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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결혼하고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철없는 큰 며느리였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다 커서 남편과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습니다. 남편은 ‘법륜스님이 은인이다.’라고 말합니다. 제 활동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주는 마음에 항상 감사합니다. 아이들과도 무난합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큰아이를 그저 아이 몫이려니 담담히 바라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자식이 욕심대로 안 되니 항상 다그쳤고 돌아서면 그런 자신을 탓했습니다. 지금은 자책 없이 마음이 가볍고 밝습니다.
졸업하고 계속 일만 했던 저에게 직장생활은 그냥 숨 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직원들도 잘 도와줘서 전법 활동을 무난히 하고 있습니다.
불교대학 진행이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요즘은 즐겁게 수업합니다. 적극 참여하는 도반들을 볼 때면 학생일 때 법 만나 기뻤던 감정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학습, 수행, 공동 정진 등 어느 하나 저를 가만히 있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학생 때 받은 은혜를 다시 학생들과 나눌 수 있어 정말 감사합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물론, 다른 의견을 내거나 혹은 못 따라갈지라도 여유롭고 차분하게 지켜봅니다. 힘들어하는 도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손잡아 주며 함께 가는 중입니다.
처음엔 저만을 위해 공부하고 활동했지만, 소임을 통해 남에게도 좋은 일임을 알았습니다. 대학 갈 때 환경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먹고 사는데 바빠 약대를 선택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환경 활동을 하면서 즐겁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저는 완도 시골에서 대가족으로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 여동생, 저는 골칫덩어리 둘째였습니다. 그렇다고 가족 간의 갈등으로 힘든 적은 없었습니다.
오빠는 첫아들로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자랐습니다. 저는 너무 못 생겨서 안아주지도 않았답니다. 그래도 자라면서 똘망똘망하고 이것저것 잘하다 보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항상 ‘우리 은경이 잘한다. 최고야!’라고 해준 믿음 덕분에 ‘나는 못 하는 것이 없다.’ 생각했습니다.
중학생일 때 부모님은 저희 교육을 위해 이사했습니다. 기반이 없는 부산에서 아버지는 노동하고 어머니는 하숙을 열었습니다. 365일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젊은 나이에 고생한 부모님을 존경합니다. 자식들이 원하면 뭐든지 해줄 거라는 든든함이 있어 부족함 모르고 자랐습니다. 돌이켜 보면 감사할 뿐입니다. 다소 부담은 있지만 이젠 제가 연로한 부모님을 책임지고 싶습니다. 부모님은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인 동시에 자식보다 더 큰 집착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불교대학 오전수업이 끝나고 친정 부모님과 시간을 보냅니다. 부모님의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한 기운에서 다시금 힘을 얻습니다.
약대를 졸업하고 돈 만질 필요 없는 병원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능력에 한계를 느껴 퇴사했습니다. 2000년 여름, 의약분업이 되고 동업으로 약국을 열었습니다. 동업자와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약국을 할수록 일이 점점 복잡해지고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당이 안 되니 인연을 끊고 싶었습니다. 동업이 시작할 때와 다르게 헤어지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둘째를 막 출산하고 몸이 무거운 상태에서도 의욕적으로 일했는데 그런 결과가 나오니, 어리석게도 ‘죽으면 다 해결될까’하는 생각에 부산 지하철 1호선에 서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거기서 뛰어내리면 전부 잘 정리될 것 같았습니다.
지나고 돌아보니, 힘든 만큼 이익을 거두지 못하고 뜻대로 되지도 않는데 타협할 줄도 몰라 괴로움을 키운 듯합니다. 아이들도 있으니 살아야겠다 다짐하고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기웃댔습니다. 그러다 얼핏 동료 약사와 찾아간 적이 있는 정토회가 생각나 해운대 법당에 제 발로 찾아갔습니다.
강연을 듣고 나면 기쁜 마음에 잠을 못 잤습니다. 집이 있는 대연동에서 해운대를 가기 위해 광안대교를 건너는 데 마음이 너무 벅차서 다리가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더 이상 죽고 싶은 마음은 없어졌고 편안해진 상태에 만족하며 저는 정토회를 떠났습니다.
나이가 딱 50이 됐을 때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경전대학>을 골랐습니다.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정토회 활동을 계속 이어가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한 달을 쉬고, 정초 순회 법회에서 유수스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간절한 마음으로 질문했습니다. “스님, 제가 보니까 정토회 활동하시는 분들이 너무 대단합니다. 저는 공부를 하려면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님 어떻게 할까요?”하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어디 숲이 산에만 있나, 빌딩 숲도 숲이지.”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그때, 장소를 핑계 삼아 정토회 활동에서 물러서려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끌어준 도반들의 고마움을 잊고 혼자 다 한 줄 착각했습니다. 지금은 알아차리고 주어진 일은 무조건 받고 가볍게 합니다. 한 번 끈을 잡으면 놓치지 말고 가라는 의미로, 역행보살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 인터뷰도 흔쾌히 받았습니다.
돈을 꺼리면서도 집착했습니다. 남편은 과장이 되기 전에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밀면 파는 식당을 하고 싶어 했는데 열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장이 되어 가정을 꾸렸고 돈이 중요하게 됐습니다. 돈을 만지기 싫었는데 악연처럼 돈에 휘둘렸습니다.
권리금을 주고 시작한 약국을 번번이 닫았습니다. 점포 전체가 폐업하거나 병원이 이전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권리금을 돌려받지 못하니 결국 수입이 마이너스였습니다. 마트에 차렸던 약국을 정리할 때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어 직원들 퇴직금까지 대출받았습니다. 돈을 싫어하니까 돈을 벌어도 돈을 밀어내는 형편이었습니다. 다행히 경전 공부했던 공덕으로 그 시기를 잘 넘겼습니다. 돈에 대한 소중함도 알게 됐고 돈이 사라지고 없었지만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기부를 최대한 해본 적이 있는데 정말 돈이 없어도 살 수 있었습니다. 돈은 집착할 것도 미워할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바뀌며 모든 서류 작업을 컴퓨터로 했습니다. 저는 컴퓨터를 배울 일도 없었고 필요성도 못 느끼고 살았기에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항상 ‘잘한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무슨 회의 때였는데, 당시 저는 회의 진행이나 온라인으로 바뀐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어떤 도반의 얼굴에서 저를 불편해하는 표정을 알아차렸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도반의 마음을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하니 불편한 마음 없이 일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정토회원은 모두 모자이크 붓다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도반은 든든한 백입니다. 부딪히면서 배워가면서 조금씩 나눠서 하니 부담이 없습니다.
한번은 두북에서 모종을 심어 놓은 밭에 거름을 놓는 울력(보수나 대가 없이 함께 힘 모아 일하는 것)을 했습니다. 밭고랑에 거름을 나눠서 줘야 하는데 막 퍼서 바로 일하는 도반이 있는가 하면 상황에 맞춰서 거름을 잘 주는 도반도 있었습니다. 계획 없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그때 그런 상황을 불편해하는 자신을 알아차렸습니다.
약국에서 종종 어떤 손님들은 같은 걸 계속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한 번만 설명하고 딱 끝내야 합니다. 두 번 정도는 설명하지만 세 번째 물어보면 대답을 하지 않아 직원들이 난감해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알았는데 사실을 들여다보니 틀에 박힌 면과 독재 근성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잘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 스스로 완벽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꾸준히 수행하고 활동하면서 고집 센 자신을 알아차리고 지켜봅니다. 순간순간 놓치지만, 전보다 돌이키는 시간이 짧아짐을 느낍니다.
나누기를 통해 꼼꼼하게 자기를 돌아보는 한 도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도반은 ‘나는 나만 보고 살아가느라고 바쁘다’ 했습니다. 그 순간 저만 보기도 바쁜 세상에 전부 다 간섭하려 했던 마음을 봤습니다. 전에는 아침 기도 시간에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다가 지금은 어제를 돌아봅니다. 그러다 보면 ‘지금 여기에 깨어 있을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위해 전은경 님에게 처음 연락한 순간이 생각납니다. 밝은 목소리가 인상 깊었습니다. 첫 통화 전부터 혼자 긴장하고 있던 마음을 탁 놓을 수 있었습니다. 역행보살이라 했지만, 인터뷰 내내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 덕분으로 인터뷰도 기사 작성도 잘 마무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글_여수연 희망리포터(광주전라지부 서광주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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