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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직을 반복했습니다. 어머니가 아픈 몸을 이끌고 가정 경제를 책임지다 보니 가족들을 세심히 챙기지 못했고, 저는 아침에 나가 밤에 들어오는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어린 제게 그 책임감이 버거웠습니다. 아버지는 다혈질에 의처증도 조금 있었고, 부모님 사이에 다툼이 잦았습니다. 세상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아버지는 장녀인 저에게 자주 화풀이를 했습니다. 저에 대한 꾸지람부터 세상에 대한 온갖 불만까지 다 쏟아냈습니다.
머리가 크면서 부모님에게 반감을 가지고 대들고 반항하며 자주 충돌했습니다. 그때는 부모님에게 순종하면 마치 저 자신이 없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제 가정이 생기면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리라 다짐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 마음속 상처가 많았습니다.
어릴 적 가정 환경의 영향인지 세상을 보는 제 시각은 대개 부정적이었습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과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고 가족 간의 정과 마음을 나누지 못했기에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마음 또한 강했습니다. 그것이 사랑고파병인 줄 나중에 알았습니다.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했고, 화목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제 생각과 아주 달랐습니다. 무엇이든 다 받아줄 것 같던 남편과 갈등이 깊어졌고, 시댁으로 인한 갈등도 괴로웠습니다.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자 열심히 살아온 것 뿐인데 왜 이런 괴로움이 내게 생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아이가 두 돌 되던 해 직장을 그만두자마자 남편이 병을 얻었습니다. 아이는 어리고 남편은 아프고 시어머니는 무서웠던 그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괴로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다행히 남편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잘 회복하였습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저의 육아 방식에서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제 아이는 다르게 기르고 싶었는데 제게 부모님의 모습이 똑같이 보이니 너무 괴로웠습니다. 아이가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극에 달해 멀쩡한 아이를 데리고 상담까지 다녔습니다. 남편은 아이 상담을 반대했습니다. 남편이 보기에 아이는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전문 상담 선생님에게 치료받는 동안 저는 저대로 원장님과 함께 아이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아이의 행동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대화했는데, 돌아보니 그게 부모상담이었습니다. 부모 상담이 핵심인데 저는 멀쩡한 아이를 치료하겠다고 나섰던 겁니다. 그즈음 정토회와 인연이 되었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가서 법사님 말씀에 펑펑 울었습니다. 내 문제로 아이에게 집착하는 나의 상태를 자각하면서 아이에 대한 집착이 한 겹 크게 벗겨졌던 순간이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이 친구 엄마 한 명이 정토회에 다니고 있었고, 친하게 지내던 엄마 세 명이 함께 정토회를 갔습니다. 그때 같이 갔던 엄마는 법회를 무슨 가정집에서 하냐고 사이비 같다고 그만두었습니다. 또 저희를 인도했던 엄마도 바쁘다고 그만두고, 결국 저 혼자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정법회를 열던 도반의 소탈하고 수행자적 면모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집에 있는 텔레비전에 연결해 법문을 듣고, 절 방석도 없이 집에서 쓰는 작은 방석들을 깔아놓고 절을 했습니다. 아이들도 있고 좁은 집안에서 소박하게 여는 가정법회는 제가 알던 절의 모습과 달랐지만, 스님의 법문은 감동적이었고 또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꾸려지는 모습들이 좋았습니다. 그해 가을 경기도 구리에 정식으로 정토회 법당이 생겼고, 가정법회를 열던 도반은 초대 총무 소임을 맡았습니다. 저는 개원한 구리 법당에 불교대학 1호 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불교대학 때 동기 도반이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눈물을 흘리며 남편에게 참회기도를 하고 또 절절한 마음 나누기를 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계속해서 깊은 참회를 하고 진솔한 나누기를 하는 도반을 보면서 부러웠습니다. 저는 백일을 작정하고 부모님께 참회 기도를 했지만 마음에서 받아들여 지지 않아 중간에 멈추었습니다.
정토회 소임을 하면서 분별심이 많았습니다. 믿을만한 도반에게는 가끔 직설적으로 불만을 얘기했고, 불편한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표면적으로 부딪치지 않을 때에도 마음속에는 분별심이 많았습니다. 사랑과 인정에 목말라 있다 보니 소임을 하면서도 기대만큼 인정을 못 받으면 섭섭하고 불만스러웠습니다. 매일 법당에 드나들다시피 했기 때문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머리로는 제 자신이 불편한 마음을 일으킨 걸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흔쾌히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스님 법문을 계속 듣다 보니 마음이 점점 편해졌습니다. 가족과 정을 나눌 여력도 없이 고달프게 살았던 부모님이 조금씩 이해되었고 원망도 차츰 줄어들었습니다. 법문 듣고 정진하고 소임 하면서 어린 시절을 여러 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관점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어릴 때 정말 힘들고 괴로웠다는 생각이 점점 옅어졌고, '나도 그냥 평범하게 살았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습니다. 또 남편이 아플 때 많이 힘들었는데 나중에 법문 들으면서 ‘내가 남편 걱정을 한 게 아니라 나 살 걱정을 했었구나’ 싶으면서 남편에게 참회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다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전면적인 봉사는 못했지만 매월 통일의병활동을 했고, 급한 도움 요청이 있을 때 일일 봉사를 하였습니다. 10차 천일결사를 시작할 무렵부터 소임을 꾸준하게 맡아하면서 남편에게 불교대학을 권유했는데, 남편이 뜻밖에 흔쾌히 입학했습니다. 이제 경전대학까지 졸업한 남편은 저의 정토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든든한 도반입니다. 제가 정토회 소임으로 바쁠 때면 남편과 아이는 알아서 식사와 설거지를 해결합니다. 제가 정토회 활동에 관심을 쏟으니 오히려 가족들이 더 자유롭고 편안해 보입니다.
제게는 하나의 의문이 있었습니다. 사랑과 인정에 대한 갈망이 강한 제가 사랑을 그렇게 원하는데도 왜 사람들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뚝뚝 끊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친하게 잘 지내다 어느 순간 관계가 끊어졌고, 어디를 함께 가도 혼자인 듯 뿌리내리지 못하는 저 자신을 보면서 왜 그럴까 싶었습니다. 부처님 법 공부하면서 상대가 아니라 저 자신이 마음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상처받기 싫어 방어적으로 마음을 닫아버리는 저의 업식을 알게 되자, 그동안 남 탓하며 살았던 제 모습이 선명히 보였습니다.
중간에 정토회 활동을 쉰 기간도 있지만, 고맙게도 도반들이 다시 불러줘서 지금까지 수행과 활동을 해 올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과거에 대한 원망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줄어들면서 마음이 많이 편해졌습니다. 같은 뜻을 가지고 만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수행하고 함께 성장하면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과거에는 몸만 어른이지 사랑과 인정에 껄떡거리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었다면, 이제는 정토회 활동으로 어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랑고파병은 내가 원하는 만큼 사랑을 받아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내려놓으면서 자유로워지는 것임을 이제는 압니다. 지금도 순간순간 사로잡히지만 예전만큼 강하게 오래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다. 상대에게 인정을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전보다 한결 자유롭습니다. 또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법문도 꾸준히 수행하다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제게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갖추어져 있거나 혹은 열심히 노력해서 행복이라는 열매를 얻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정토회 소임이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 자발적으로 소임을 맡아 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인간관계. 서로 다른 업식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화합하며 정진해 나아가는 것은 엄청난 경험입니다. 지금은 남양주 지회 지원담당 소임을 하면서 ‘나의 부족함을 알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합니다.’를 명심문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귀찮아하고 뒤로 미루는 습관이 있지만 그런 나를 알아차리면서, 앞으로도 주어지는 소임이 있으면 잘 쓰이려 합니다. 또 제가 사는 동네의 도반들, 이웃들과 함께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함께 해나가고 싶습니다.
올 해 초 인도성지순례를 가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작년 말에 그만두었다는 정산향 님의 말에서 부처님의 일생을 배우며 따라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부처님 법을 배우면서 마음을 살피고 돌이키며 자유로운 수행자로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정산향 님의 모습이 아름다워 자꾸 응원하게 됩니다. 어릴 적 상처가 경험이 되고, 그 경험이 자산이 되어 삶이 가벼워진 한 수행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희망리포터의 소임이 소중하고 고맙습니다.
글_김진희 희망리포터(대전충청지부 청주지회)
편집_이혜수(서울제주지부 성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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