 보니 1970년대를 나타내는 풍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대룡시장의 좁은 골목을 따라 걷노라면 먼지 쌓인 옛것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팔순이 넘은 어른들이 운영하는 시계포도 있고 이발소도 있습니다. 하루 잠깐 머물며 구경하는 우리에게는 단순히 구경거리일 그 모든 것들은 그러나 그곳 분들에게는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생존의 역사 현장이기도 합니다.
교동도의 주민 중에는 북한이 고향인 분들도 많습니다. 한국전쟁 때 난리를 피해 잠시 이웃 섬으로 건너온 게 그만 영영 고향과 생이별 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빤히 건너다보이는 고향 땅을 가보지 못한 게 65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실향민 1세대들은 많이 돌아가시고 그 후손들이 선대의 고향인 황해도 해주며 연백을 꿈꿉니다.
이번의 평화기행에는 인천법당에서도 여러 분이 함께 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 오듯이 왔는데, 교동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노라니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고 하셨습니다. 초등학생 자녀의 손을 잡고 온 분도 계셨습니다. 부모형제와 생이별한 교동도의 실향민들 처지를 헤아려 보노라니 마치 자기 일이기라도 한 양 어린 자녀의 손을 더 바짝 힘을 주어 잡았습니다.

화개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높이가 약 이백여 미터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정상에 서면 온 사방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입니다. 북한의 황해도 연백군은 물론이고 개풍군까지도 건너다보입니다. 화개산 중턱쯤에는 돌로 쌓은 성이 산허리를 따라 길게 뻗어 있습니다. 화개산성입니다. 어느 시대에 쌓은 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측건대 삼국시대 때 쌓은 성이 아닐까 합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남하정책을 펴서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냈습니다. 고구려는 관미성 전투에 승리해서 한강 유역을 차지했습니다. 학자에 따라 관미성을 달리 말하지만 그중에는 교동도의 화개산성을 관미성이 아니었을까 보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교동도는 삼국시대에도 역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나 봅니다.
산성은 전쟁이 났을 때 산으로 들어가서 적과 대치하기 위해 쌓은 성입니다. 그러자면 식수가 확보되어야 하겠지요. 화개산성 안에도 약수터가 있습니다. 물양은 풍부하지 않지만 목을 축일 수 있을 정도의 물은 아직도 나옵니다. 약수터 뒤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효자묘’란 이름이 붙어 있는 산소가 하나 있습니다. 효자묘에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개의 전설들이 민중들의 애환과 소망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효자묘 전설도 역시 그러합니다. 언제 어느 때, 누구의 이야기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이 이야기는 가슴 아프고 슬픕니다.

통일기도 평화기행 민족을 옭아매고 있는 분단의 사슬을 끊기위한 작은 몸부림

변방을 지키는 군사가 있었습니다. 이 ‘수자리’는 한번 가면 살아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삼국유사의 ‘설씨녀와 가실’의 이야기에서도 수자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설씨녀의 아비를 대신 해서 변방으로 수자리를 떠난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효자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잣집 아들을 대신해서 가난한 집의 아들이 변방을 지키러 가게 됩니다. 물론 아비가 평생 먹을 양식을 받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늙은 아비는 아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늘 화개산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아들과 아비는 미리 약조했습니다. 매일 저녁 무렵에 성벽에 흰 옷가지를 걸어두고 생사를 확인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이 행위를 수상히 여긴 대장은 아들을 가두고 심문하였습니다. 그동안 성 아래에 있던 아비는 아들의 소식을 알 수 없어 애를 태웠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대장은 아비를 묻어주고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천오백 년 전 그때도 자식을 전장에 보내놓고 부모들은 애를 태웠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155마일 휴전선을 지키는 우리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와 현실 앞에 평화기행을 온 도반들은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이 사슬을 만든 것도 우리이듯이 이것을 없앨 수 있는 사람도 역시 우리일 것입니다. 통일기원기도와 평화기행은 민족을 옭아매고 있는 분단의 사슬을 끊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고 행동일 것입니다.
화개산의 정상에 서서 말없이 북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의 들판도 교동도의 들과 마찬가지로 초록색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모를 내었으니 북한 들판의 벼들도 지금 한창 잘 자라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목이 메는지 목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힘차게 불렀습니다. 통일이여 오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글_이승숙 희망리포터 (인천정토회 강화법당)
편집_유재숙 (인천경기서부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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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화

꾸준히 통일기도를 이어가는 강화법당 도반님들 고맙습니다.

2016-08-22 11: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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