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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


3·1운동 100주년,
민족대표 용성 스님의 빛나는 행적



출처 스님의 하루
정리 <월간정토> 편집부

3·1만세운동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대표 스님으로 우리는 만해 한용운 스님과 백용성 스님을 기억합니다. 만해 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그래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백용성 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법륜스님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 독립운동가로서의 백용성 스님과 그 행적을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3월 7일 법륜스님은 BBS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라디오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용성 조사의 독립운동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 백용성 스님’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Q 법륜스님께서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 관련 행적에 대해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거나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사실들을 새롭게 제기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용성 스님의 행적을 연구하시게 된 게 언제부터였는지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A 용성 조사님의 알려지지 않은 행적을 가장 많이 아시는 분이 저의 은사이신 불심도문 큰스님이십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절에 들어왔으니까 은사스님으로부터 용성 조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올해로 50년째 듣고 있어요. 큰스님의 뜻을 기려 용성 조사님의 행적을 밝혀야 하는데 저도 제 할 일이 바빠서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 큰스님께서 늘 말씀해오시던 내용 중 객관적인 증거 자료들을 보완해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것은 앞으로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이러이러한 것들을 보완해야 한다고 과제를 던졌습니다.

Q 그럼 3·1운동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질문하겠습니다. 용성 스님께서는 당시 종로에 대각사를 세워서 대중포교를 활발하게 하셨지요?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서 다시 대각사로 돌아가셨나요?

A 용성 조사님께서는 감옥에서 나오자 바로 대각사로 가자고 하셨는데, 마중 나온 제자들이 대각사가 아닌 어느 신도 집으로 스님을 모셨어요. 도착해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용성 조사님이 감옥에 가신 뒤에 일제가 대각사에 있던 제자 스님들과 신도들에게 압력을 넣어서 절을 팔도록 한 거예요. 그리고 제자 스님들 일부가 절을 판 돈을 나눠 갖고서는 흩어져 버렸습니다. 절이 없어져버린 거예요. 그 소식을 들은 순정효 황후와 상궁들이 돈을 모아서 원래 대각사가 있었던 자리 봉익동 1번지 옆인 봉익동 3번지에 새로 민가를 산 뒤 고쳐서 다시 대각사를 열었어요.

그 후 용성 스님께서는 한글 경전 번역 작업을 시작하셨어요. 3·1운동으로 감옥 안에서 보니까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는데도 모두 한글로 된 성경을 읽고 우리말로 된 찬송가를 부르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용성 조사님은 ‘부처님의 좋은 가르침이 한문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셔서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신 겁니다. 물론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세종대왕 당시에 일부 번역한 게 있지만, 근대에 들어와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은 용성 조사님이 처음이셨습니다.

그리고 도심에 포교당을 처음 여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불교 신자들은 부녀자들로, 주로 복을 비는 기복적인 신자였는데, 부녀 선원을 개설해서 재가자도 수행할 수 있도록 길을 여셨습니다. 또 일요 불교학교를 열어서 어린아이들에게 불교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풍금을 하나 사서 본인이 직접 연주해가면서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용성 조사님이 쓰신 찬불가도 여러 곡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근대 불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하셨어요.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활동이었습니다.

▶ 용성조사

Q 여유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민족의 암흑기였던 시대에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그런 활동을 하셨네요. 끝까지 용성 스님을 보필하면서 당시 이런 활동들과 독립운동을 보좌했던 또 다른 스님들도 계셨나요?

A 네, 그렇죠.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워낙 강해서 그러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용성 스님과 가까이 있으면 다 피해를 입으니까요. 제자들 중에도 수행 측면에서는 스님을 존중하지만 스님이 하시는 독립운동은 찬성을 안 하는 제자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런 분들은 다 곁을 떠나게 됐죠.

그리고 일제는 한국 불교를 일본화하기 위해서 스님들에게 결혼을 허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강요하다시피 했고, 술 마시고 고기 먹고 가족 거느리는 일을 조장했습니다. 본사 주지는 결혼한 스님들만 자격을 주었어요. 이런 식으로 한국 불교는 빠른 속도로 일본화했습니다.

용성 조사님은 이에 반대해서 1926년에 조선총독부에 승려가 결혼하는 것, 가족을 거느리는 것, 술과 고기를 먹어 계율을 파하는 것을 금지해달라는 요청서인 건백서 建白書를 제출했습니다. 총독부에서 안 받아주니까 “본사 몇 개라도 수행하는 승려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2차 건백서를 제안했지만 그것도 안 됐어요. 그래서 ‘이건 불교가 아니다’ 생각하고 바른 불교를 새롭게 제시하셨어요. 불佛, 즉 붓다는 깨달으신 분이잖아요. ‘크게 깨달은 분’이 붓다니까 그걸 한문으로 바꾸면 ‘대각大覺’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불교의 다른 이름으로 대각교大覺敎를 창시하셨습니다. 이게 잘못하면 신흥종교를 만들었다고 오해받을 수 있는데, 사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불교가 이미 불교 아닌 모습이 됐기 때문에 ‘불교’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면 불교의 참모습에 대해 오해를 받으니까 바른 불교를 ‘대각교’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이름 붙인 겁니다. 그런 후 더욱더 전법에 매진하신 거예요.

용성 조사님은 대각교 활동으로 신자들에게 독립운동 정신을 고취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보이지 않게 계속 지원했습니다. 1936년, 결국 조선총독부는 대각교에 유사 종교라는 혐의를 씌웠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이비 종교라는 혐의를 씌워 해산시키고, 1938년에는 재산을 완전히 몰수해버렸어요. 이렇게 해서 대각교는 완전히 없어져 버렸습니다.

Q 용성 스님께서 대각교를 창시하신 것은 요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발상의 전환이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는 오해도 받았었군요.

A 오해라는 게 딴 게 아니고 일본 제국주의가 유사종교 혐의를 씌워서 없앤 거죠. 결국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탄압받았다는 것은 오히려 바른 불교를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 당시엔 일본 제국주의에 순응해서 시키는 대로 한 것이 사실은 잘못된 불교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Q 네. 그 당시 친일 불교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용성 스님께서 나서셨는데 그 밖에 또 어떤 노력들을 기울이셨나요?

A 1912년에 만해 한용운 스님 등이 일본 불교화에 반대해 임제종臨濟宗의 전통을 잇는 운동을 하셨습니다. 그때 용성 조사님이 개교사장開敎師長으로 취임해 첫 설법자로 활동하셨어요.

그 이후에는 주로 대각교를 중심으로 항일 불교 운동을 하셨습니다.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던 북간도, 지금의 만주에 대각교당을 세워서 유랑하는 사람들에게 전법을 했어요. 또 선농당禪農堂이라고 하는 대단위 농장을 만들어 ‘일하면서 참선 하고, 참선 하면서 일한다’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창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함양의 백운산에 화과원을 건립해서 스님들이 과수 농사를 지으면서 공부하도록 하셨습니다. 보시만 받아서 생활하는 게 아니라 자기 먹을 건 자기가 생산하면서 참선 하고 공부하도록 하는 등 생산 불교를 주창하셨습니다. 또 거기서 모인 돈들을 몰래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셨어요. 불교를 새롭게 하는 운동뿐만 아니라 당시 민족의 과제였던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일을 함께 하신 겁니다.

3.1운동 기념식 태극기 든 시민들

Q 한쪽으로는 대중 포교와 교화에 매진하시면서 또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활동하셨던 용성 스님이셨네요. 안타깝게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대각사와 화과원 등은 모두 일제에 의해서 침탈당하고 궤멸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스님의 마음은 얼마나 절망스러우셨을까요?

A 용성 조사님께서는 만주의 독립운동 근거지인 선농당이 일본 밀정에 의해서 완전히 궤멸되자 ‘사자의 배 속에서 생긴 충蟲이 사자를 쓰러지게 하는구나’라고 탄식하셨어요. 일본 제국주의가 아닌, 같은 민족 내에서 제자가 스승을 배신하고, 동지가 동지를 배신하는 것을 비유하신 말씀이었죠. 그렇게 우리 민족이 사분오열되어 결국은 나라의 독립이 잘 이루어지지 않자 이런 유훈을 남기셨어요.

‘국론이 사분오열되지 않도록 하라.’
‘강대국의 종속국이 되지 말고 주인 된 나라가 되도록 해라.’

국론이 사분오열되지 않도록 하는 ‘국민통합’과 주인 된 나라가 되도록 하라는 ‘자주독립’을 강조하신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런 자주독립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평화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국론이 분열되어 있잖아요. 우리가 지금 평화 통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국민 여론은 아직 사분오열되어 있어요. 평화 통일로 가는 속도를 조금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용성 스님이 뿌리셨던 씨앗을 꽃피우고 열매 맺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Q 오늘 말씀해주신 여러 구술과 증언들은 우리 불교계의 독립운동사 복원에 중요한 단초가 되겠다는 확신이 듭니다. 앞으로 이런 구술과 증언들을 역사적 사실로 확증하려면 더욱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A 네. 이제 전문 학자들이 연구해서 보완해주셔야죠. 이런 구술조차 없으면 어떤 사실들이 있었는지를 아예 모르니까 연구할 수조차 없지만, 이렇게 아주 생생한 구술이 있으니까 그걸 출발점으로 삼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구술이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증거를 보완해야 합니다. 증거 자료를 찾고 보완해서 묻혔거나 잊힌 역사를 다시 드러내고 회복하는 게 우리 후손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이 글은 월간정토 2019년 3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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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댓글 1개
  •  서정희 2019/05/08 11:00
    스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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