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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장~ 깨장~ 깨장~ 깨장~"
2017년 불교대학 재학 당시 정초법회 때, 시누이와의 갈등에 관해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법사님이 〈깨달음의 장〉1을 추천하였고, 총무도반이 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부른 노랫소리입니다. 〈깨달음의 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선배 도반의 도움으로 단번에 접수하고 문경으로 갔습니다.
첫날은 ‘아, 내가 이런 곳에 왜 왔을까, 그래도 첫날이니 있어 보자’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둘째 날은 ‘그래 이 밥만 먹고 나가자. 내가 여기 올 필요가 없었어.’ 그렇게 하다 저녁밥까지 먹고 하루가 지났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 또 결심 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을 자리가 아니구나, 이제 정말 나가자.’ 그런데 그날 저녁 시간, 눈물을 펑펑 흘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자만과 교만으로 옳다는 생각에 빠져 사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간 불교대학에 다니며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들은 법문은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나누기 할 때도 집에 일이 있다며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이렇게 눈물을 펑펑 쏟을 줄 몰랐습니다.
저는 제주도에서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난 날, 우리집에 왔던 큰 외삼촌은 제 친할머니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란성 쌍둥이는 한 집안에 살면 안되니 한 명을 고아원에 갖다 버리라는 고함이었습니다. 외삼촌은 부랴부랴 돌아가 외할머니께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이후 저는 외가로 와서 외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미신을 신봉하는 섬 지역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었고, 그 일이 제게 일어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친할머니도 당황스러운 마음에 외가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외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큰 불편은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밭일하러 가면,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 이모들이 저를 업고 학교에 다니며 키웠습니다. 외할머니에게 저는 어린 것이 엄마하고 살지 못하고, 젖도 못 얻어먹으며 키워 온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냐오냐’하시는 외할머니의 전폭적인 지지와 외삼촌과 이모들의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다섯 살 쯤, 외삼촌이 명절 때라도 형제들과 얼굴도 익히고 왕래해야 한다며 저를 엄마 집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외삼촌이 저를 다시 데리러 갔을 땐, 어린 제가 남의 집에 와 있는 것처럼 구석에서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외할머니는 "자식이 왔으면 챙겨야지, 나 몰라라 하며 애를 구석에서 울게 만들어?"라며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외할머니는 다시는 저를 홀로 엄마 집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엄마를 원망하기 시작한 것은 학교를 다니면서부터입니다. 소풍날 친구들은 엄마 손잡고 예쁜 도시락에 맛있는 김밥을 싸 오는데, 저는 할머니 손잡고 집에서 늘 먹던 밥에 김치 볶음과 흔한 반찬이라 친구들과 저의 처지가 비교되어 부러웠습니다. 세월이 지나, 병원에 입원한 엄마가 제게 원하는 바를 말하면 ‘젖 먹이고 키워준 자식들한테나 하지 왜 나한테 말해? 내가 입원했을 땐 와보지도 않았으면서...’라며 엄마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쌓인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정일사2에 내어놓은 엄마와의 갈등에 법사님이 어머니에 대한 감사기도를 권하였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해 보겠습니다“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한 열흘 정도를 이어가다 염주도 던져 버리며 ‘아니 내가 왜 덕분에 잘 살아? 내가 왜 감사 기도를 해야 해?’ 하면서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몇 년 동안 기도하다 보니, 어느 날부터 전화가 오면 말대꾸 정도는 했습니다. 지난날 엄마가 싫어서 전화조차 받질 않았고, 받아도 "그걸 왜 지금 와서 관심 가져?"라며 퉁명스럽게 대했습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지내, 잘 지내, 아픈 데 없어?" 물어보는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반기는 마음은 없었지만, 그나마 형식을 갖춰가는 가운데 작년 12월에 엄마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당시 눈물이 나진 않았지만, 말이라도 좋게 할 걸 하는 후회가 있었습니다. 키워준 이모에게 후회하는 마음을 내어 놓으니, 아무리 부모에게 잘하는 효자도 후회는 있다며 자책은 하지 말라고 위로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장성한 자식들이 있는 집으로 시집갔습니다.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남편은 큰형과는 스물여섯, 막내 누나와는 열여섯 살 차이가 났습니다. 성품이 순종적인 시어머니를 닮은 남편은 형과 누나의 말에는 항상 예라고 대답하는 예스맨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외할머니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자란 저와 상반되어 잦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제가 ‘NO’라는 단어를 프린트해서 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언제나 토 달지 않는 남편에게 보라며 말했습니다. “자, 따라 해 봐. NO, 안돼! 안 됩니다!”
그것 외엔 남편과 큰 갈등은 없었지만, 시누이 한 분이 우리 부부 사는 게 부러웠는지 하는 것마다 트집 잡았습니다. 남편을 불러 앉혀 놓고 이런저런 얘기한 내용을, 한성격 하는 제가 듣게 되면 그 길로 시누이에게 달려갔습니다. 할 얘기 있으면 나한테 하지 왜 남편 불러다가 부부 사이 이간질하냐며 따져 물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시댁에 '예'라고 답한 문제에 제동을 걸어 “그건 그 사람 생각이고, 저는 못 합니다!”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그러한 갈등 속에 <깨달음의 장>에 갔고, 4일째 되는 날 눈이 환하게 밝아 오며 저의 실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외할머니, 이모와 삼촌 그 누구에게서 안 된다는 행동의 제지를 받아 보지 않고, 제 뜻대로만 살아왔던 모습을 마주한 날이었습니다. ‘내가 옳다고 고집하여 모든 것에 부딪히니, 남편이 선한 성품에 나를 건드리지 않고 참고 살고 있었구나’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절에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 손잡고 따라다녔지만 신심이 깊진 않았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 언니는 큰 절에 가서 10년씩 살아 보는 적극적인 불교 신자로, 사찰에 다닐 때면 무조건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 언니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영상을 접했고 제게도 영상을 보라며 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님이 왜 유튜브에 나와서 얘기를 하지?, 스님들은 그냥 수행하고, 기도만 하면 됐지' 하며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2017년도 정토회 가을 불교대학 현수막 홍보를 본 언니가 같이 공부하자고 해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광양 법당에 갔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알던 사찰과 외형도 아주 달랐고, 법륜스님이 유명하다는 말도 신뢰가 가지 않았습니다. 법당 자체가 조금 이상하다는 말과 함께 그날은 접수하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이틀 후 지인 언니가 입학 접수를 재차 묻는 연락이 왔습니다. 중간에 아니다 싶으면 같이 나오자는 설득과 남편의 격려, 그리고 타 불교대학과 비교되는 저렴한 학비에 이끌려 정토회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렇게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6개월 만에 총무대행 소임을 맡았습니다.
광양 법당은 소규모이고 활동하는 분들이 거의 없었기에, 수행법회와 불교대학 담당은 물론 경전대학 재학 중에도 담당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순천과 여수 법당에서 인원 요청을 할 때마다 총무 도반은 저를 무조건 데리고 다녔습니다. 스님의 즉문즉설이 있는 날에도 순천이고, 여수고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저밖에 없다며 계속해서 함께 다녔습니다.
직장이라도 다녔다면 핑계 삼아 못하겠다고 했겠지만 거절도 못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하는 총무 대행을 꾸준히 했습니다. 그 경력이 쌓여 법당 총무가 되었는데, 총무 소임을 하면서 사실 좀 힘들었습니다. 모든 도반이 다 선배이고 활동도 거의 하지 않는 분들이어서 봉사에 협조를 부탁해도 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컴퓨터도 켤 줄 모르던 제가 너무 의지하니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법당이 정리될 때는 그동안 봉사 활동에 한 발 뒤로 물러나 있었던 선배 도반들이 직접 불사한 법당이라며 앞장서 활동했습니다. 총무 소임을 맡고 있지만 이끄는 힘도 부족하고, 분별심도 생기면서 정말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정담회 때 법사님께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선배 도반들이 한푼 두푼 아껴가며 일으킨 불사가 정리되는 소중하고 섭섭한 심정을 공감했습니다. 아마도 지난날 저의 성품이라면 손도 대지 못하게 했겠다는 생각에 미치며,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지나며 모둠장 추천을 받았습니다. 활동 경력이 오래된 선배도반이 주류를 이루어, 또 마음고생할까 봐 망설였지만, 지회장의 격려에 “예 알겠습니다” 하고 일곡모둠장을 맡았습니다. 다행히 지난 총무 소임 경험이 도움이 되었고, 지회장과 든든한 선배 도반들 덕에 하나하나 배우면서 잘해 나가고 있습니다.
처음 정토회 불교대학으로 이끌고 <깨달음의 장>도 같이 가며, 제 인생의 주인 되도록 이끈 지인 언니는 일곡모둠의 일반회원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언니 도반과의 연이 닿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가족들을 조정하고, 시누이에게 쫓아가 따지며 혼자 씩씩거리고 괴롭게 살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최고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요즘은, 제가 제일 싫어하는 술을 남편이 먹고 들어와도 부드럽게 응대하고, 마음 알아차리니 화내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그러한 변화 과정을 쭉 지켜본 남편이 "이쯤 되면 화를 내야 하는데, 왜 화를 안 내지?" 하며 기분 좋은 말을 전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정토회 일이라면 1박 2일이든 4박 5일이든, 문경이고 어디고, 실천지인 미륵사까지 팔이 아팠던 저를 위해 운전을 마다하지 않고 해주고 있습니다. 또 제가 정토회 일로 많은 시간 집을 비워도, 싫다 소리 한번 없이 혼자 모든 걸 해결하는 외조를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아들 또한 엄마가 많이 변했다고 반기며, 지난 통일의병3 활동 프로그램에 아들과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었습니다. 길 가다 우연히 JTS모금활동에 마주쳐 기부하기도 합니다. 알게 모르게 두 사람 다 저를 적극 지지함에 따뜻해지는 마음과 보람이 있습니다.
봉사 소임에서도 도반들과의 작은 갈등이 일어 잠깐 놓치면 ‘또 놓쳤네, 내가 옳다는 고집대로, 뜻대로 하려고 하네’ 자각하며 알아차리는 연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알아차리는 연습이 처음에 열흘 걸렸다면, 이제는 오늘 중에 알아차립니다. 전화 끊고 실수했다 싶으면 바로 미안하다는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하루하루 변해가는 모습과 저를 돌아보는 공부가 정말 좋아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몇 년 수행에 다 된 것 같다고 놓아 버리면, 또다시 덮쳐질 지난날 모습이 떠오릅니다. 내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상대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겠다는 수행과제를 꽉 잡고 꿋꿋이 가려 합니다.
스님 법문에도 ”예“하고 가볍게 행하며 항상 자신을 돌아보라 하였습니다. 법문도 법문이지만 활동하면서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앞으로도 쭉 그냥 하라면 ”예, 알겠습니다“ 하고 모르면 배우면서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경험에 비추어, 모든 봉사와 소임이 처음에는 부담으로 다가오지만, 하다 보면 절대 어렵지 않고 가볍게 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좌충우돌 저의 현재진행형인 수행담을 전해드렸습니다. 저 자신을 직시하고 변화하게 된 <깨달음의 장>을 적극 추천해 드립니다. 다녀와서 모든 사람이 저처럼 괴롭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진행자인 저와 3명의 희망 리포터가 참관하며 시종일관 고개를 끄덕이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했던 리포터들이 소감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 '소임을 저렇게 가볍게 할 수도 있구나’ 하며 많이 배우고 유쾌했습니다."
"그냥 시키면 '예 알겠습니다' 하고 가볍게 하신다는 말씀이, 제겐 가장 잘 안되는 부분이라 대단하다는 생각과 부러운 마음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미운 감정 부분에 많은 공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로가 되었고, 제 어머니를 조금 더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인터뷰를 들었다기보다 법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뭉클한 나누기를 끝으로 감사하고 행복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글_채지영 희망리포터(서울제주지부 송파지회)
편집_윤정환(인천경기서부지부 안양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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