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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이 본래 부처


법륜스님 본지 발행인

내가 모르는 내 몸 안의 보물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말을 <법화경>에서는‘자기 몸에 보물을 간직하고도 알지 못하는 거지’에 비유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지가 오래간만에 부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친구가 가득하게 차려준 음식상을 받고 실컷 먹고 마신 뒤 마침내 취해서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부자 친구가 볼일이 있어 나가야 하는데, 이 거지는 인사불성이 되어서 깨워도 깨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 어쩔 수 없어 부자 친구는 나가면서 거지 친구가 평생 먹고살아도 남을 보석을 옷에다 넣어줍니다. 혹시 술 먹고 잃어버릴까 싶어 주머니 안섶에다가 넣고 꿰매 주고 떠납니다. 그런데 이 거지는 이것도 모르고 그 후에도 계속 거지로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자 친구가 길에서 다시 거지 모습인 자기 친구를 보자 자기가 준 보석이면 충분히 잘 먹고살았을 텐데,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놀랍니다. 그런데 거지는 그때까지도 자기가 귀한 보석을 가진 줄 모릅니다. 그래서 부자 친구는 잠잘 때 옷에 넣고 꿰매어준 보석 이야기를 하지요.

우리 중생도 이와 같습니다. 본래 우리는 모두 그 보석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이 능력을 놔두고 업식에 끄달리며 괴로워하며 살아요. 자기 업식을 주인으로 삼고 거기에 묻혀 사는 겁니다. 이것을 깨우쳐 주려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일대사 인연임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어 청정케 하려고 오신 것이지요. 그런데 중생에게‘네가 부처다’하면 납득하지 못하고 도망가니까, 다시 중생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셔서 오욕락을 누리며 살다가 수행하여 해탈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랬더니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은 본래 특별했어. 왕자로 태어났고, 또 날 때부터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던데’라고 생각하면서‘나는 안 돼’하고 또 물러나요. 그래서 부처님은 팔만 사천 법문을 하셔서 우리가 진리를 깨달아 진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진리의 세계를‘나와는 상관이 없다. 스님들이나 할 이야기이고, 늙어서나 할 이야기다. 나같이 죄 많은 중생이 뭐가 될 수 있겠느냐’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도, 500명의 유녀를 데리고 있던 기생의 우두머리 연화색녀도, 천하 바보인 주리반특도, 똥꾼 니이다이도 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진여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안 된다’는 생각,‘ 나는 다 아니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이 두 생각을 버리고 진실로 내 업식의 안경을 벗어 던지고 진여의 세계를 바라본다면, 누구나 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요.

아집의 안경을 벗자
오늘부터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이 업식의 안경을 벗는 일입니다. 볼록렌즈나 오목렌즈를 끼고서 ‘이건 너무 크다’거나 ‘너무 작다’해서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맞추고 물건을 사면, 나중에 안경을 벗고 실제 크기와 다시 맞춰 봤을 때 크거나 작아서 못 쓰는 물건이 되겠지요. 이처럼 자기 업식의 안경을 낀 채 그 안경에 맞추어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에게 자기 식대로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이가 집에서 말 잘 듣고 해서 쓸 만하다 했는데, 밖에 나가면 ‘형편없는 놈’소리를 듣고, 남편이 집에서는 잘해서 훌륭한가 했는데, 밖에서는 집밖에 모르는 ‘좀팽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지금 제일 급한 것은 나 밖의 존재, 즉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나에게 맞게 고치는 게 아닙니다. 우선 내 업식의 안경, 이것을 벗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다음에 제법의 실상을 보고 이치에따라 고칠 걸 고쳐야 되는 것이지요. 

  시비분별은 자기 업식의 안경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임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있어서 시비분별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제법의 모습이 그렇게 내 눈에 비친 것이지요. 그러므로 시비분별에 휘말리지 말아야 하고, 모든 상이 허상임을 알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인 줄을, 즉 한 생각 일으켜서 모양 지은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시비분별에 집착하지 말고[無主], 모양 짓지 말며[無相], 더 나아가서는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아 무념無念이 되어야 합니다. 번뇌망상, 즉 우리의 업식에 의해 일으키는 한 생각을 쉬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제법이 본래로 여여하여 그대로 진여의 실상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인연 따라 이리저리 나투는 화작化作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업식을 녹이는 것입니다. 업식에 의해 일어나는 자기주장, 즉 아집을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아집을 버리려면 먼저 엎드려 절을 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옳고, 내가 잘났다는 이것을 먼저 놓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이 진실의 세계에 접근하기 어렵고, 또 안심입명의 경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분별을 놓아버리면 사람이 바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자동차 운전하는 방법을 잊는 것도 아니고, 우리말 배운 것을 잊어버리거나 재물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이의 성적이 갑자기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집을 놓으면 화가 나지 않고 미움이 생기지 않고 번뇌가 사라져 마음이 편해집니다.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사라지는 것은 괴로움과 속박의 굴레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걱정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업식의 안경을 벗기 싫다는 다른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왜 이 업식의 안경이 벗기 싫을까요? 그것은 업식의 안경을 끼고 있는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나는 업식의 안경을 안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당신들이 문제지, 나는 객관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이렇게 망상 피우는 겁니다. 전도몽상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수행자는 자기가 업식의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보는 모습은 내 업식의 안경을 통해 보는 모습이니까 안경 벗고 세상 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별심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탁 돌이키는 것입니다. ‘아이고, 내 안경에 또 이렇게 비치네. 이건 절대 실제 모습이 아니야’하고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시누이와 마음이 안 맞아 화가 나서‘어이구, 미운 시누이’하다가 바로 생각을 돌이키세요. 내 안경에 비친 모습이니까요. 내 안경을 벗으면 미움이 사라지니까 용서할 것도, 참을 것도 없게 되는 거지요.

  공부할 때는 관점을 잘 잡아야 합니다. ‘미운짓’하는 생각이 팍 올라올 때 사실 ‘미운짓’이란 없다, 내 안경에 비친 모습일 뿐이다, ‘일체가 유심소조 - 즉 마음으로 지어서 만든 것이다’하는 여기에 초점을 두고 공부해야 단박에 끝내버리지,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꿈속에서 헤맵니다.

  이는 색안경을 끼고 사물의 빛깔을 바로 보려 하는 것과 같고, 안경을 벗어야 알 수 있는 세계를 안경 끼고 찾으러 다니는 꼴입니다. 그러나 굳이 안경 벗는 연습을 위해 머리 깎고 스님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결혼 안 한 사람은 안 한 그대로 하고, 한 사람은 한 상태에서 하면 되지, 결혼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결혼 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바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일에는 승속이나 남녀, 노소, 귀천과 유무식이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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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댓글등록
이 글의 댓글 3개
  •  성미연 2018/02/16 23:53
    가슴 깊이 새겨 수행정진해 나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_()_
  •  이기사 2018/02/11 11:56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_()_
  •  서정희 2018/02/01 12:04
    감사합니다. 스님
    그럼 스님께서는 왜 스님이 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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