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대학교 때 불교에 관심은 있었지만, 불법을 배울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잊고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2015년 우연히 길에서 불교대학 모집 현수막을 보고 망설이다 전화했습니다. 전화에 대응하는 법당 사람들이 차분하고 좋게 느껴져 불교대학에 등록했습니다. 당시 저는 법륜스님이 누군지, 정토회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정토회 다니기 시작한 초기 사람들이 “스님~, 스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남편에게 “혹시 내가 이상한 말을 하면 정토회 다니는 것을 말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정토회와 법륜스님을 검색해 보고 “괜찮은 곳 같은데”라고 했습니다. 이후 정토회를 다니며 법문을 듣고 ‘불교가 이런 것인가?’ 하며 깜짝 놀랐습니다.
꾸준히 법문 듣고 수행하니 제가 남들보다 모범생 기질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생각과 감정이 업식에서 일어남을 알아차리니 자연스레 행동도 변했습니다. 예전엔 남편에게 “수건은 깔끔하게 걸어 놓아야 한다.”, “쓰레기통은 언제 꼭 비워야 한다.”라는 화나 짜증이 묻은 잔소리를 자주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내 세상 살고 저 사람은 자기 세상 사는데 겹치는 부분이 있구나. 그래서 같이 살고 있구나. 저 사람은 자기 시간에 맞춰서 하겠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잔소리를 멈추니 남편이 알아서 자기 할 일을 했습니다.
남편은 이제 제가 잔소리하지 않아 좋다며 정토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남편이 저를 보살님이라 부르며, 정토회 일정에 관심을 보이고, 법당까지 차로 태워주고 데리러 옵니다. 또한 친목 모임에서 누군가 부인 때문에 힘들다고 하면 “정토회 보내면 다 해결된다.”라며 정토회 홍보를 많이 합니다. 그런 남편을 보면 ‘내가 변하기는 했구나.’ 싶습니다.
제가 소임을 시작한 것은 감사한 마음 때문입니다. 불교대학 프로그램으로 경주 남산 순례를 갔습니다. 불교대학 담당자와 함께 산을 오르며 문득 ‘이분은 건강이 좋지 않아 무리하면 안 되는데 와주셨네.’라는 생각이 들었고,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이후 봉사 일감을 나눌 때 ‘우리 법당에 사람이 없으니 내가 뭐라도 하나 맡아야지.’라는 마음이 나서 그렇게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소임이 복이라는 말을 들으면 ‘소임이 힘들지, 무슨 복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임을 하다 보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어 ‘소임은 나를 위한 것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불교대학 진행자들과 회의 할 때, 학생들 출석률이 낮은 조의 진행자가 자책하며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회의에 참석한 다른 진행자들이 ‘출석률은 진행자 탓이 아니다.’라며 위로했습니다. 그 회의 후 제가 맡은 조의 출석률이 높은 것을 보고 ‘학생의 결석이 진행자 탓이 아니면, 학생의 출석도 진행자 덕이 아니구나. 출석률에 우쭐할 필요도 없고, 좌절할 필요도 없겠구나.’라고 깨닫고 또한 이런 내 마음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소임을 통한 알아차림이 습관이 되어 일상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저의 직업은 약사로 약국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니 여러 일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손님은 데스크 앞에서 계속 통화를 하여 제가 같은 설명을 세 번 했습니다. 그럴 때 예전에는 짜증스러운 말투가 나왔는데, 이제는 잠시 기다렸다 다시 설명합니다. 제가 손님을 그렇게 대하자 손님들도 감사 인사를 하며 나갑니다.
물론 10년 가까이 쉬지 않고 직장생활과 소임을 병행하여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있었습니다. 특히, 2021년 친정 부모님이 연달아 큰 수술을 해서 가벼운 소임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2022년 만일전법 때 본의 아니게 불교대학 진행과 그룹장까지 하게 되어 몸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회향은 꼭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버텼습니다. 마지막에는 피로로 몸이 많이 힘들어져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봉사를 아예 그만두지는 말자.’라고 마음먹었습니다. 이유는 소임을 통해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불교대학 담당자로 봉사할 때입니다. 수업 시작 시 몹시 지쳐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는데, 수업이 끝날 때 쯤 혼자 즐거워하며 목소리 톤이 확 올라간 상태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들 덕분에 힘든 고비를 잘 넘겼습니다. 수행이든 봉사든 정토회 일이 힘들고 순간순간 귀찮고 물러서는 마음이 들지만, 소임을 맡은 덕분에 인연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힘은 들어도 돌아보면 항상 마음은 좋았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한 번도 다투는 모습을 본 적 없는 평화로운 가정에서 자랐고, 조부모님께도 금쪽같은 장녀로 사랑받았습니다. 딸이라고 차별받지 않았고 대학까지 졸업했고 형제간의 갈등도 없었고 가족들 모두 원만하여 성적 고민만 하는 삶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대학 시절 친구가 “난 무슨 일이 생기면 동생들을 내가 책임져야 해.”라는 말을 듣고 제가 좋은 환경에서 자랐음을 알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약사로 취직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이대로 쭉 평탄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IMF로 남편의 사업이 위기에 처해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시가와 친정 식구들을 비롯해 여기저기서 빌린 돈이 거미줄처럼 엮여 하나씩 하나씩 문제가 터졌습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은 어린 나이였고, 제 월급은 압류되고, 집도 없어지고, 독촉장이 날아들고, 드라마 속에서나 봤던 빨간 딱지도 집안 곳곳에 붙었습니다. 우체국에서 오는 고지서가 무서웠습니다.
경제적인 시련도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남편이 망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맥주 한 캔 마셔도 얼굴이 붉어져 술을 전혀 못 하던 사람이 매일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남편을 보며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면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야?’라며 강한 불만과 원망이 올라와 많이 싸웠습니다. 퇴근 후 현관문 앞에 서면 ‘여기 들어가면 이제부터 전쟁이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습니다. 하지만 버티는 수밖에 없었고, 주위 사람들도 도와주어 다행히 가정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숨돌릴 틈은 생겼지만, 여전히 술 마시는 남편에게 원망이 있을 때 정토회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법문 듣고, 수행하고, 봉사하며 어느새 남편에 대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남편이 그토록 술을 마셨던 것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혼자 떠안으려니 힘들었고, 위로받고 싶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위로를 구할 수 없어 술에 의지했음을 이해했습니다. 당시는 나도 위로가 필요해 남편의 괴로움을 달래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토회를 만나 제 마음이 편해지니 ‘누구보다 남편이 가장 힘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원망하는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나아가 남편이 말이라도 늘 “어떻게든 내가 알아서 할게.”라며 포기하지 않아 고맙고, 남편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밖에서 돈 버는 사람이 꼭 남편이어야 하나?’, ‘다른 사람들이 “남편 요즘 뭐 해?”라고 물을 때 왜 당당하게 “응 요즘 가사 일 해.”라고 말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나 스스로 남녀를 평등하게 바라보지 못했구나.’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남편이 아이를 돌보고 아이들의 공부를 지도하는 일들이 고마웠습니다. 이렇게 불법 만나 돌이킬 수 있어 감사합니다.
저는 늘 다음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느라 지금을 즐기지 못했고,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요즘도 가끔 그런 성격이 올라오지만, 과거와는 달리 순간순간에 깨어있으려 합니다. 비록 빚도 있고 노후 준비도 못 했지만, '오늘 잘 살았고, 내일 당장 별일 없으니 걱정 없다. 어려운 시절도 겪어봤으니 나도 좀 단단해졌구나.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다.'라고 생각하며 지금이 행복한 순간임을 압니다.
스님이 “지금이 편하면 삼생이 편하다.” 하셨는데, 그 말대로 현재 마음이 편안하고 내면의 힘도 생기니 힘든 과거를 돌이켜도 담담합니다. 자식들이 자랄 때 과외 한 번 못 시켜 마음 아팠지만, 지금은 오히려 '여유 없어 극성 엄마 노릇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자립하여 잘 살아가고, 과거에 불행하다 느끼지 않았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말해주며, 엄마 말을 최고로 여겨주니 참 고맙습니다. 또, 남편의 사업이 잘 풀렸더라도 좋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시아버지가 남편을 “친구들만 따라다닌다.”라고 말할 정도로 남편은 친구를 좋아합니다. 신혼 1년 같이 저녁 식사한 횟수가 10번 정도 됩니다. ‘만약 사업이 평탄했다면 다른 문제로 잦은 갈등을 일으켰을 거야. 지금의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좋으니 무언가를 수행과제로 삼아 고치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그저 지금 만족하면서 소임을 할 수 있으면 하고, 못 하면 못하는 대로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이선숙 님은 인터뷰 내내 겸손한 자세로 정토회를 만나 크게 달라지거나 깨우친 것은 없고 자신은 평범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다양한 일화들 하나하나가 작은 깨달음이 일어난 순간들로 보였습니다. 정토회와 만나기 전에도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글로 인터뷰에서 느낀 감동을 온전히 다 전달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참~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네.”라는 광고 문구로 대신합니다.
글_이소현(서울제주지부 송파지회)
편집_김윤희(강원경기동부지부 용인지회)
전체댓글 35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원주지회’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