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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강좌 법성게(7) 

<법성게>는 신라 고승 의상 조사께서 화엄경을 요약해서 쓰신 글로 7자로 된 30구절, 210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 중에서도 양이 가장 방대하고 내용이 깊다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에서 축약해서 그 진수를 뽑은 글입니다. <월간정토>는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스님의 법문으로 <법성게>를 연재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의 지혜방편

   
  

     

법륜스님 본지 발행인

     

     

고요한 마음자리에서 나오는 지혜

     

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

생사열반 상공화(生死涅槃 相共化)

이사명연 무분별(理事冥然 無分別)

십불보현 대인경(十佛普賢 大人境)

     

  처음 발심한 때가 곧 마지막 정각을 이룬 때이고 생사윤회하는 의 세계와 생사윤회가 소멸한 열반의 세계가 서로 같이 조화를 이루며, 본질의 세계인 이()와 현실의 세계인 사()의 경계가 사라져 구분 없는 세계가 곧 모든 부처님과 보현보살 등 모든 보살의 경지라는 뜻입니다.

 

  십불보현이라. 십불이란 열 분의 부처님이란 뜻이 아니라 시방세계에 두루 계신 모든 부처님과 보현보살 등 모든 보살님을 말합니다.

     

능인해인 삼매중(能仁海印 三昧中)

번출여의 부사의(繁出如意 不思議)

     

  ‘능인(能仁)’이란 부처님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대웅(大雄)‘이 부처님을 이야기하듯이 능인도 같은 뜻이지요. ‘해인삼매란 해인정(海印定)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이 든 선정을 말해요. 해인 삼매 중이라 하면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이 모두 비치듯이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의 고요한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의 해인 삼매 가운데 번출여의가 부사의 하다는 건, 부처님의 지혜에서 뜻대로 중생을 위한 온갖 방편이 나오는데,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지요.

 

  부처님의 지혜와 방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 하늘 위에서 우리나라 전체를 한눈에 다 내려다보는 것이 부처님의 지혜라 한다면, 이 지혜로운 분에게 오천만 국민이 각자 자기가 선 자리에서 서울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묻는다면 마음껏 일러 줄 수가 있겠지요. “당신은 동쪽으로 가고 당신은 동북쪽으로 가시오. 그리고 당신은 서쪽으로, 당신은 남쪽으로 가시오.” 묻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서울로 가는 가장 바른 방향을 일러 줄 수가 있어요. 마치 거울이 다가오는 온갖 것을 다 비추어 주듯이, 만 가지가 오면 만 가지를 비추고, 억만 가지가 오면 그 억만 가지를 다 비추는 거지요. 무한한 사물을 비추는 거울처럼 부처님도 중생의 근기 따라 무한한 설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 거울은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냥 물건을 비추듯이 중생의 근기가 부처님의 광명에 그냥 비추어지기 때문이지요. 서울 가는 길을 만 명이 물으면 각자 다 다르게 가는 방향을 가르쳐 주고, 억만 명이 물어도 마찬가지지만, 그 방향을 외우고 있다가 말해 주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냥 묻는 대로 답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체를 내려 비추는 깨달음의 상태를 부처의 지혜, 능인해인 삼매중이라 합니다. 이 지혜에서 자유자재로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 만 가지 설법이 나오는데, 이것이 방편이고 자비입니다. 중생에 대해 가엾이 여기는 그 마음에서 방편이 자유자재로 나오는데 그것이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도저히 중생의 사랑 분별로는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백이나 천 가지 정도의 처방을 외워서 만이나 십만 가지의 병을 치료하려는 의사를 우리는 돌팔이 의사라 하지요. 그는 고치는 병보다 못 고치는 병이 더 많습니다. 만 가지 병에 만 가지의 처방을 갖고 치료를 하는 의사를 명의라 하는데, 그는 이런 병에는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하는지를 다 외워서 환자를 치료합니다.

 

  그런데 신의는 어떠냐? 처방을 외워서 치료하는 의사가 아닙니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대응해요. 환자가 배가 아프다하면 정해진 무슨 약을 먹이는 게 아니라, 환자의 상태를 봐서 물 한 그릇 먹어라, 아주까리 먹어라, 설사약 먹으라 하고, 그때그때의 상황 따라 다른 처방을 줘요. 어떤 병에는 어떤 처방이라고 외워서 치료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돌팔이 의사는 말할 것도 없고, 명의에게도 고치기 쉬운 병과 어려운 병이 있어요. 그러나 신의는 뭐든지 다 치료할 수 있으니까 치료하기 쉽고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 없습니다. 병 따라 처방이 다 다르듯이 부처님의 지혜 안에는 중생을 교화하는 데 어렵고 쉬운 구별이 없어요. 사람을 죽인 악인이나 수많은 보시행을 행한 착한 사람이나 해탈과 열반으로 이끄는데 드는 신의 힘은 같습니다. 모든 것을 훤히 보고 있는 사람에게 수원에 있는 사람이 질문하나, 부산이나 강릉에 있는 사람이 질문하나 서울 가는 방향 일러 주는 데는 쉽고 어렵고의 차이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두 종류의 인연 없는 중생만은 부처님도 구제 못 한다고 했어요. 어떤 중생이 부처님도 구제 못 할 중생인가? 자동차 운전 못 하는 사람을 예로 들어 보면, 운전 못 배우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어요. ‘다 안다는 사람과 모르겠다는 사람입니다. 정반대 같은데 두 사람의 공통점은 안 듣겠다.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부처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가문 땅에 단비가 내려서 다 자기 그릇만큼 빗물을 받아 가는데, 그릇을 거꾸로 들고 있는 사람은 비가 아무리 와도, 그릇이 아무리 커도, 아무리 오래 비를 받아도 그 귀한 빗물을 한 방울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릇을 거꾸로 든 사람을 퇴굴심과 증상만을 가진 중생이라고 하는데 이런 중생만 빼고는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죽이려 했던 데바닷다도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도, 용녀까지도 성불하는 이야기가 법화경에 나옵니다.

     

열린 마음에 광명의 빛이 들어온다

     

우보익생 만허공(雨寶益生 滿虛空)

중생수기 득이익(衆生隨器 得利益)

     

  이롭게 하는 보배의 비가 허공에 가득하게 내리는데, 중생들은 다 자기의 그릇에 따라 이익을 얻어간다는 것입니다.

 

  「법화경약초유품(藥草喩品)에는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구름이 가득하게 퍼져 삼천 대천 세계를 두루 덮어 일시에 비가 내리지만, 작은 뿌리 작은 줄기에 작은 가지 작은 잎새며, 중간 뿌리 중간 줄기에 중간 가지 중간 잎새며, 큰 뿌리 큰 줄기에 큰 가지 큰 잎새며 여러 나무의 크고 작은 것들은 각각 차별 있게 그것을 받아 간다.” 부처님의 자비 광명은 하늘에서 비가 차별 없이 내리고 태양이 지구의 모든 것들을 일체의 차별 없이 천하만물은 다 자기 인연 따라 가져간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교회 안 다닌다 해서 천상에 못 가고 교회 다닌다 해서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안 비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신 보살님이 계셨어요. “아아 스님, 저는 딸을 위해 관세음보살님께 간절히 기도는 하지만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딸애가 교회에 다니거든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지요. “보살님은 부처님이 자기 같다고 생각하나 봐요. 부처님은 절에 다닌다고 봐주고, 절에 안 다닌다고 안 봐주고 하는 중생이 아니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종교가 있든 없든, 또 어떤 종교를 가지더라도 마음의 문을 연 사람들은 지혜와 자비의 광명이 비칠 것이고, 절에 아무리 다녀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있으면 그 빛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절에 다니면 어떤 면이 유리한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음의 문을 열게 해주는 거지요. 마음의 문이 열려야 광명이 비치게 됩니다.

 

  그러나 눈은 자기가 스스로 떠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밝은 줄 압니다. 눈을 감고 아무리 세상이 어둡다고 고함을 지르고 도움을 요청해 봐도 소용이 없어요. 그처럼 자기 업식의 안경만 내려놓으면 일체의 괴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왜냐? 본래 세상은 괴로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보익생 만허공, 중생수기 득이익.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의 비가 허공 가득히 내리지만 중생들은 다 제 그릇 따라 이익을 얻어 가는구나, 지금 이 시간에도 그래요. 같은 법문을 해도 듣는 사람의 근기 따라 이익을 가져가는 것이 다 달라요. 이 순간에 크게 깨닫는 사람이 있나 하면, 마음의 문을 꽉 닫고 안 듣는 사람, 마냥 조는 사람, 또 자기 생각만큼만 힌트를 얻어 가는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 이 글은 월간정토 2017년 1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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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댓글 1개
  •  서정희 2017/12/04 17:51
    스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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