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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닥콩닥 윗동네 청년들의 이야기

박세미 월간 아난다 기자, 2014 봄경전반

2014년 8월 26일, 특별한 손님이 서초동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월간아난다 기자들도‘그분들’을 만나러 커피숍‘카페오공’에 갔다. 이른바 ‘윗동네 아랫동네 청년들의 콩닥콩닥 수다 쇼’. 이 수다 쇼는 청년리더십 아카데미(이하 청리아)의 통일 청년 소모임인‘콩닥콩닥’에서 준비한 행사였다.
이 행사를 주최한 서은실 법우는“청리아 수업을 통해 만나게 된 박○○을 통해 윗동네(북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북한의 청년들이 남한의 청년들과 고민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서로 이질감을 느끼고 있는 남?북한 청년들이 함께 소통하며 이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 좋겠다는 취지로 이 수다 쇼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라는 인사말로 행사의 문을 열었다.

수다쇼에 온 윗동네 청년 대표는 2003년에 탈북한 26세 박○○님, 박○○님과 탈북자 리더십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2007년에 탈북한 홍○○님과 2007년에 탈북하여 모 대학 법학과를 다니고 있는 25세 김○○님까지. 아리따운 여성 세분을 모시고 미리 뽑아온 질문들을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수다 쇼가 진행되었다. (※ 참가자의 신변 보호를 위해 실명과 자세한 지역 설명은 생략합니다)



 초등학교 때 남한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 행사가 있었어요. 그 당시‘남한은 자본사회라 돈이 없으면 죽는다.’라고 들었어요. 남조선 아이들은 불쌍하다고 생각했었죠. 편지도 통일이 돼서 불쌍한 남조선 아이들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썼었어요. - 홍ㅇㅇ

 

 

북한에서의 삶

Q 탈북하기 전까지 어떤 곳에서 살았고, 그 곳의 삶은 어땠나요?

박○○ 저는 중국과 국경이 가까운 곳에 살았어요. 추운 지역이라 힘들었지만 겨울만 되면 썰매 타고 놀았죠. 저희 때는 한국 드라마 CD가 있어서 드라마도 많이 보고 따라하고, 기타 치고 춤추며 놀았어요. 학교 마치고 친구들과 한국 드라마 보면‘한국은 잘 사는데….’라며 한국의 이미지를 꿈처럼 간직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결국 한국 드라마 CD가 발각되면서 집을 뺏기고 시골로 추방 당했죠. 시골에 가니까 피임 교육이 안 되어 있어서 한 집에 아이가 네다섯 명이고, 못 먹고 못 사니 저랑 나이가 같은 아이가 몸집이 무척 작더라고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시골은 농사도 감자와 옥수수밖에 못짓고, 공공농장이니 농사도 잘 안 되고, 1,2월에는 이미 먹을 게 다 떨어져서 감자 껍질을 말려서 가공해서 먹는 형편이더라고요. 전기도 없고, 접할 수 있는 매체가 없어서 완전 암흑 시대였어요. 결국 시골에서 4일 정도 살고 못살겠다고 친척집으로 도망쳤어요. 그 후유증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도 여기서 못살겠다 반항심이 들어서 중국에서 살려고 넘어갔는데, 처음에 상상했던 바와 너무 달라서 다시 북한으로 넘어왔어요. 겁도 없이 그랬죠. 나중에 계획해서 탈출을 해서 한국으로 왔어요.

홍○○ 저는 14살까지 북한 함경북도에서 살았어요. 오빠랑 중국으로 넘어갔고요. 북한에서 기억하는 것은 아빠가 소련으로 외화벌이를 다녀오셔서 고생은 많이 안 했어요. 굶고 살진 않았었죠. 학교 다닐 적 기억으로는 인터넷 같은 게 없으니까 친구들과 어울려서 순수하게 놀았던 게 그리워요. 북한에 있을 때 남한에 대해 몰랐고, 무척 먼 나라 같았어요. 초등학교 때 남한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 게 있었어요. 그때 당시‘남한은 자본사회라 돈이 없으면 죽는다’라고 들었어요. 남조선 아이들은 불쌍하다고 생각했었죠. 편지에도 통일이 돼서 불쌍한 남조선 아이들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썼었어요.

김○○ 제 경우는 부모님이 일본에서 이주해오셔서 사상이 노래요. 빨갛지 않고요. 밖에선 세뇌 당하고, 집에서는 반대되는 교육을 받아서 어렸을 적부터 혼란이 많았어요. 학교 생활에 적응이 안돼서 학교를 거의 안 나갔어요.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부모님 말씀이 정 반대니까요. 그래서 집에서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어요. 드라마를 따라하고 싶은데 북한은 규제가 너무 심한 거예요. 청바지를 입으면 잡아요, 미국제라서. 머리에 컬러 염색도 못해요. 옷도 규제를 해요. 어린 마음에 너무 불편했어요. 국가가 나를 간섭하는 게 싫었어요. 집에서 항상‘나 북한 떠날거야’라고 말하고 다녀서 아버지께서 항상 걱정하셨어요.

Q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신기하네요. 우리가 아는 북한이 아닌 것 같아요. 실제로 북한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을 만큼 사정이 안 좋은 것인가요?

김○○ 사전질문을 보고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한국에 온 지 8년이 되었더니 이제 북한에 대해 모르겠어요. 외부에서 볼 때 정권은 안 바뀌지만, 내부적으로 생활이나 생각은 계속 바뀌고어요. 여기서는북한을볼때‘독재정권’,‘ 핵’만보잖아요. 그런데 북한경제와의식은 변하고 있어요. 김일성이 죽고, 구소련이 망하고,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북한이 고립이 되면서, 95년부터‘고난의 행군’이라는 경제위기가 왔어요. 그때 300만 명이 죽었다고 해요. 그때에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요즘은 그때만큼은 아니에요. 박○○ 제가 돌아본 시골과 도시를 구분 짓자면, 중국과 가까운 지역은 살만하다고 보시면 돼요.

사회주의?공산주의라고 하면, 국가로부터 배급을 받아 사는 거라고 아시는데 이미 북한은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 상태에요. 국가가 배급을 주지 않고, 개인이 알아서 경제생활을 하는 상태지요. 농촌은 경제생활을 하기엔 영리하지 않아요. 그래서 살기 어렵고요. 제가 살던 곳은 바다를 끼고 있어서 외국 물건을 받았어요. 대한민국으로부터 쌀도 받았었는데, 대한민국이 뭔지 몰랐어요.‘ 남조선’이라고만알았으니까요. 아버지가“대한민국은 아랫동네야.”라고 말씀해 주셔서 알았어요. 유통의 길이 좋은 시나 군은 경제활동이 활발하다고 보시면 돼요. 평양을 보시면 평양은 살만하다고 하실 거예요. 보통 북한의 일반 도시와 평양은 10년 차이라고 보시면 돼요. 

쉽지 않았던 남한 정착기

Q 남한 정착기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꿈에 그리던 남 한에 왔는데, 적응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홍○○ 남한에 왔을 때 사람들이‘김일성, 김일성’하고 부르는 걸 보고 충격 받았어요.처음에는 ‘왜 김일성이라고 부르지?’하며 화가 났었어요. 그러면서 내가 세뇌를 많이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남한에 왔을 때 어려웠던 점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컸어요. 초중고 검정고시 후 대학에 들어갔는데 게임 문화 같은 것도 적응 안 되고, 수능 얘기 하는데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적응이 안 돼서 한 학기 마치고 휴학을 했어요. 한국 사회에 적응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북한에서 왔다는 시선이 느껴지니까 한동안 북한사람이라고 말 안 했어요. 조선족이냐고 그러면 맞다고 하고, 강원도에서 왔다고 하기도 하고, 한동안 숨기고 살았어요. 

김○○ 저는 남한에 혼자 왔어요. 학교를 가야겠다는 생각에 일반 고등학교에 가서 문을 두드렸는데, 학력테스트를 하더라고요. 고3 나이였지만 고1로 가라고 했어요. 교장선생님도 우리 학교에는 새터민이 없었다면서 불편해하시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담임선생님한테 북한에서 왔다는 것, 나이 속인 것 말하지 말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때 소녀시대와 빅뱅이 한창 나올 때였는데,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학교 공부는 뒷전이고 집에 와서는 연예인 검색하고 공부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렇게 3개월을 하니까 지치더라고요. 그래서 선생님께 하소연을 했더니 검정고시를 보는 게 어떠냐고 하셔서 학교를 그만뒀죠. 그런데 지금은 후회해요. 대학교 가서‘검시생’이라는 말을 듣고 상처받았거든요. 서럽더라고요. 대학교 가서는 2학년 될 때까지 새터민이란 걸 티안내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발각(?)이 되어서 해명을 하게 되었죠. 그때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많았었는데 그걸깰수있게해준게‘연애’였어요.


 

   남자친구에게“나 북한에서 왔어”라고 밝혔더니 남자친구가“그럼 난 평양에서 왔다! ”라고 했어요. 

  - 김ㅇㅇ





Q 드디어 연애 이야기가 나왔네요..!! 윗동네 청년들의 연애, 결혼 이야기 좀 해주세요.
김○○ 북한에서는 보통 17, 18세 때 이성에 눈을 뜨는데, 저는 대학교 가서 처음 이성에 눈을 떴어요. 처음으로 설레는 기분이 들었는데, 출신지를 속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어요. 나중에 남자친구랑 술을 먹고“나 북한에서 왔어.”라고 밝혔더니 남자친구가“그럼 난 평양에서 왔다!”면서 농담으로 넘어갔어요. 다음날 다시 한번‘나 진짜로 북한에서 왔다’고 고백했는데, 하루 정도 연락이 없어서 끝났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연락이 돼서 다시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죠.

남자친구가 그때“네가 북한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당당해져라. 난 상관없어.”라고 말해줘서 당당하게 연애할 수 있게 되었어요.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도 사귄지 5개월 만에 밝혔는데 상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사귀면 북한에 대해 물어볼 것 같죠? 아니요. 평소에 만나면 대화 주제가 비슷하니까 북한 사람 같지 않다고 해요. 의식을 하지 않으니까요. 인터넷에 북한에 대한 기사가 났을 때 만 물어보고 그래요.

홍○○ 저는 열두 살 때 동네 친구한테 연애쪽지를 받았거든요.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쪽지를 받았는데,‘ 강앞에서몇시까지만나자’해서만나고…. 선물 같은 거 주고 받은 기억이나요. 북한에 서는 사귄다는 표현을‘친하자’고 표현해요.

김○○ 북한에서는 여자들이 빨리 결혼을 해요. 남한은 여자가 사회적으로 할 게 많은데 북한에서는 결혼을 안 하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여자는 22, 23세 때, 남자는 27세 때 제대를 하면 결혼을 해요. 그래서 주로 5살 차이가 나는 커플이 많아요.

박○○ 북한에서는 연애를 하려면 데이트 코스도 없고, 숨어가면서 해야 하는데 친척들이 한 동네에 살아서 들키면 입소문이 다 퍼져요. 보통 학교 뒷산에 가서 데이트 하고….
결혼은 토속적인 방식으로 해요. 결혼하기 2~3개월 전부터 동네사람들, 친척들과 음식 준비를 해요. 집에서 상 차려서 하는데요, 부유층은 웨딩홀에서 하기도 해요. 일반 서민들은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차려놓은 상을 받고, 여자를 차에 태워서 남자 집에 가고, 남자 집에 가서 상을 받아요. 저녁에는 신부, 신랑 친구들 와서 축하하고 파티해요. 요즘에는 한국 노래도 많이 트는데, 크게 틀면 걸리니까 조용히 틀어놓고 밤새 놀고 그래요.

신혼여행은 없어요. 기차로 가면 전기가 부족해서 언제 목적지에 도착할지 몰라요. 차를 대절하기엔 그 정도 생활수준이 안 되고요. 집은 남자 쪽에서 사고, 여자들은 가사를 가지고 가요. 여자 쪽 친구들은 이불, 밥솥, 그릇 등 가사를 챙겨주고, 남자 쪽 친구들은 돈을 주는 축의금 문화가 있어요. 돈 없으면 부모님 집에 얹혀살며 시집살이를 하기도 해요. 돈만 있으면 집을 사고 나라에 등록만 하면 돼요.

Q 북한 청년들의 연애, 결혼 이야기를 들으니 낯설지가 않네요. 주로 북한 청년들은 어떤 고민들을 하며 사는지 궁금해요.

박○○ 남한 청년들이랑 똑같은 고민이에요. 취업하려고 고민하죠. 돈을 벌어서 내 삶을 꾸리려고 하고, 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먹고 살기 위한 고민은 똑 같은 거 같아요. 남한 사람들이 오히려 북한 사람들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통일되기 전에 사람 통합이 먼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홍○○ 남한에 와서‘행복’에 대해 많이 고민한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조금만 가져도 행복하고, 옥수수만 먹다가 쌀밥 먹으면 행복하고 그랬는데, 남한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의 아픔을 남한 친구들과 비교하면 부럽고, 나도 남한에서 태어났더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얘기해보니까 누구나 다 아픔은 가지고 있더라고요. 많이 누리는 게 행복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은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합니다.

김○○ 저는 남한에 와서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여권을 들고 북경에 갔는데, 탈북할 때 국적 없이 범죄자처럼 쫓겼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마음가짐이 달랐어요. 북경 공항에 들어섰는데, ‘내가 승리했다. 내가 살아남아서 여행객으로 왔다.’라는 뿌듯함이 있었어요. 지금의 어려움은 어려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누구보다‘궁핍함’을 안 느낄 거라는 건 자신해요. 어려움을 한번 겪고나니 조금만 더 생겨도 굉장히 기뻐요. 그리고 저는 현재 통일 강사를 하며 고등학생들 대상으로 북한에 대해 알리고 있어요. 지금 북한은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사상 교육을 하기 때문에 다른 거지, 통일이 돼서 교육을 다시 받으면 바뀔 거라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도 문화 적응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지금 어려움이 없거든요. 학생들에게는 주로 경제적인 측면을 이야기해요. 한 핏줄, 단군이야기안해요. 통일이되면얼마나잘살수있는지이야기해줘요.‘ 너희들의 미래일터는 북한이다.’이렇게 얘기해주면 좋아해요. 보람도 느끼고요. 

마지막으로 탈북자를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안 좋은 기사들이 떠요. 탈북자 2만7천 명 중에 2명만 감옥에 가도 욕먹는 거예요. 댓글에‘돌려보내’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건 총살당하라는 의미거든요. 누구나 잘못할 수 있는데, 안 좋은 것만 보지 마시고 열심히 사는 새터민들도 많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 이 글은 월간정토 2014년 1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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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댓글 1개
  •  신은진 2014/12/13 06:05
    윗동네 청년들의 이야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다시한번 느낍니다...모두들 힘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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