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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 5년 남은 시점에서 모두가 부러워했던 20년 동안 다녔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60이 넘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세계의 중심 맨해튼으로 혼자 떠났습니다. 자신 있게 갔지만, 1년 후 병이 났습니다. 공부가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타지 생활은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힘들면 그냥 돌아오면 되는데, 자존심 때문에 도저히 한국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즈음 지인이 콘서트에 가자고 했습니다. 음악 콘서트인 줄 알았는데 입구에 스님 사진이 걸려있고 스님이 쓰신 책을 팔고 있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스님의 희망 콘서트였습니다. 그냥 집에 오고 싶었지만 길을 몰라 앉아서 들었습니다
콘서트에서 40대 여자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일이 너무 힘들어 쉬고 싶지만, 너무나 좋은 회사이고 다시는 이런 회사를 못 들어갈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관두지 못해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스님이 ‘왜 남을 위해 사느냐, 자기 삶을 살아라’라며 보여주기식의 삶을 살지 말라는 뜻의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지금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여기서 지금 누구를 위해서, 얼마나 좋은 회사에 가겠다고 이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 온 지 2 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12월 말 학기를 끝내고 2013년 1월 1일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도착하고 며칠 뒤, 다니던 회사에 인사하러 갔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여직원들과 점심을 먹는데 그동안 회사 분위기를 말하며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일도 안 하고 등등 불만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소름이 짝 끼쳤습니다. ‘아, 내가 지금까지 회사에 남아있었다면 그들과 함께 험담하고 불평하고 있었겠지’라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회사에서 발을 빼고 회사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내가 왜 진급이 안 되었는지, 직원들은 왜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는지, 회사를 그만두고 보니 모든 것이 제 문제였습니다.
맨해튼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지만, 법륜스님과 정토회를 만났기에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공부를 포기하고 돌아온 것이 자존심 상하고 스스로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말씀과 정토회 덕분에 공부보다 더 크고 소중한 것을 배웠습니다. 남이 원하는 삶이 아닌, 진짜 주인 된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오남매 중 첫째입니다. 아버지는 이북에서 살다가 6·25 때 내려온 군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군대식으로 교육했습니다. 여자애인데도 팬티만 입혀 놓고 작대기로 때리며 혼냈습니다. 잘하거나 못하거나 늘 야단치는 성격의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나중에는 어떤 것이 잘하는 거고 어떤 것이 못하는 건지도 몰랐습니다. 부모님은 늘 싸웠습니다. 아버지는 생활비도 안 줬습니다. 노름으로 돈을 잃은 분노와 화를 자식들에게 풀었습니다. 집안의 분위기는 늘 삼엄했고 형편도 안 좋았지만, 겨우겨우 고등학교까지는 마쳤습니다.
엄마는 장사로 늘 바빴습니다. 밥, 청소, 빨래 등 모든 집안일을 첫째인 제가 도맡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며 일찍 자립했습니다. 자식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던 엄마와 엄하게 대했던 아버지에게 미움과 원망이 있었습니다. 절대 부모님 같은 삶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엄마와 살며 제 말과 행동의 많은 부분이 아버지가 엄마에게 했던 것과 같음을 알았습니다.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아버지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저 자신에게 화나고 짜증 나고 분별심도 났습니다. 미워할수록 그 사람을 닮아간다는 말이 실감 났습니다. 화내고 짜증 내는 그 모습이 본래 제 모습임을 깨달음의 장에서 확실히 알았습니다.
소임을 하며 마음에 안 드는 도반을 미워했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내 마음에 안 들면 무작정 미워했습니다. 저에게 “제가 어떻게 해야 마음에 드세요?”라고 질문했던 직원도 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제 마음대로 행동해서 직원들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 참 미안합니다. 불교대학 진행을 할 때 돕는이가 마음에 안 들어 반 담당자에게 호소했습니다. 담당자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말했지만, 그때는 제가 옳다는 생각에 빠져 알지 못했습니다. 그 후 수행하며 제가 미워하고 싫어했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상대의 부족함을 통해 부족한 제가 보였습니다. 부족한 저 자신이 싫어 상대를 미워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니 분별심이 싹 사라졌습니다.
소임을 하면서 정반대의 상황도 많았습니다. 모둠장을 하며 도반들로부터 이런저런 불만과 호소를 들으며 ‘아 나도 저렇게 불만을 이야기할 때가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며 상대를 이해했습니다. 잘했건 못했건 따지고 싸웠던 제가 ‘네 알겠습니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하며 유순하게 넘겼습니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하며 저의 업식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소임과 도반들을 통해 배우는 것과 얻는 것이 많기 때문에 소임이 힘들어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모둠장 소임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소임을 줘야 했습니다. 아는 것이 많이 없고 늘 답장이 느렸던 분에게 소임을 줘야만 했습니다. 분별심이 많이 났습니다. 소임자 교육을 받던 중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면서 소통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순간 제 마음에 안 든다고 자꾸 다른 사람을 찾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소임을 잘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서로 맞춰가는 것임을. 내 마음에 들게 사람을 고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힘든 부분이 있으면 도반의 의견을 더 많이 들어주고 소통하면서 고쳐나갔습니다. 요즘에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 순간 제 마음을 봅니다. 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빨라졌습니다. 분별심 내고 화가 올라오던 옛날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상대는 당연히 그럴 수 있구나’라고 받아들이니 괴로움이 없어졌습니다. 알아차림을 통해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었던 저의 어리석은 업식으로부터 점점 벗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다녔던 회사는 외국계 회사였습니다. 보너스가 700%였고, 워크숍도 해외에서 했습니다. 연말 휴가로 15일 정도 해외여행을 다니곤 했습니다. 남들보다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수준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대화도 잘 안 했습니다. 회사에서 인사 및 예절 교육을 받을 때도 허리가 잘 안 굽혀졌습니다. ‘내가 잘났다’라는 생각이 강해서 남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수행하고 절하면서 잘났다는 생각이 점점 내려졌습니다. 신기하게도 지금은 90도 인사도 잘합니다.
108배 절이 저를 낮추는 계기였습니다. 이제는 재물, 지위, 외적인 모습 등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합니다. 과거에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했던 것을 깊이 반성하니 지금은 많은 사람과 사귈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잘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를 타지 않아도, 저를 아껴주고 사랑해 줄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조건과 상관없이 동등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니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그 사람이 변해서 바뀐 것이 아니라, ‘내가 잘 났다’라는 생각을 내려놓음으로써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20대에 결혼하여 살림, 육아, 직장생활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며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시부모님도 1년간 모셨습니다. 누워 계신 시부모님 모시면서 그동안의 온갖 힘든 일이 떠올랐습니다. 모든 살림을 혼자 짊어진 것이 억울해 남편을 원망하고 미워했습니다. 제가 좋아서 선택한 사람인데, 제가 제일 싫어하는 저희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미워했기 때문에 아버지 같은 사람이 좋아지고 또 미워하기를 반복했습니다. 남편도 노름으로 집 몇 채를 날렸습니다. ‘내가 벌면 되지’ 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여자 문제까지 겹쳤습니다. 너무 힘들어 법사님께 질문했더니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라.’라고 말씀했지만, 그 말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울증이 조금씩 오는 시기에 아침기도를 하며 남편의 입장을 생각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했기에 남편에게 밥도 잘 못 챙겨줬습니다. 아이들은 시부모님한테 맡기고 제 볼일 보러 다녔습니다. 공부하러 일본 가고, 해외 출장 가고, 어딘가로 놀러 다녔습니다. 남편은 한 마디의 제재도 없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놔두었습니다. 시부모님을 모시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 여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싶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잘한 것이 없어 남편에게 미안합니다. 억울한 생각이 점차 줄어들면서 남편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선택한 남편은 저를 지지해 주고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어려서 엄마를 따라 절에 가서 등을 달았습니다. 등에 가족의 이름들을 써서 달았습니다. 저는 항상 제 가족의 건강과 앞으로 하는 일이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요즘에는 제가 아는 사람 모두 건강하고 잘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남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제 마음이 많이 편안해지고 유연해지고 넓어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그 사람에게 좋은 것 아니라, 제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쁘게 살고 나만을 위해 살았던 과거엔 늘 조급했습니다. 어느 날 스님의 즉문즉설에서 ‘바쁜 일이 뭐가 있냐?’고 하는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니, 정말 바쁠 일이랄 게 없었습니다. 제 생각이 문제였습니다. 혼자 산책할 때 누군가가 따라올까 늘 두렵고 무서웠던 불안감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신기합니다. 숫자에 민감했었던 부분도 많이 내려놓았습니다. 108배, 300배를 할 때면 염주를 돌려 그 숫자에 딱 맞춰서 끝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요즘은 시간 안에 공동 정진을 못 해도 그냥 넘어갑니다. 숫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올라오는 생각에 연연하지 않는 연습을 하니 마음이 유연하고 편안합니다.
70살 넘어서도 잘할 거로 생각했지만, 요즘엔 한계를 느낍니다. 얘기 도중 갑자기 주제를 벗어나기도 하고,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깜빡하기도 합니다. 모둠장이나 진행자 소임은 늘 회원을 관리해야 하는 압박감이 있어 완전히 편안하지는 않지만, 소임이 주어지는대로 욕심내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행복학교1도 진행하고 싶습니다. 제 몸이 허락하는 한 정토회에 계속 남아 소임을 놓지 않고 제가 받은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더 나이가 들면 정토회의 으뜸절에서 농사지으며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다행이고 기쁩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괴로움이 없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겠습니다.
정토회에 들어와 도반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한 박정민 님.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사는 수행자의 자세로 여러 사람에게 이 좋은 법을 알려주고 싶다고 합니다. 정년 후 행복학교까지 진행하여 나와 타인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합니다. 이 글을 읽고 정토행자들도 어떤 어려움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수행자로서의 삶을 꾸준히 이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어 감동적이고 뿌듯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글_이선후 희망리포터 (청년특별지부)
편집_최미영 (국제지부 아태지회)
행복학교 법륜스님 행복학교는 온라인에서 일주일에 한 시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보고 진행자와 참가자가 행복을 배우고 연습하며 '내 것으로 만드는 체험의 장'입니다. 행복학교는 종교를 떠나 누구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학교 신청: http://hihappyschoo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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