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정토맑은마음,좋은벗,깨끗한 땅을 실현하는 정토회


[경전강좌]

 

금강반야바라밀경
金剛般若波羅密經

 



법륜스님    본지 발행인 

 

 

1. 제일법회인유분(2)
第一 法會因由分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於其 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이시 세존 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 걸식어기 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반사흘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이와 같음을 내가 들었사오니, 한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성 안에서 차례로 걸식을 마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기수급고독원

부처님이 <금강경>을 설한 장소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입니다. 사위국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당시 인도 코살라국의 수도이므로 사위성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 사위성 안의 기수급고독원이 <금강경> 설법의 무대입니다.

기수급고독원은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도 불리는데, 마가다국 왕사성의 죽림정사(竹林精舍)와 더불어, 부처님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부처님은 성도(成道) 이후 45번의 안거 중 25번의 안거를 사위성에서 보냈고 그중 19번의 안거를 기원정사에서 보냈습니다.

기원정사가 만들어진 유래를 잠시 살펴보면, 사위성에 수닷타라는 장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장자는 덕 있고 나이 지긋한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 부자인 자산가를 뜻하기도 합니다. 수닷타는 급고독 장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가난하고 외로운 이를 도와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수닷타는 마가다국 왕사성에 갔다가 부처님을 뵙고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그러고 부처님께 사위성으로 오셔서 교화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부처님이 승낙하자 수닷타는 사위성으로 돌아와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처소를 짓기 위해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수행처는 번잡한 성안을 벗어나 한적한 곳에 있는 것이 좋지만, 그렇다고 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탁발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위성 서문 밖에서 500m쯤 떨어진 기타祇陀 태자의 숲은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수닷타는 기타 태자를 찾아가 태자의 숲을 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기타 태자는 그 아름다운 숲을 팔지 않겠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런데도 수닷타는 돈은 얼마라도 내겠으니 숲을 팔라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기타 태자는 감히 코살라국의 왕자인 자신에게 숲을 팔라고 요구한 수닷타에게 화가 난 나머지, 숲바닥을 모두 금화로 깔면 팔겠노라고 합니다. 수닷타는 그날부터 자신의 재산을 금화로 바꿔 기타 태자의 숲에 깔기 시작했습니다. 기타 태자는 결국 수닷타의 정성에 탄복해 숲을 기증했고, 이렇게 해서 기타 태자와 급고독장자의 이름을 딴 기수급고독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기수급고독원은 그렇게 믿음의 힘이 이룩한 불사(佛事)였습니다.

•1250명의 비구

비구는 출가해 걸식으로 수행하는 남자 승려입니다. 걸식을 한다는 것은 위로는 법을 빌어 청정하게 생활하고, 아래로는 밥을 빌어 몸을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1250인의 비구 대중이 이루어진 과정에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뒤부터 불교 교단이 정착되기까지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은 7주 동안 법열을 만끽한 뒤 도반이었던 다섯 비구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바라나시까지 260㎞가 넘는 먼 길을 찾아갑니다. 부처님이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니, 이 다섯 비구가 부처님의 첫 번째 제자들입니다.

이어 바라나시에서 장자의 아들 야사가 재가자로서 첫 출가자가 되고, 뒤를 이어 야사의 친구 54명이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부처님은 이들 60명의 제자들에게 전법 선언을 한 뒤, 마가다국의 우루벨라 촌에서 가섭 3형제가 이끄는 사화외도(事火外道) 1000여 명을 교화해 모두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사리불과 목건련이 200여 명의 대중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했고,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성도 후 3년 만에 불교 교단은 수행공동체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법 초기에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이분들은 이후 교단의 장로로서 ‘대비구’라 불리며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셨습니다.

수행자가 입는 옷인 가사는 본래 시체를 버리거나 화장할 때 시체를 덮은 천 조각을 말합니다. 인도의 전통 장례법은 화장입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도는 나무가 귀한 지역이라 가난한 천민들은 화장할 돈이 없으면 천으로 시체를 둘둘 말아 숲에 내버리는 것이 장례 절차의 전부였습니다. 이렇게 시체를 싸는 데 썼던 천 조각이 분소의糞掃衣고, 수행자라면 누구나 이 분소의를 주워 입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분소의를 구할 수 없으면 분소의를 입는 정신으로 다른 천을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분소의만 입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굳이 새 옷을 분소의로 만들어 입는 형식주의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발우는 수행자가 걸식할 때 사용하는 그릇을 말합니다. 이 그릇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밥을 비는 것을 탁발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맛으로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만을 걸식해 먹습니다.

이렇게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는 가사 한 벌과 발우 한 개가 개인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을 본받아 검소하게 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고, 그래서 지금도 불가에서는 법을 계승하는 증표로 가사와 발우를 전하는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그 성 안에서 차례로 걸식을 마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어느 날 걸식을 끝내고 돌아와 공양을 들면서 보니 아난다와 마하가섭의 공양물이 대조적이었습니다. 아난다의 발우에는 기름진 쌀밥에 좋은 반찬이 담겨 있는데, 마하가섭의 발우에는 먹다 버린 밥에 형편없는 반찬뿐이었습니다.
부처님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아난다여, 그대는 어떻게 걸식을 하는가?”
“예, 부처님. 저는 부잣집을 찾아가 걸식을 합니다. 가난한 집에 탁발을 나가면 그 사람들도 먹을 것이 모자라는데 나누어주기 어렵고, 그렇다고 시주를 안 하면 그 사람이 업을 짓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이왕이면 넉넉한 집에 가서 걸식을 합니다.”
부처님은 마하가섭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예, 저는 가난한 집만 골라서 걸식을 합니다. 그들은 가난해서 시주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시주를 하지 않으면 다음 생에도 가난해집니다. 비록 이생에는 가난하지만 복을 지어야 다음 생에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한 집에 가서 탁발을 함으로써 그들의 복전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훌륭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수행자는 부자든 가난하든 가리지 말고 처음 탁발을 시작한 집에서부터 차례로 일곱 번째 집까지만 밥을 비십시오. 모름지기 수행자는 분별을 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집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이나 복을 짓도록 해주겠다는 생각 모두 우리 마음이 짓는 분별심입니다. 부처님은 시비 분별을 떠나 무심으로 일곱 집을 차례로 걸식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이때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아무 구별 없이 차례로 일곱 집을 걸식하는 차제걸이(次第乞已)가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차제걸이는 밥이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일곱 집 이상을 걸식하지 않도록 한 걸식의 지침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일곱 집을 돌고도 공양을 받지 못했다면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기근으로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어 그들도 먹을 것이 없을 때거나, 비구들의 수행이 부족해서 대중이 불만을 가지고 공양을 기피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경우라면 수행자도 마땅히 대중과 함께 굶어야 하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자신의 수행을 곰곰 돌아보고 반성해야 합니다.

이렇듯 걸식의 의미 역시 수행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가난한 이에게 밥을 빌어 그들을 높였고, 왕과 귀족에게 굽히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낮추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높은 자보다 높고, 가장 낮은 자보다 낮은 이가 되어 일체중생이 평등함을 보였습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걸식을 마치면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들었습니다. 당시 수행자는 언제나 맨발이었으므로 공양이 끝나면 발을 씻고 발우와 옷을 정돈했습니다. 그런 뒤에 부처님은 고요히 선정에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금강경> 제1분이 마무리됩니다. 이 1분은 표면적으로 보면 <금강경>이 설해진 당시의 배경 묘사에 불과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뜻을 궁구하면 <금강경>의 가르침, 더 나아가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 이 한 장면에 함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평범한 일상의 모습에 최고의 도가 있음을 몸소 실천해보이고 계십니다. 1분에서 이 의미를 깨달으면 나머지 뒷부분은 보충 설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 쉽게 진리의 문을 열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설법을 청하는 형식으로 경전이 전개되고, 수보리의 질문과 의심을 통해 우리는 더욱 자세하고 풍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월간정토 2019년 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정토회 소식을  '월간정토'로 매달 받아보세요.


 * 나는 행복한 수행자 입니다 *

 


 

게시판의 성격에 맞지 않는 글이나, 상업적 홍보글은 통보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CD 댓글등록
이 글의 댓글 1개
  •  서정희 2019/03/04 13:02
    부처님 감사합니다.
다음글 [다음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법회가 열리던 날

정토회
패밀리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