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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강좌]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금강은 다이아몬드를, 반야는 지혜를, 바라밀은 피안의 세계에 도달함을 가리킵니다. 줄여서 <금강경>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 담긴 지혜가 다이아몬드처럼 가장 값지고 소중하고 견고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이아몬드가 세상 모든 물질을 다 깨뜨리듯 <금강경>의 지혜로써 중생의 어리석음과 번뇌를 깨뜨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금강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고 위타인설爲他人說하는 큰 공덕과 기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 6
金剛般若波羅密經



법륜스님 본지 발행인

3 大乘正宗分 (2)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
불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소유일체
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중생지류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 비무상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何以故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 득멸도자 하이고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종류, 즉 알로 나는 것, 태로 나는 것, 습기로 나는 것, 화하여 나는 것, 빛이 있는 것, 빛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내가 다 완전한 열반에 들게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수가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로 제도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如是滅度無量無數 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
菩薩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수가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로 제도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相이란 나다·너다, 깨끗하다·더럽다, 좋다·나쁘다 등등 마음에서 일으켜 모양 지은 관념을 말합니다. 생각으로 지었지만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모양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더러움과 깨끗함, 선과 악 등의 구별은 모두 한생각 일으켜 모양을 지은 것입니다. 흔히 뱀을 보고 징그럽다 하고 돼지를 보고 더럽다고 하지만, 실제로 뱀이나 돼지가 그런 성질을 가진 건 아닙니다. 내가 한생각을 일으켜 그런 식으로 고정관념을 만들어놓고 마치 그 존재가 정말 그런 것인 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수가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을 하면 이미 ‘나’라고 하는 상, ‘너’라고 하는 상, ‘제도하는 자가 있다’는 상, ‘제도를 받을 대상이 있다’는 상, ‘제도를 해야 한다’는 상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이 있는 한 보살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이 허망한 줄 알고 상을 여읠 줄 알아야 보살입니다.

아상我相은 남과 구분된 나라는 존재를 고집하고,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친구는 말할 것 없고 부부나 부모·자식조차 같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상으로부터 다시 두 가지 망상이 일어납니다.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아소我所과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아집我執입니다.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은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은 분노를 일으킵니다.

남편이 술을 마셔서 괴롭다던 부인은 술은 나쁜 것이라는 자기 견해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인에게 술이 보약이라고 생각을 바꾸라고 한 것은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고집을 버려야 상대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아상에 빠진 사람은 수천수만의 그물코 가운데 오직 한 코만을 잘라 ‘이것이 그물이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한 그물코만 가지고는 그물이 될 수 없듯이, 아상에 빠져 있으면 실제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늘 실상과 동떨어진 세계관에 빠져 살게 됩니다.

이렇게 자아에 대한 개념을 아상이라 한다면 영혼에 대한 개념을 인상, 존재에 대한 개념을 중생상, 생명에 대한 개념을 수자상이라 말합니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다른 것과 구별되고 변하지 않는 어떤 존재를 상정한다면 그것은 모두 상이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의 범위를 구분 짓는 경계에 따라서 나와 너를 구별하는 아상,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는 인상, 생명과 무생명을 구별하는 중생상, 존재와 비존재를 구별하는 수자상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는 다른 것과 구별되며 변하지 않는 그 어떤 존재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 구별하든 그것은 다 생각이 만들어낸 하나의 상일 뿐입니다.

도가 머리털에 있느냐
옛날 한 스님이 도를 이루어 좋은 법문을 설하니 많은 사람이 그를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스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큰스님으로 추앙하며 몰려들자 어느 날 아무도 몰래 대중 곁을 훌쩍 떠났습니다. 스님이 갑자기 사라져버리자 스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스승을 찾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제자 한 명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 노를 젓고 있는 뱃사공이 바로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스승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제자는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하고는 물었습니다.
“스승님 이게 웬일입니까? 아니, 머리는 왜 기르셨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호통을 쳤습니다.
“이놈아, 도가 머리털에 있느냐!”
스승은 상에 집착하고 있는 제자를 깨우친 것입니다. 어떤 상이든 상을 가진 채로는 실상을 볼 수 없고, 실상을 보지 못하면 보살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금강경>을 읽고 모든 법이 공하여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아! 이게 진짜 불법이구나. 이런 좋은 법이 있었구나!’ 하고 깨치게 되었다고 합시다. 문제는 그렇게 불법을 만나고도 또다시 법이라는 상을 짓기가 십상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정법正法’이라는 상에 빠지면 ‘절에 다니며 복이나 비는 건 불법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이렇게 분별심을 일으켜 이번에는 정법이라는 이름으로 참과 거짓으로 남과 다투게 됩니다. 심지어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고집하는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은 지금 상에 집착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상을 내려놓으라고 하셨는데 왜 상에 집착하는 거야?’ 하며 상을 없애야 한다는 상에 빠져서 상대와 다투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상을 여읜 게 아닙니다. 참으로 상을 여읜 사람이라면, 전에는 무속 신앙에 의지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이젠 오히려 그렇게라도 해보고 싶은 그들의 답답한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상을 여의었다는 건 그 어떤 상에서든 다 벗어났다는 말이고, 어떤 상도 여읜다는 것은 세상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입니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 나와 다른 의견과 주장, 나와 다른 종교와 신앙, 나와 다른 사랑의 방식도 모두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상을 여읜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게 옳다, 저게 옳다를 구별하는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늘 시시비비에 끌려 다닙니다. 또 자꾸 경계를 지어서 스스로를 답답하게 묶어 놓습니다. 화단에 피어 있는 꽃들을 보세요. 형형색색으로 예쁘게 피어 다른 꽃들의 아름다움을 시비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 보물은 본래 내 것이었다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라”는 말을 듣고 ‘도대체 내가 저 많은 중생을 어떻게 다 제도한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중생과 나를 분리하는 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설령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이미 나와 너를 구분 짓고, 구제하는 자와 구제받는 자를 구분 짓는 것이므로 상을 여읜 보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경계 짓는 마음만 사라진다면 세계는 있는 그대로 하나입니다. 본래 경계가 없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저 많은 중생을 어찌 다 제도할까?’ 하는 그 마음이 바로 번뇌고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인 사상四相입니다.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구분하지 않고, 제도한 것과 제도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제도를 받은 중생은 본래부터 없습니다.

옛날에 큰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비옥한 농토에 오곡이 풍성하고 왕궁은 호화롭기가 그지없었습니다. 왕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공덕임을 자랑했고, 온 백성이 그의 덕을 칭송했습니다.
왕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공주가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공주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공주야, 만백성이 나를 칭송하고 너 또한 이 나라의 공주로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게 다 누구의 덕분이겠느냐?”
왕은 공주가 ‘다 아버님 덕분이에요’라고 대답하리라 믿었지요. 그런데 공주의 답변은 달랐습니다.
“아버님, 저는 제가 타고난 덕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자 왕은 크게 화를 내며 공주에게 소리쳤습니다.
“좋다. 정히 네 덕으로 행복하게 사는 거라면 당장 왕궁에서 나가 네 덕으로 한번 실컷 살아봐라.”
왕은 공주를 성 밖으로 내쫓고는 가장 가난한 거지에게 딸을 맡겨버렸습니다.
“이 여자가 오늘부터 네 아내다. 이젠 더 이상 공주가 아니니 만일 헤어지거나 하면 네 목숨도 없음을 명심하라.”
거지는 갑작스런 상황에 몹시 놀라 공주에게 제발 왕궁으로 돌아가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공주는 자기도 이제 거지일 뿐이니 여기서 함께 살겠노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그렇게 거지와 부부가 된 공주는 어느 날, 남편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거지는 아주 어릴 때 고향을 떠나왔으므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공주는 거지와 함께 기억을 더듬어 마침내 고향을 찾았지만, 어렵게 찾은 고향 집은 이미 잡초만 무성한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공주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그 집터에 누가 살았고 어쩌다 그렇게 폐가가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이 아주 큰 부자였는데 오래전에 도적단의 습격으로 온 가족이 몰살되고 집까지 불타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나이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만 간신히 살아남아 어딘가로 피신한 뒤로 소식이 끊겼다고 했습니다.
공주는 집터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한 곳을 가리키며 남편에게 그곳을 파보라고 했습니다. 공주가 가리킨 그곳에는 무수한 보물이 묻혀 있었습니다. 거지의 부모가 죽음을 무릅쓰고 지킨 보물이었습니다. 보물을 찾은 두 사람은 그 터에 다시 호화로운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한편 공주를 쫓아낸 왕은 이제나저제나 공주가 돌아와 용서를 구할 날을 기다렸지만 몇 년이 지나도 공주는 종무소식이었습니다. 왕은 기다리다 못해 신하에게 공주가 어찌 지내는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하가 전하는 말이 공주와 거지는 큰 부자가 되어 잘살고 있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왕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공주가 사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공주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살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제야 자신의 오만을 뉘우쳤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거지는 중생을 비유합니다. 거지가 잊고 살았던 고향집은 불세계佛世界를 말합니다. 거지가 무너진 집터 잡초더미에 파묻혀 있는 보물을 기억하지 못했듯이 우리도 자신의 불성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나는 본래부터 거지였다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거지가 만난 공주는 우리를 불세계로 인도하는 눈 밝은 스승, 부처님이나 보살입니다. 거지는 불보살의 인도로 본래의 고향인 불세계를 찾아 자신의 보물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의 만족에 빠져 본래의 자기 모습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본래의 고향, 부처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간절한 그리움을 깨닫고 이제 고향을 찾아 나서겠다는 원願력力을 가져야 합니다.

공주와 거지가 부부라는 설정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한 몸임을 상징합니다. 너와 내가 한 몸임을 아는 보살은 내가 너에게 보물을 찾아주었다는 식의 분별을 갖지 않습니다. 또한 공주가 아무리 정성껏 거지를 도왔어도 보물의 본래 주인이 거지인 것처럼, 보살이 아무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애썼더라도 깨달음은 중생 스스로의 것입니다. 보살은 다만 중생이 보물을 되찾을 때, 마치 자신이 보물을 찾은 듯이 함께 기뻐할 뿐입니다.

 

 

* 이 글은 월간정토 2019년 6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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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행복한 수행자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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