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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상북도 영일군 송라면에서 1남 3녀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조부모와 함께 살던 부모님은 제가 돌이 되기 전에 포항으로 분가했습니다. 저는 계속 조부모 댁에서 증조할머니와 함께 지내다가 유치원 가기 전에 포항 본가로 돌아갔습니다. 포항 본가로 와보니 동생들이 2명 있었고, 몇 년 뒤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엄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버지는 깊은 마음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술을 마시면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밑에서 크면서, 학창 시절의 저는 부모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슈퍼 집 딸인 저에게 맛있는 과자를 매일 먹을 수 있겠다면서 친구들은 부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족여행을 다니고 용돈을 풍족하게 받는 친구가 부러웠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저항감이 심해서 빨리 집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어릴 때부터 컸습니다.
그 영향으로 스물두 살에 같은 직장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받고 싶어서 나이 많은 남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저와 맞지 않았습니다. 딸 둘을 낳고 키우면서 산후우울증으로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몸은 아이와 함께 있어도 마음은 늘 콩밭에 가 있었습니다. 말 못 하는 어린아이도 엄마의 마음을 느끼는지 엄마와 분리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육아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남편에 대한 불만도 커져만 가다가 결국 이혼을 선택했습니다.
‘이혼하고 혼자 살면 결혼 전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겠지’라는 저의 생각은 착각이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온 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선택한 것들이 불행으로 이어지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답답하고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던 2008년 어느 날, 지인의 권유로 따라간 동네 가정집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을 비디오테이프로 보았습니다. 처음 본 법륜스님의 강연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찾고 있던 멘토구나!’라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가슴이 벅찼습니다.
가정 법회로 인연을 맺은 뒤 천일결사 입재를 했습니다. 불교대학을 입학하고 2011년부터 법륜스님 강연을 담당하는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2012년 즈음, 전남편과 살던 둘째 딸이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습니다. 화장하고 짧은 치마 입고 구두 신은 딸의 모습이 저는 못마땅했습니다. ‘공부에 흥미도 없는 날라리’로 딸을 바라보는 제 시선은 날이 서 있었습니다. 딸은 몇 번의 가출을 했고, 그때마다 저는 가출한 딸을 찾아 헤맸습니다. 남자애도 아닌 여자애가 자주 집을 나가서 밖에서 친구들과 떠돌아다닌다 생각하니 불안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법륜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딸이 엄마와 아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 한결같은 방식으로 딸을 교육할 수 없으니 딸에게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딸이 엄마보다 낫네”라는 연이은 스님의 대답을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딸과 전남편에게 200배 참회기도를 하며 ‘딸이 나보다 낫다’라는 기도문을 되뇌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니 딸의 마음이 느껴져 뜨거운 눈물이 났습니다. 엄마의 마음이 불안하니 아기가 얼마나 불안했을까. 분리 불안을 가지고 있는데 7살 때 헤어졌으니 그 아픔이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아이의 마음이 이해되고 공감이 됩니다. 그리고 딸이 날라리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저의 학창시절을 기준으로 비교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패션이구나 이해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남편에 대해서도 이해되었습니다. 제 성질과 똑같은 딸과 함께 지내보니 저도 화가 나는데 ‘남편이 나와 살 때 참 많이 어려웠겠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남편에게 참회한다고 했지만 늘 마음에 ‘너도 잘못했잖아’라는 미진함이 있었는데 그것이 해소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사랑이 부족했겠지. 부모에게 기댈 수 없는 아이가 마음 둘 곳은 친구밖에 없었을 거야.’라고 생각하니 절로 참회하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아이를 야단치고 행동을 고치려고만 하고,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니 방황할 수밖에 없었겠지. 사실 그 모습도 나에게 배운 거야.’라고 깨달았습니다.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나니, 딸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딸이 어렸을 때 책 읽어달라던 청을 엄마가 외면하고 제 생각에 빠져 지냈으니, 딸이 공부에 흥미가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또한, 사춘기 여학생이 외모에 관심을 두는 것도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때서야 딸이 엄마보다 낫다는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습니다.
제 생각이 옳다고 생각할수록 ‘왜 저럴까?’라고 상대를 이해할 수 없어서 화를 많이 내곤 했습니다. 사실은, 제 말이 다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은 각자 다를 수 있는데, 제 방식만 고집하니 안 따라주는 가족들에게 섭섭했던 것입니다. 저만 잘나고 옳고, 전남편과 딸들은 부족하고 틀리다고 생각했던 지난 날을 돌아보며 많이 반성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딸은 아빠와 살면서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저에게 전화로 불만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중심이 바로 서니, 예전에 맞장구치면서 “그래, 너희 아빤 그게 문제야!”라며 흉보던 것도 딱 끊었습니다. 대신 “아빠와 싸워도 엄마에게 오지 말아”라는 단호한 말로 대응합니다. 그랬더니, 아빠와 부딪혀가면서도 잘 조율해나갑니다. 현재 성인이 된 후 각자 분가해서 성실히 생활하는 두 딸을 볼 때면 대견스럽습니다.
더불어,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제 마음속의 바라고 의지하는 마음이 색안경이 되어 자식과 전남편, 부모님을 삐뚤게 보았음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더 늦지 않게 지금이라도 깨닫고 나니 그동안 요동쳤던 마음이 잔잔해졌습니다.
저는 올봄에 41기 〈백일 출가〉를 마치고, 현재 재입재하여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생활 중입니다. 24시간 동안 도반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끊임없이 분별심이 생기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공동체로 일하고 수행하며 제 방식이 옳다고 고집하는 모습들을 보며 제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제 욕구대로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제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는 것을 배웁니다. 제 방식도 옳지만 남의 방식도 옳다는 것을 체험하고, 성질내고 난 후 미안하다고 말하는 방법을 연습합니다. 타인에게 바라는 마음이 많을 때는 상대의 눈치를 보고 머리 굴리기 바빴지만, 제가 제 삶의 주인이 되니 삶이 단순명료해졌습니다.
또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 쓰던 에너지를 좀 더 유익한 일을 위해 씁니다. 환경보호를 위해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 보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시간과 정성을 쏟습니다. 저만 생각해서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문경살이하면서 자연의 은혜로움을 깨달았고 만물에 고마운 마음이 샘솟습니다. 이런 현재의 제 모습에 뿌듯함이 가득 차오릅니다.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10년 전의 저와 비교해보면 지금 제 마음은 햇빛 쨍쨍하고 환한 대낮입니다. 여전히 성질내고 가끔은 넘어져도 지금의 제가 참 좋습니다. 저는 행복을 전하는 수행자입니다.
불법을 만나고 남에게 의지하고 기대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서 자신에게 의지하고 자신을 알아가는 공부에 푹 빠졌다는 이지은 님. 인터뷰 내내 느꼈던 담담하면서도 긍정적인 에너지가 독자들에게도 듬뿍 전해지길 발원합니다.
글_정도현 희망리포터(대구경북지부 포항지회)
편집_성지연(강원경기동부지부 성남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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