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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꿈꾸는 편안한 가정을 꾸리고 아이 둘을 키우면서 맞벌이 부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2004년 12월 어느 아침, 남편은 갑작스러운 교통 사고로 중추 신경이 손상되어 사지부전마비 진단을 받았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는 1년 휴직계를 내고 남편의 회복과 재활에 매달렸습니다. 정상인처럼 다시 경제활동은 하지 못하더라도 일상생활이 가능하게만 하자고 남편과 마음을 모아 재활치료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남편은 사고 후 1년 만에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의지가 없었다면 병원생활은 더 길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남편 손목에는 재활운동을 하며 생긴 굳은살이 남아있습니다.
자차 사고로 보상도 한푼 받지 못했고, 치료비 또한 본인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하면서 가정의 역할만 바뀌었을 뿐이라며 저와 남편은 일상의 역할을 바꾸어 저는 경제적 역할을 맡고, 남편은 집안살림과 아이들을 챙겼습니다. 저는 20대부터 시작한 직장생활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지만, 넉넉치 않은 수입으로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에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 한편으론 어떻게든 빨리 부자로 살아야한다는 욕망도 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마음에는 한치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고 남편과 삶의 방향에 대해 나누는 대화가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게 되고 부부사이가 조금 더 편안해지니, 남편의 사고 후에 우리 부부가 동시에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고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병이 난 제 마음조차 느낄 새가 없던 겁니다.
그 당시 8살 아들과 4살 딸에게 사랑한다는 따뜻한 말보다는 “빨리 자거라 ! 빨리 먹어라!” 하며 조급한 마음에 아이들을 채근했습니다. 아이들이 빨리 잠들어야 저도 잘 수 있으니 그저 “빨리 빨리”를 입에 달고 쫓기듯이 살았습니다. 딸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불안증상을 보인다는 말을 들었지만, 저와 남편은 아이의 상태를 주의깊게 살피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사고 후 1 여 년이 지나서야아이들의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꼬박 1년 6개월 간의 상담치료 과정을 마쳤습니다. 딸 혼자 병원에 갈 수 없어 남편이 휠체어를 타고 병원 건물 앞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딸아이는 2층에 있는 병원까지 혼자 계단을 올라가기가 무서워 병원건물 앞에서 울곤 했습니다. 딸을 2층까지 데려다주지 못하는, 휠체어에 앉은 남편도 같이 울었습니다. 더운 여름에도, 살을 에는 추운 겨울에도, 남편은 아이가 상담치료를 받는 4시간동안 건물 밖에서 기다리다가 상담이 끝난 아이를 데리고 집에 왔습니다.
장애를 가진 식구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저는 야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내가 이걸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8여 년동안 주말도 쉬지 않고 공부하며 사회복지 관련 자격증을 땄습니다. 근무를 마치고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밤 11시에 집에 오면, 그 시간까지 남편은 아이들을 돌봐주고 공부를 지도해주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사교육비도 줄이고 양육의 책임을 다하고자 애를 쓰고 있었지만, 아빠와 긴 시간 떨어져 지내 애착이 없던 아이는 늦은 시간까지 자기를 붙들고 있는 아빠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듯 했습니다. 아이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 아이에겐 벅차고 힘들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모른 채 바쁘게 살아가다 저는 디스크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습니다. 희미한 빛에 의지해 잘 가고 있던 터널 안에서 또 다른 사고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저의 세상은 깜깜한 암흑천지가 되었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해야하는 몸이기에 바깥과 단절된 생활을 시작한 남편은 심리적으로도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직장, 사회, 친구들과 단절된 남편에게는 오로지 가족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모든 약속과 모임을 집에서 했습니다. 친구와 밥 한 끼를 먹더라도 친구를 우리집에 불러내어 남편과 함께 먹고, 부모님이 놀러오실 때면 하룻밤 자고 가시게 했습니다. 가족모임도 우리집에서 했습니다. 사회관계가 조금 넓어지면서 남편도 밝아져갔습니다.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사를 했습니다. 제가 직장생활로 바쁘고 남편도 몸이 불편하니, 급식도우미나 녹색어머니회와 같은 학부모의 참여 활동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시범학교가 있는 동네로 이사했습니다. 마침 남편의 친구가 사는 동네이기도 했습니다.
전동휠체어를 지원받고부터 남편의 외출이 수월해졌습니다. 가족이 함께 외출해서 필요한 옷가지를 사고, 떡볶이를 사먹는 순간 눈물이 났습니다. 남편은 자기가 받은 도움만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다며 장애인단체에 나가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사하면서 환경이 바뀌고 남편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도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찾는 듯 했습니다.
2015년 12월, 남편의 권유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었습니다. 명쾌한 내용들이 참 좋았습니다. 다양한 주제로 즉문즉설을 듣다 보니 얼핏 정토불교대학, 정토회, 하심. 이런 단어들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공부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토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정토 불교대학 관련 법당을 찾으니 집에서 가까운 곳에 성동 법당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 바로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법당에 처음 왔던 날은 잊을 수 없습니다. 불을 끄고 죽비를 치고 명상을 하는데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용한 세상이 있구나! 나는 왜 미친듯이 헤매고 살았을까? 불나방처럼... ’
나누기를 하는데 모두들 얼굴이 환했습니다. ‘똑같이 사는 것 같은데 저 얼굴은 뭐지?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한 번 같이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좋은 집, 비싼 차, 아이들, 학원... 이런 것에 집착이 강해 숨통이 막힐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이대로 살아도 괜찮겠다. 좀 더 일찍 이런 깨달음이 있었다면 편했을 텐데....’ 이 종교 저 종교, 이 절 저 절,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의지처를 찾았던 지난 날이었습니다.
제가 워낙 바쁜 걸 아는 남편과 아들은 불교대학을 등록한 저에게 3일 이상 출석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졸업은 못하더라고 놓지 말고 다닐 수 있는 만큼 다니자 마음 먹었습니다. 2016년에 등록한 불교대학은 수업일수 하루가 모자라 졸업을 못하고, 그 다음 해 다시 등록하여 졸업했습니다. 이어서 <깨달음의 장>도 다녀오고 아들의 군입대에 맞추어 <인도성지순례>도 다녀왔습니다.
많은 도반들 덕분에 졸업도 하고 경전대학에 진학도 했습니다. 고단한 생활에 정토회는 저의 활력이었습니다. 온라인 개편으로 성동지회에서 서대문지회로 옮겨져, 마치 어머니와 떨어지는 어린아이처럼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친숙해지고 익숙해 졌습니다. ‘정토회에서는 어디를 가던 편안해지더라’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딸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외할머니손에서 자랐고, 집에 돌아온 4살 때에 남편의 사고로 또 다시 1년 간 이모와 양가 할머니집을 오가며 길러졌습니다. 엄마의 품에 오래 있어보지 못하고 양육자가 계속 바뀌니 아이에게 분리불안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제가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온 다음, 중학교3학년이었던 딸은 저에게 하루 이상 집을 비우지 말라며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해에는 <깨달음의 장> 바라지로 4박5일을 비웠습니다.
전법활동가 교육을 받은 후에는 통일꼭지로 주말마다 봉사활동을 합니다. 연탄나르기 봉사나 새터민 지원 활동 김장 봉사 등 추운 날 밖에서 하거나, 몸을 많은 쓰는 활동들입니다. 이런 봉사활동을 같이 가주는 딸이 기특합니다. 어릴 적 엄마가 바빠서 놀아주지 못했던 대신 딸아이가 저와 함께하기 위해 봉사활동을 같이 하는 것 같아 한 편으로 마음이 쓰리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새터민 지원 활동의 하나로 새터민과 함께 김장을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남조선이라 칭하기에 '대한민국'이 어느 나라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놀라웠습니다. 배급되는 식량이 너무 부족한데, 그나마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풀뿌리라도 캐먹을 수 있어 살고 이마저도 구할 수 없는 도시 사람들이 더 많이 죽는다고 합니다. 함께 김장하던 새터민이 남한에 오기 전, 이웃에 사는 한 가족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농약을 먹고 동반자살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처음 '동포'라는 단어가 매우 낯설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전해듣고 난 후에 들리는 '동포'라는 단어는 저를 울컥하게 만들었습니다.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동안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남편의 사고가 났을 때 제 직장에서 많이 도와주었고, 제 동생과 친정어머니, 시어머니는 아이들을 돌봐주었습니다. 특히 시골에 사는 친정부모님은 '네가 선택한 길에 최선의 도움을 주겠다.'며 우리 가족이 가정을 유지하도록 큰 지원과 응원을 해주었습니다. 제 마음이 가라앉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면서 이런 도움들이 하나하나 떠올랐고 '더불어 산다는 것'을 다시 새기었습니다. 소소하게라도 세상에 베풀며 살고 싶습니다.
불교대학 입학 후, 천일결사에 입재했으나 수행은 꾸준히 하지 못했습니다. 직장생활과 야간대학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수행을 할 때면 체력이 달리기도 하고, 어지럼증과 이명으로 주저앉곤 했습니다. 다만 '끈은 놓지 말자.'라는 마음으로 가랑비에 옷 젖듯이 수행을 해나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하루도 빠짐없이 수행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이만큼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사람들의 인연공덕임을 압니다.
저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살아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때와 달리 살아가면서 무거운 짐이 하나씩 생겨날 때마다 주저앉고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짐들로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행복합니다. 코로나19 이후 온라인으로 변경되어서 선택과 집중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다짐했습니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할 수 있는 소임과 봉사는 계속 하고 싶습니다. 제 삶이 편안해지고 행복해 졌듯 모두 모두 행복한 길로 나아가길 기원합니다.
오늘의 주인공과 인터뷰를 마치고 고요히 거울 앞에 서 있는 누님이 떠올랐습니다. 젊은 시절 방황과 시련을 거치고 거울 앞에 서 있는 누님은 삶의 자잘한 아픔 따위는 모두 포용할 것만 같습니다. 또,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그대로 지켜보는 평정심도 지녔을 것입니다.
천둥과 무서리가 지나간 고요한 자리였습니다.
편집_박문구(서울제주지부 서대문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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