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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말씀에 의하면, 저는 어린 시절 아주 개구쟁이였다고 합니다. 5살 때는 겁도 없이 대추나무를 타고 놀다가 떨어져 마취도 없이 48바늘을 꿰매야 했고. 6살 때는 제가 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엄마가 시뻘건 피자두를 제게 들이밀면서 “이거 먹고 죽어라!”라고 해서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동네 어른들은 똑똑하고 말을 굉장히 잘하는 저를 변호사라고 불렀습니다. 어릴 때 저는 욕심이 많아서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하는 활동은 다 하고 싶어서 이것저것 많이 했었습니다.
아버지는 생활력이 없어서 엄마를 힘들게 했지만, 저에게는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엄마는 장사하느라 늘 바빴고, 남아선호사상이 강했습니다. 그 시대엔 차별받는 게 당연해서 차별인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사춘기 무렵부터는 엄마의 화난 말투가 싫어서 가끔 엄마를 속으로 욕했습니다. 엄마는 제 친한 친구가 부잣집 애라서 같이 다니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저를 다른 고등학교에 보냈습니다. 먼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에 혼자 기차로 통학하면서 저는 불량한 아이들과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점점 소위 말하는 문제아가 되었습니다. 급기야 3학년 때는 정학을 당하면서 학업을 포기하고 더욱 방황하였습니다.
깊은 방황 속에서 아이 아빠를 만났고 위태로운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엄마와 언니가 ‘그래도 학교는 가야 한다’고 저를 찾아오고 또 찾아왔습니다. 그래도 저는 학교에 안 가고 또 안 갔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아이 아빠한테 맞았습니다. 맞으면서도 계속 살았습니다. 제가 좋아 살았던 것도 있지만 여자는 이래도 저래도 참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살았습니다. 남편의 매질과 언어폭력이 소름 돋을 만큼 끔찍했지만, 아이들과 부모님 그리고 사회 경험이 전혀 없는 저를 생각하면 이 집을 나간다는 상상조차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제가 잠깐 어디만 가도 전화해서 ‘지금 어디냐? 뭐하냐?’고 의심했습니다. 슈퍼만 가려고 해도 불안해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의심받을까 봐 ‘이래도 될까? 저래도 될까?’ 제 행동 하나하나가 다 신경 쓰였습니다. 제 마음은 늘 긴장하고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남편이 저를 의심하고, 때리고, 언어폭력을 하는데 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진짜 몰랐습니다.
제가 아는 행복은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을 갖거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행복을 돈으로 생각해서 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돈이 많아야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 세상을 갖추려 이래도 참고 저래도 참으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폭행의 강도는 더 심해졌습니다. 결국, 제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고 나서야 30 여 년 된 남편의 폭력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병원 입원이 계기가 되어 이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퇴원하고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친정집으로 갔습니다. 엄마는 동네 사람들 눈이 무서워 저를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엄마한테 서운해서 다음날 친정집을 나왔습니다. 운전하는데 한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감정이 복받쳐 차를 세우고 퍼붓는 비처럼 저도 울었습니다. 그길로 청주에 와서 집을 얻어 혼자 살기 시작했습니다. 쉽지 않은 이혼 과정을 겪으며 남편이 사업하다 망해서 진 제 명의의 빚을 고스란히 떠안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매우 큰 돈이었지만, 남편도 돈 버느라 갖은 고생하며 열심히 살았으니 괜찮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홀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우연한 기회로 법륜스님의 법문을 접하고부터 SNS에서 스님의 《금강경1》강의와 《반야심경2》강해를 들었습니다. 정토 불교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한 둘째 언니가 저에게 불교대학 입학을 여러 번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님 법문을 SNS로 이미 5년이나 들었던 터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가벼이 외면했습니다. 그러다 2015년에 인연이 되어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불교대학에서 ‘인생 그래프’ 그리기를 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제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었습니다. 나를 내어놓을수록 가벼워지는 이 새로운 경험을 계기로 〈깨달음의 장3〉에 가고 명상수련에도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점점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9박 10일 명상수련에 참여했던 6일째 날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대추나무에서 떨어지면서 팔이 찢어져 마취도 못 한 채 49바늘을 생으로 꿰맸던 날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때의 두려움과 고통이 전해져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끝이 쭈뼛 섰습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엄마를 찾던 5살 꼬마를 엄마는 끝내 한번 안아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겪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외로움에서 시작된 업식이었습니다. 명상을 통해 오롯이 ‘나’를 마주하며 업식의 뿌리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명상 후 스님의 법문을 듣고, 느낀 경험을 나누면서 ‘떠오른 것을 그렇구나 하고 딱 놓아야 한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밑바닥에 그 상처받은 어린애의 마음이 그대로 꽉 눌려있어서 놓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로 돌아가 상처를 끌어안았습니다. 쫓아가서 엄마에게 생채기를 내고 싶을 만큼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했습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상처를 제가 다 쥐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꿰맸던 상처가 흉터가 되어 팔에 그대로 남은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흉터가 되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어깨가 너무 아팠습니다. 누가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고 쑤셔서 힘들었습니다. 한의원에 자주 다녔습니다. 부항 뜨고 침 맞고 약을 먹어도 늘 아팠습니다. 문경수련원 원력당에서 스님과 같이 9박 10일 명상수련할 때였습니다. 앞에서 스님이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라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픈데, 어떻게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본래 편안한데!’ 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 통증이 가짜구나!’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마음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다고 말했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자란 저도 힘든 걸 다 어깨에 올려놓았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던 것입니다. 가짜인 걸 알아차리는 순간, 어깨에 있던 것들이 녹아내리며 줄줄 밑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더니 거짓말처럼 통증이 싹 사라지고 가벼워졌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저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짜일까?’라며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전대학 졸업 후 선배 도반의 꾸준한 권유로 수행법회 담당 소임을 맡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소임을 하면서 마음나누기에 부담감을 느끼는 이유가 ‘남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마음’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배 도반이 불교대학 진행을 해보면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된다며 꼭 한번 해보라던 말을 잊지 않고 불교대학 진행자 소임도 맡았습니다. 다시 공부하며 내가 버린 쓰레기가 내 집에서만 사라졌을 뿐 지구에 여전히 그대로 있음을 깨닫고 환경문제에 한 발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봄 경전대학 돕는이를 맡아 다시 금강경을 공부하면서는 제가 껄떡거리는 원인을 알았습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베풀지 못하고, 늘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고서 저를 지켜보니 정말로 바라는 마음이 늘 떠나지 않는 걸 알았습니다. 슈퍼나 어디를 가든 ‘하나 더 주려나?’, ‘싸게 사야지’ 하는 마음이 쉴 새 없이 굴러갔습니다. 베풀 줄 모르고 바라는 마음만 진짜 가득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작년 4월부터 실천지 담당 소임을 맡아 문경수련원의 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INEB 행사를 준비하며 일부러 활짝 핀 수국을 몇 송이 사다가 수련원 입구에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보니 꽃이 없어졌습니다. 너무 황당했습니다. 일하기도 싫고 기운도 떨어졌습니다. ‘너무한 것 아니냐?’는 제 얘길 듣고 수련원 담당자가 알아보니, 한 도반이 천도재에 올릴 꽃 공양을 준비하다가 예뻐서 꺾은 것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꾸 ‘왜 그랬지?’ 하는 생각이 올라와 서운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문득, 꽃이 사라진 게 아니라 여래원으로 공간만 이동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눈에 안 보인다고 꽃이 사라졌다며 집착하고 괴로워했던 나를 돌아보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집착하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워준 도반에게 감사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정진하는데 또 서운한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저를 보았습니다. ‘나도 그랬었지!’ 도반이 곧 내 모습임을 깨닫자 도반이 그냥 이해되었습니다. 그러자 서운했던 마음마저 사라졌습니다.
소임을 통해 결국 ‘내 문제’라는 걸 공부할수록 밖으로 향했던 눈을 조금 더 안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나’를 알아갈수록 점점 ‘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소임이 안 올까 걱정할 만큼 소임이 주는 게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습니다. 소임을 할수록 제 괴로움이 줄어들어 재미있습니다. 모를 때는 그냥 억울하고 분했던 문제가 소임을 통해 공부하며 상대를 이해하게 되니 저절로 풀립니다. 어쩔 수 없어 맡은 소임도 하다 보니 하나씩 툭툭 들어오는 게 있어서 ‘소임 안 했으면 어쩔뻔했나!’ 안도합니다. 제게 꾸준히 손 내밀어 준 도반에게 참 감사합니다. 소임 하다 보면 ‘내 공부’ 아닌 게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내 공부라 생각하니까 다 괜찮습니다. 소임은 ‘나를 찾는 과정’입니다.
수행자라고 해서 힘들었던 옛일을 선뜻 내보이기가 쉬운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인터뷰하면서 반갑고 기쁜 마음이 컸지만, 송구한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꺼내 들려줄 때는 이야기로 들어가 외로운 경미를 꼬옥 안아주고 싶어 어쩔 줄 몰랐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전법과 수행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내어놓겠다는 선배 도반님이 참 멋졌습니다. 저도 희망 리포터라는 소임 덕분에 공부가 되었습니다. 선배 도반님 따라 저도 수행정진 하겠습니다. 수행담을 나누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글_장수린 희망리포터(인천경기지부 인천지회)
편집_박은영(대전충청지부 천안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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