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를 불문하고 JTS 거리모금과 불교 대학 홍보 활동을 할 때는 항상 이 도반이 있습니다. 법당 안쪽 컴퓨터 책상에서도 늘 볼 수 있습니다. 화려한 장미나 국화처럼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잔잔한 들꽃처럼 늘 같은 자리에서 은은한 향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적극적이지만 수줍게 수행, 봉사, 보시를 실천하고 있는 원주법당 안상은 님의 수행담을 전해드립니다.

너무나도 소심했던 나

리포터의 인터뷰 제안을 몇 번이나 거절했습니다. 너무나도 평범해서 내놓을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설득에 문득 ‘수행자가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바꿔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유년 시절부터 결혼 생활까지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정토회를 만나 여러 수련을 거치면서 알게 모르게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담금질된 것 같습니다. 볼품없다 생각했던 나의 삶을 대중 앞에 드러내겠다고 결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에겐 아주 큰 변화입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인 남편을 만나 남매 두 아이를 낳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맞벌이를 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제 생활 속 어디에도 '행복'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늘 무언가에 쫓기 듯 동동거리며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 속에는 불만이 쌓여갔고, 피로가 누적되어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한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이러한 몸과 마음의 상태는 가족에게도 짜증 나는 말투와 표정으로 여과 없이 드러났고, 서로 사랑하고 격려해줘야 할 가족은 오히려 상처와 불편함의 원인이 되어갔습니다. 정토회를 다니면서 그제야 이 모든 것을 만든 것이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하나 참으면 된다

어려서부터 친정엄마에게 노래처럼 듣고 살아온 말이 '웬만하면 네가 참아라'였습니다. 이 말은 주문처럼 제 머리 속에 각인되었습니다. 매사를 나 하나 참는 것으로 문제를 마무리를 짓곤 했습니다.

엄하신 시아버님의 그늘에서 시어머님과 저는 가족의 평온을 위해 무조건 참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참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 속엔 불만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인지 갑자기 병환으로 몸져 누우셨습니다.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님의 병간호를 위해 저는 안정적인 직장을 과감히 그만두었습니다. 그게 벌써 20년 전 일입니다.

그러나 퇴사와 병간호로 갑자기 확 바뀌어 버린 제 삶은 저에게 무기력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병원과 집만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에 점점 지쳐갔습니다.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은 우울한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어머니는 15개월을 앓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시어머니는 손자들을 끔찍이도 예뻐하셨고 저에게는 늘 고생시켜 미안하다며 위로해주셨습니다. 힘들어도 티를 안 내려는 시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 거립니다. 그런 시어머님이 그리워 많은 날을 눈물로 보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집니다.

원주법당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는 안상은님.
▲ 원주법당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는 안상은님.

마음의 평온을 찾아 다니다

2002년에 새로운 마음으로 직장 생활을 다시 했지만, 상사와의 갈등으로 4년 만에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그 당시 경제 활동만이 제가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표라고 믿고 있었기에 퇴사는 저의 정체성을 뿌리까지 흔들어 놓았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왜 살아야 하나?’ 막막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버리듯이 살아가고 있던 차에 지인의 얘기를 듣고 우리나라 3대보궁 중 하나인 큰 사찰을 찾아갔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불교대학도 다니고, 봉사도 하고, 불교 합창단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답답함과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절 저 절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도반으로부터 들은 정토회 생각이 났습니다.

처음 원주법당을 찾아갔을 때, 정토회 법당은 기존사찰과는 완전히 다른 낯선 곳이었습니다. 불상도 없는 빈약한 법당의 모습에 의심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해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내었던 것이 정토회와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안상은 님은 집전, 영상, 거리모금 등 다양한 봉사에 소리없이 참여하십니다. 오른쪽이 안상은님.
▲ 안상은 님은 집전, 영상, 거리모금 등 다양한 봉사에 소리없이 참여하십니다. 오른쪽이 안상은님.

나와 마주하다

2014년 봄 불교대학을 시작으로 천일결사에 입재도 하여 수행법요집을 받아 매일 기도했습니다. 권위적이었던 시아버님은 자주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신 날이면 어김없이 신세한탄과 넋두리가 밤새도록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손자들에게까지 푸념 섞인 잔소리를 오랫동안 늘어놓으셨습니다. 그런 시아버님을 많이 원망 했었습니다. 그런데 소임을 맡아 사시예불 봉사를 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가족에 대한 시아버님만의 사랑표현이라는 사실을. 제 어리석음을 하나씩 깨달을 때마다 기도 중에 수없이 울었습니다. 눈물이 저절로 흘렀습니다.

중간에서 가족을 대변하려 늘 애쓰시던 시어머님을 생각하면서도 많이 울었습니다. 수행문, 참회, 보왕삼매론 등이 마음에 콕 콕 박히는 듯 와 닿았습니다. 수행을 통해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도반과 함께 집전 봉사하고 있는 안상은님. (오른쪽.)
▲ 부처님 오신 날, 도반과 함께 집전 봉사하고 있는 안상은님. (오른쪽.)

도망가지 못하게 나를 잡아준 소임

마음이 편안해지니 회계 담당 소임을 거쳐 원주정토회 팀장 소임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사시예불 집전과 경전반 집전 봉사는 제 마음을 가다듬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소임으로 인해 마음의 갈등이 생길 때도 있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끝내고 남편의 점심밥상까지 챙겨놓고 늦지 않게 법당에 도착하는 일은 언제나 마음을 바쁘게 했습니다. 그렇게 늘 서두르는 일이 불안하게 반복되다가 길거리에서 넘어져 손을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달여를 고생하면서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나의 서두르는 업식을 고쳐보자고.

그렇게 한 생각 돌이키고 나니 바쁜 일정은 오히려 좋은 수행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일과 사람 사이에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훈련은 어느새 제가 즐기는 놀이가 되었습니다. 소임이 복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소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수행의 길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과거처럼 괴로움의 늪 속에 빠져 괴로움의 원인도 모르면서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토회를 통해 수행자로서의 삶의 지표를 확실하게 가질 수 있어 하루하루가 새털처럼 가볍습니다.

제가 완벽하지 않음을 압니다. 아직도 경계에 부딪히면 넘어지지만, 넘어지면 일어나면 된다는 지혜를 터득했기에 조급해하지 않고 한 번에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삶의 이치를 확실히 깨우치고 나니 지속가능한 행복은 이상이 아닌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로의 전환은 저에게 이해와 배려심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수행, 보시, 봉사로 회향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꿈꿔 봅니다.

수행, 보시, 봉사로 회향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꿈꿔봅니다.
▲ 수행, 보시, 봉사로 회향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꿈꿔봅니다.


찬바람과 추위로 꽉 움츠러들고 땡땡해진 몸으로 종종걸음을 걸으며, JTS 거리 모금을 끝내고 법당으로 들어오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반쯤은 들뜨고, 또 반쯤은 열의에 찬 모습으로 소녀처럼 저에게 말을 건네던 안상은 님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계산되지 않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곱게 제 마음에 자리하고 있어서인지, 낯가림이 유독 심한 제가 몇 번이고 떼를 쓰면서까지 인터뷰 요청을 할 수 있었나 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수행ㆍ보시ㆍ봉사하는 삶을 누리시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글_진창욱 희망리포터(원주정토회 원주법당)
편집_신정아 (강원경기동부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