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정토맑은마음,좋은벗,깨끗한 땅을 실현하는 정토회


[경전강좌 | 금강경]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금강은 다이아몬드를, 반야는 지혜를, 바라밀은 피안의 세계에 도달함을 가리킵니다. 줄여서 <금강경>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 담긴 지혜가 다이아몬드처럼 가장 값지고 소중하고 견고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이아몬드가 세상 모든 물질을 다 깨뜨리듯 <금강경>의 지혜로 중생의 어리석음과 번뇌를 깨뜨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금강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고 위타인설爲他人說하는 큰 공덕과 기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 (9)
金剛般若波羅密經



법륜스님 본지 발행인

5. 妙行無住分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공하고 법이 공하고
아와 법이 함께 공한 것도 또한 공함이라.

제오 여리실견분 (1)
第五 如理實見分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부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불야 세존 불가이신상 득견여래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불고수보리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 형상은 몸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상이 있는 바는 다 허망하니 만일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


네가 보고 있는 이 몸이 정말 부처더냐
내 것이라는 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보시는 ‘내가 그에게 내 것을 주었다’는 마음으로 남습니다. 거기에서 보상 심리가 싹트고, 그 싹이 자라 원망과 배신감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실상으로 본다면 본래 내 것이 없으므로 아무런 기대 없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상에 집착하지 않고 행한 보시, 보시했다는 생각 없이 행한 보시의 복덕은 한량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되새기던 수보리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시를 해도 내 것이 아니고 보시를 받아도 남의 것을 받는 게 아니라면, 복을 짓는 일이란 없는 게 아닌가? 아무런 보시도 행한 바 없고 어떤 과보도 받을 바가 없다면, 대체 무슨 인연으로 부처님은 저 거룩한 몸을 받으셨단 말인가? 부처님은 과거 생으로부터 무량한 공덕을 지으셨는데 이제 복이라 부를 게 없다 하시니 과거 생에 부처님이 지으신 공덕은 복덕이 아닌가?’

부처님은 수보리의 이런 마음을 헤아리고 다시 묻습니다. “그대는 육신으로써 부처를 보았다 할 수 있겠느냐? 그대가 보고 있는 이 몸이 정말 부처이더냐?”
그러자 수보리는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붓다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임을 되새깁니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보면,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는 순간까지 이 점을 강조합니다. 아난다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려 할 때 슬픔에 젖어 묻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이제 저희는 누구를 의지해 살아야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난다여, 울지 마시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입니다. 육신은 그대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어 마음의 문이 열릴 때 우리는 부처님과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살아 있는 부처의 몸과 함께 있다 할지라도 내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실로 부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 형상은 몸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상이 있는 바는 다 허망하니 만일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는 모든 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세상의 참모습을 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개시허망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의 허망은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할 때의 허무와는 다른 뜻입니다. 허무는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말하는 반면, 허망은 인간의 감정이 아닌 상이 물거품과 같아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란 뜻입니다. 허망하다는 것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고유한 실체가 있는 것도 아
니라는 뜻입니다. 상이 있는 모든 것은 허깨비 같고 꿈과 같고 아지랑이 같습니다.

<금강경>에는 ‘상’이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제3분에서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제4분에서는 ‘무주상보시’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 4분과 여기 5분에 나오는 상은 한자로 ‘모양 상相’ 자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조금씩 다릅니다. 산스크리트어 원본에 각각 다른 낱말로 쓰여 있는 것을 구마라습 대사가 번역하면서 ‘모양 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제3분의 상은 생각이라는 뜻에 가깝고, 제5분의 상은 몸의 특징에서부터 기대감이나 고정관념까지를 포함한 넓은 개념입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그린 모양이든 바깥에 있는 대상이든 하나의 고정된 모양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이므로 상으로 통일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상이 허망함을 깨쳐야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육신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하며 생각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합니다. 그 어느 것도 영원하거나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진리를 외면하고 내가 지금 지향하는 목표, 지금 내 삶의 기준, 지금 내 눈에 그럴 듯해 보이는 형상이 마치 불변의 최고 가치인 양 매달려 살아가는 게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렇게 상에 집착하면 괴로움의 씨앗이 뿌려져 그 누구도 과보를 피하지 못합니다. 상이 허망함을 깨치고 모든 형상의 집착을 뛰어넘어야만 부처의 도리를 알고 자유와 행복의 참맛을 볼 수 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사람들은 언젠가는 행복이 손에 잡히길 바라며 여기저기 바람과 기대의 씨앗을 심고 있습니다. 대학만 진학하면, 취직만 하면, 결혼만 하면 행복이 올 것 같습니다. 쥐약이든 음식을 눈앞에 둔 쥐는 그 맛있는 냄새에 현혹되어 서로 먹으려고 다툽니다. 그 음식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독약임을 모릅니다.

상이 허망함을 깨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삶 역시 독약이 든 음식을 놓고 경쟁하는 쥐와 다를 바 없습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행복은 겉보기나 물질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마음의 풍요로움으로 이루어집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크면 클수록 마음은 더 큰 공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허망한 상에 더 많이 이끌린다는 것은 그만큼 고뇌의 씨앗을 더 많이 심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어떠한 번뇌와 괴로움도 나와 무관하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이는 하늘을 보며 한탄하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돌아봅니다.

사라져버릴 내 몸을 보았다 한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박칼리라는 비구가 있습니다. 그가 몹시 중한 병에 걸려 죽게 되자, 자기를 돌봐주던 수행승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나를 위해 세존이 계신 곳으로 가주시오. 그리하여 세존께 나를 대신해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비구 박칼리가 병을 앓고 있는데 매우 중태이므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 박칼리는 세존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서 절을 올립니다’라고 예를 올려주시오. 그리고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부디 세존께서는 측은한 마음으로 비구 박칼리의 병석을 한번 다녀가 주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여쭈어주기 바라오.”
그러자 비구들은 부처님을 찾아가 박칼리의 말을 전했고, 부처님은 박칼리가 있는 곳으로 병문안을 가셨습니다. 박칼리는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마십시오. 여기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니 나는 이곳에 앉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박칼리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견딜 만한가요? 기력은 어떠한가요?”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저는 견딜 수 없습니다. 기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은 더 심해지고 좀처럼 나아지지 않습니다.”
“박칼리여, 뭔가 미련이 남거나 후회스러운 일은 없습니까?”
“계율에 비추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스승이시여, 저는 오랫동안 부처님을 뵈러 찾아다녔는데, 이제 더 이상 부처님을 뵙고 법을 구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박칼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사라져버릴 내 몸을 보았다 한들 대체 그것이 뭐란 말입니까. 박칼리여, 사물의 참다움을 보는 자는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사물의 참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박칼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깨달음을 얻어 마침내 환희의 웃음을 지으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부처님은 부처라는 상을 만들고 거기에 집착하는 제자가 그 상을 깨뜨리고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해주셨습니다. 제자가 당신을 우러르고 법을 추앙하기를 바랐던 게 아니라 법을 깨달아 자유로워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경배하며 의지하려는 제자의 마음을 칼로 베듯이 잘라버리고 죽음을 눈앞에 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고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거룩한 부처님의 모습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공한 이치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 나쁜 사람이라고 원망하며 지냈다면 나쁘다고 할 만한 실체가 없는 줄 깨쳐야 하고, 공부 안 하는 아이가 문제라고 걱정해 왔다면 문제라는 게 본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기준, 문제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다 내 생각일 뿐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괴로움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본래 나쁜 것도 없고 본래 좋은 것도 없는 줄을 알면, 좋고 나쁘다는 상으로 생긴 온갖 시비와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내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흔히 전생에 복을 많이 지으면 부자가 되고 죄를 많이 지으면 가난을 면치 못한다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타당한 인과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것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부를 지향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부와 가난은 다만 하나의 상태일 뿐입니다.
이런 식의 전생 업보설은 유사 이래 지배층의 논리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왕이 절대 권력을 가지려면 왕은 백성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것, 지배자가 될 만한 비범함을 타고났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합리화해야 했습니다. 왕이 된 것은 전생에 선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고 노예로 사는 것은 전생에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식입니다. 신분과 계급 차별이 존재하는 이유가 전생의 업보 때문이라는 생각을 확산시킴으로써 지배와 피지배 계급의 관계를 합리화시키고 심화시켜 나갔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서로 다를 뿐 입니다. 그 차이를 차별로 왜곡하는 건 바로 오랫동안 길들여진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태어났든, 어떠한 몸을 가졌든, 남자든 여자든, 피부색이 어떻든 그대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의 형상으로는 결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 이 글은 월간정토 2019년 9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정토회 소식을  '월간정토'로 매달 받아보세요.


 * 나는 행복한 수행자 입니다 *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거나, 욕설, 비방, 광고, 도배하는 댓글은 통보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CD 댓글등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안경을 벗고 세상을 보다
이전글 저놈의 자식, 남이다

정토회
패밀리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