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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강좌 | 금강경]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금강은 다이아몬드를, 반야는 지혜를, 바라밀은 피안의 세계에 도달함을 가리킵니다. 줄여서 <금강경>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 담긴 지혜가 다이아몬드처럼 가장 값지고 소중하고 견고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이아몬드가 세상 모든 물질을 다 깨뜨리듯 <금강경>의 지혜로써 중생의 어리석음과 번뇌를 깨뜨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금강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고 위타인설爲他人說하는 큰 공덕과 기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 (8)
金剛般若波羅密經



법륜스님 본지 발행인

4. 妙行無住分 (2)

復次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行於布施
부차수보리 보살 어법 응무소주행어보시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提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 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 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 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법에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법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느니라.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되 상에 머물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남서북방 사유상하 허공을 가히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여! 보살은 응당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저놈의 자식, 남이다
상에 집착한 보시로 구하는 복은 유루복有漏福에 불과합니다. 유루복은 저축한 돈과 같아서 다 쓰고 나면 사라지는 복입니다. 그러나 상에 집착하지 않고 베풀어 얻는 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무루복無漏福입니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울 때 키우는 재미를 마음껏 누렸다면, 즉 ‘내가 아이를 위해 희생했다’, ‘아이에게 사랑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이며, 무루복을 얻는 길입니다. 그렇게 아무 바라는 바가 없으면 장성한 자식이 효도를 하지 않아도 조금도 서운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동안 부모로서 이미 한없는 기쁨을 누렸기에, 이제는 그 자식이 독립해 자기 식솔을 잘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부모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더구나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면 진심으로 고마워하게 될 것입니다.
무주상보시는 자신이 베풀었다는 상이 남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베푼 보시에 대한 보답이 생기면 그것으로 다시 새로운 보살행을 하면 되고, 또 아무런 보답이 없어도 상처나 아쉬움 없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미국 뉴욕의 원각사란 절에 ‘기도 보살’로 소문난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9시면 절에 나와 <금강경>을 열 번 읽고 점심 공양이 끝나면 1000배를 했습니다. 집안도 넉넉했고 큰아들은 의사고 작은아들은 교수라서 미국에서도 중류층 이상에 속했습니다.

어느 날 점심 공양을 끝내고 할머니가 살아오신 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열여덟 살에 결혼해서 큰 아이를 낳고 작은아이를 가졌을 즈음에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남편은 군에 입대했고, 몇 달이 되지 않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이 캄캄했지요. 전쟁통에 남편은 죽고 배부른 몸으로 어린아이를 들쳐 업고 피난하는 심정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불현듯 처녀 시절에 친정어머니를 따라 다녀보았던 절이 생각나서 무조건 부처님께 의지하고 매달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죽기 살기로 손에 잡히는 일감이면 무엇이든 놓치지 않고 해냈습니다. 시장 바닥을 헤매면서 억척스럽게 살다보니 어느덧 세월이 흘러 큰 가게를 가지게 되었고 아이들도 잘 자랐습니다.

두 아들은 공부를 잘해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두 아들은 거기서 결혼하고 기반을 잡게 되자 어머니를 모셔 가려 했습니다. 할머니도 이젠 허리 펴고 살아 보자는 마음이 들어 가게와 집을 정리하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런데 막상 미국 땅에 와보니 내가 사람이 아니라 나무 토막같이 여겨졌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길도 모르고 사람 사는 풍속도 다르고, 하나같이 눈에 거슬려서 답답하고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음 통하는 사람도 없고, 자식들이 출근하고 나서 텅 빈 집에 혼자 남아 있으면 감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집에만 갇혀 지내다 보니 자연히 인생의 허망함을 곱씹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가기만 하면 행복이 쏟아지리라 믿었는데 행복은커녕 괴로움만 늘어났습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자연히 미국에 온 것이 후회가 되고 아들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기고 그 서운함은 점점 미움과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은 어머니의 역정을 괜한 것이라고만 여겼습니다. 어머니의 평생소원이 허리 펴고 쉬는 것이었고 이제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쉴 수 있는데 왜 자꾸 이러시는 걸까, 이제 마음 편히 살 수 있는데 뭐가 불만이신 걸까 싶었습니다.

할머니는 급기야 자식들 얼굴만 봐도 ‘저놈들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마음을 달래려 아무리 염불을 해도 날이 갈수록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는 도저히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들들에게 한국을 떠나올 때 가져왔던 돈을 돌려 달라고 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장사를 하면서 살겠노라고 말이지요. 아들들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곳에 가서 왜 고생을 하느냐고 펄쩍 뛰었습니다. 할머니는 자식들이 돈을 주지 않자 내 집 팔아 마련한 내 돈을 자식들이 돌려주지 않으려 한다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습니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연로한 어머니가 노망드신 게 아닐까 근심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할머니는 누구라도 좋으니 자기를 한국에 데려가 주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이렇게 절에 나와 하루 종일 기도를 하는 것으로 지금껏 하루하루를 버텨왔다며 제 손을 붙들고 한국에 좀 데려다 달라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제가 말했습니다.
“보살님, 자업자득이란 말 아시죠? 지금 보살님이 바로 그렇습니다.”
위로는커녕 지옥과 같은 지금 상황을 자업자득이라고 하니 할머니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자업자득이라고 하느냐’며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저는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려 다시 말했습니다.
“제 말을 섭섭하게만 여기지 마세요. <금강경>을 그렇게 오래 독경하셨으니 ‘무주상보시’가 뭔지 아시지요?”
“주고도 주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거지.”
사실 이 할머니뿐 아니라 많은 불자들이 무주상보시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주상보시는 보시했다는 기억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시의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빚을 갚는 사람의 마음처럼, 본래 내 것이 아님을 알아서 돌려주는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 무주상보시입니다. 기대 심리가 없는 보시가 무주상보시입니다. 이러한 무주상보시의 의미를 새기지 못하고 금강경을 읽으면 입으로 외우는 것뿐입니다. 나의 보시를 받아주어 고맙다고 상대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는 것이 무주상보시입니다.

보시를 할 때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고 해도 그 보시에 내 것이라는 마음이 있다면 마치 몸에 그림자가 따르듯 보상심리가 스며들게 됩니다. 그런 마음의 보시라면 만약 누군가에게 열 번이나 보시를 했는데 그가 아무런 감사 인사도 하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보시할 때에는 받아주기만 해도 고맙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의 인간관계를 들여다보면 치밀한 계산명세서를 주고받는 거래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사랑이란 이름 아래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손익계산을 하며 살아가지요. 상대적으로 그러한 계산이 적은 것이 부모자식 간의 관계지만 부모자식 간이라도 본질에서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내면에선 끊임없이 계산하며 살기 때문에 번뇌와 고통의 근본 뿌리조차 보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가지요.

이렇다보니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 역시 일종의 투자로 변질해 버립니다. 마치 부동산을 사두는 마음으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어떤 보상을 기대합니다. 요즘에는 과거처럼 노후를 의탁하려는 기대 심리를 갖는 부모가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자식에 대한 기대는 여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내 기대에 못 미치면 ‘내가 너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는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지요.

“보살님이 정말 무주상보시를 했다면 자식에게 아무런 서운함이 없어야 합니다. 아들에게 서운하다는 건 보상을 바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투자와 같습니다. 결국 보살님이 투자를 잘못한 셈이니까 지금 상황은 모두 보살님 책임이에요. 누구도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할머니는 대가를 바라고 자식을 키우지는 않았다고 항변했습니다. 물론 겉보기에는 그랬을 것입니다. 자식 키우는 즐거움에 묻혀 그런 마음의 뿌리가 드러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나 이런 상황이 되면 마음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집착의 뿌리가 드러납니다. 참으로 무주상보시를 했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미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는 기대하지 않고 키웠다 쳐도 자식은 자식으로서 자기 할 도리가 있지 않아요? 그런데 이놈들이 자기 도리를 하지 않는데 그건 괜찮고요?”
저는 이쯤에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보살님은 앞으로 절에 다니지 마십시오. 예전에 부처님을 부를 때에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아들만 잘되게 해달라고 빌더니, 요새는 거꾸로 아들한테 벌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니 말이에요. 왜 부처님 이름을 부르며 이랬다저랬다 하세요? 오늘부터 보살님은 불자라고 하지도 말고, 부처님도 부르지 마세요. 자식을 원망한다는 건 내 계산으로 자식을 보살펴왔다는 겁니다. 영 자식이 미우면 차라리 ‘저 놈의 자식, 남이다’라고 생각하세요. 왜냐하면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은 우리가 원망하고 미워하지는 않잖아요.”

보살의 사랑은 자신의 욕심을 기준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한결같고, 상대가 내게 어떻게 하느냐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베풂에 있어 눈치를 볼 일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 주는 것만으로 보살은 이미 충분한 기쁨을 누리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처럼 사랑하기 어렵다면 차라리 자식을 남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매일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대신에 ‘저놈의 자식, 남이다’를 화두 삼아 마음을 다짐해 보는 쪽이 내 마음을 편히 다스리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할머니가 절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기도 보살 할머니가 법당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아니, 보살님 왜 이리 오랜만에 오셨어요? 그동안 부처님 못 뵙고 어찌 사셨어요?”
할머니 얼굴엔 미소가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저와 얘기하고 돌아간 그날 저녁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분함과 억울함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불자도 아니라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야속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길 가는 사람한테 물어봐라,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솟구쳐 올라 분을 삭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온갖 번뇌로 밤을 새니 다음 날 아침에는 몸이 아파 절에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를 빠지고 나니 웬일인지 정말로 절에 나가는 게 부끄럽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나마 탈출구였던 절마저도 갈 수 없게 되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답니다. 날이 갈수록 분노는 더 커져만 갔고, 이대로 살다가는 정말 죽을 것만 같아서 할머니는 저도 모르게 ‘저놈의 자식, 남이다!’ 하는 말을 염불처럼 중얼거리게 되었습니다. 속이 타서 죽을 것 같은 심정이 되자 지푸라기라도 잡듯 관세음보살 대신 ‘저놈의 자식, 남이다!’를 염불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날도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서는 아들을 보는 순간, 혈압이 치솟아 자기도 모르게 눈을 꼭 감고 ‘저놈의 자식 남이다, 남이다’를 되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정말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서 있더랍니다.
그 순간 할머니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그토록 집착하던 아들이 완전히 남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원망과 미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며 용돈까지 주는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세상 어느 누가 길 가는 낯선 이에게 이토록 고맙게 해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아들이 남으로 다가온 순간, 집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의 집에서 신세지는 사람처럼 설거지에 청소까지 도맡았으며, 자식들이 얘기를 나눌 때에는 방해가 되지 않게 슬며시 자리를 피해주기도 했습니다.

한 달 만에 절에 나온 할머니는 그날부터 공양간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소원이 자식들 다 크고 나면 절에서 공양주를 하는 것이었다고 하니 자식 덕분에 이제야 소원을 이룬 셈입니다.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고 나니 밉기만 하던 자식이 가장 고마운 존재가 되었고, 잊고 있던 소원도 이루어졌습니다. 할머니는 이제 누가 봐도 진정한 보살, 참으로 걸림 없는 이가 되었습니다.

깜깜하던 보살님의 업장이 녹아내린 것은 오직 자신의 간절한 염불 탓이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극한 처지에서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린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누구에게라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모든 일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행동으로 상대에게 도움을 주면 누구나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보살님은 한국에 간 것도 아니고, 자식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도 아니지만 당신의 깨달음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무주상보시의 공덕’입니다.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공덕을 성취하신 이분의 손을 잡고 저는 기쁨의 눈물을 함께 흘릴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머무르는 법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할머니든 젊은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교회에서든 절에서든 이 법은 평등합니다. 가난하면 몸으로 봉사할 수 있어 좋고, 돈이 있으면 시주할 수 있어 좋은 것처럼 베풂에 있어서도 차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불법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법을 공부하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불자들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금광엔 관심이 없고, 절에 와서 잡석이나 줍는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불법을 공부할 때 더 큰 욕심을 내길 권합니다. 마음을 머무르는 법, 금광을 찾아야 하지요. 이런 이치, 이런 소중한 보석을 찾는 것이 불법을 공부하는 참다운 목적입니다.

 

* 이 글은 월간정토 2019년 8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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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댓글 1개
  •  서정희 2019/09/03 14:53
    스님 잘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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