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법당에 늘 밝은 표정과 특유의 애살스러운 말투로 도반들을 잘 챙겨주는 분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엄마같이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주인공 양말내 님! 작년에는 남편분도 불교대학에 입학해서 부부도반으로 해운대법당에서 잘 쓰이고 있는 양말내 님의 이야기를 나누어 봅니다.

부처님 오신 날 해운대 법당의 마야부인, 양말내 님
▲ 부처님 오신 날 해운대 법당의 마야부인, 양말내 님

이 공부가 그 공부인가보다

저는 젊어서부터 절에 기도하러 다녔습니다. 정초에는 정초기도, 가족들의 안녕을 위한 관음기도,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지장기도는 꼭 갔습니다. 절에 가면 사시예불하고 천수경, 다라니경, 보문품, 약찬게를 독송하며 무슨 말인지 몰라도 무조건 돌돌돌 많이 외우면 다 잘되고 복 받는 줄 알고 열심히 했었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대학 입시를 앞두고는 5년 동안은 매일같이 입시기도를 다녔습니다.

아이 입시 결과 발표를 기다리며 사시예불 정근을 하던 어느 날, 절하며 몸을 낮추는데 ‘띠링’하고 문자가 왔습니다. 아이 대학 합격문자였습니다. 저는 펄쩍펄쩍 뛰며 “스님! 합격했대요!!”라며 좋아했습니다. 그때 그 절의 스님이 “보살, 이젠 공부를 좀 해보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기도만 할 줄 알았지 ‘무슨 공부?’라고 생각했고 뭘 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다 누가 읽어보라며 《법화경》을 추천해주어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전을 읽으면서도 ‘이 공부가 그 공부인가?’ 아리송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우연히 동영상으로 법륜스님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동영상 속 젊은 법륜스님의 열정적인 법문을 듣고 나니 마음이 편하고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동영상으로 법문을 듣다가 ‘이 공부가 그 공부인가보다’하는 생각이 들어 정토불교대학을 찾게 되었습니다.

통일축전에서 동기 도반들과 함께(왼쪽에서 두 번째)
▲ 통일축전에서 동기 도반들과 함께(왼쪽에서 두 번째)

살아남아야 했던 어린 시절

저는 12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임신하셨을 때 애를 떼려고 언덕에서 뛰고 구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마저도 딸이니 저는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축복받지 못한 아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린 나이였어도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비위를 잘 맞춰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어른들 말씀에 절대로 거역하지 않고, 심부름도 잘하고 가르쳐 주는 것도 열심히 배우며 영악하리만큼 예쁨받고 인정받는 행동들을 찾아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던 집안의 큰 어른인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가족들에게 집에서 제일 권력자가 누구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학교 가서 공부도 잘해야 했고 반장도 해야 했습니다. 늘 무언가 배우기를 갈구하고 앞장서고 잘해서 저의 두각을 드러내는 식으로 삶이 흘러갔습니다. 딸 수 있는 자격증이라는 자격증은 다 따고 주민자치센터, 재개발사업, 자치위원회, 입주자회 같은 지역사회 활동과 산악회, 신도회, 체육회 같은 각종 친목 활동에서도 책임 있는 역할을 맡으며, 있는 듯 없는 듯하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남들은 저보고 항상 에너지가 넘친다고 신기해했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를 잘 몰랐는데, 수행하면서 ‘처음부터 존재가 미미하다 보니 억눌렸던 것을 반전시켜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있었구나’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입재식에서 도반들과 함께(맨 오른쪽)
▲ 입재식에서 도반들과 함께(맨 오른쪽)

갑작스러운 결혼 후 찾아온 괴로움

1981년,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저는 외국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월급도 많았고 외국 바이어를 안내하며 그 시절 귀하다는 호텔도 많이 왕래하며 잘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외국인을 보는 것도 호텔에 가는 것도 쉽지만 그때는 외국인을 보기도 어렵고 호텔도 대중화되어있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버거스 병으로 고생하고 계셨는데 병세가 더 심해져서 “죽기 전에 막내딸 결혼하는 걸 보고 죽어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어머니가 원하시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부랴부랴 급하게 중매로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에 대해서는 시골 출신이고 아버지는 지역에서 덕망 있는 부농이고 본인은 차남에 고등학교 선생님이라는 정도만 듣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그 날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연배가 비슷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은 시아버님이 상처하고 새로 맞은 아내의 첫째 아들이고 남편 아래로 동생만 다섯명 있었으니 남편이 집안의 장남은 아니지만 사실상 장남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결혼 전부터 살고 있던 집을 신혼집으로 하게 되었는데, 거기엔 부산으로 공부하러 온 고등학생, 대학생 시동생과 직장 다니는 시동생이 이미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가부장적이고 저는 자유로운 성향이었습니다. 살아온 환경이 서로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결혼 전엔 정말 아쉬울 것 없이 활개 치며 잘 살았는데 원하지 않는 갑작스러운 결혼으로 좋아하던 일도 그만두게 되고, 남편과 성향이 맞지 않아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소연할 곳은 없고 ‘잘나가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단지 어머니가 아파서 이렇게 여기서 부억떼기처럼 살아야하나’ 하는 비참한 심정에 결혼하고 며칠을 내내 울었습니다.

경전반 졸업식 축하공연에서(앞 줄 왼쪽에서 4번째)
▲ 경전반 졸업식 축하공연에서(앞 줄 왼쪽에서 4번째)

도시여자, 시골남자

발랑 까진 도회지 여자하고 고지식하고 물정 모르는 시골 남자가 만났으니 당연히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시댁과 친정 양가 모두 형편이 여유 있는 편에 속했는데, 남편은 가진 것이 많아도 자꾸 비축만 하는 사람이었고 저는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쓰는 성향이었습니다. 신혼 때 남편은 석사 논문 준비로 정신이 없었고 아내가 뭘 하는지 관심도 없었습니다. 저는 저대로 바깥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결혼 전엔 제 생일이면 친구들 다 불러서 생일파티를 했었는데, 결혼 후에는 생일파티는 커녕, “맨날 오는 생일 뭐 때문에 그러노”라고 말하는 남편이었습니다. 분위기란 걸 모르는 남편은 그야말로 완전히 제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질세라, 반발심에 남편 한 달 월급되는 돈을 가져다가 생일파티로 써버리니 시골서 근검절약이 몸에 밴 남편 입장에서는 애간장이 탔을 겁니다. 결혼 전 직장에서 당시 저의 월급이 32만원이었습니다. 결혼하고 남편이 석 달 동안 월급봉투를 안 가져다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 월급이 18만원이었습니다. 그땐 교사 월급이 참 적던 시절이었습니다.

남편은 ‘여자는 당연히 이래야 한다’며 가부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여자 마음도, 분위기라는 것도 전혀 모르지, 월급은 적지, 논문 쓴다고 저한테 관심은 없고, 멋진 옷 입혀줘도 안 입는다고 고집 피우며 멋 낼 줄도 모르고, 가르치려 드는 벽창호 같은 남편이 다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밖에 나갔다 마음이 편해져 집에 들어오는 저에게 남편이 “몇 신데 이제 오노”라고 말하는 것도 참 싫었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저한테 여자가 밖을 좋아하고 자유분방하다고 “당신은 미국 가서 살아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차이가 크고 갈등이 많았습니다.

해운대 정초법회 안내소임 중인 양말내 님
▲ 해운대 정초법회 안내소임 중인 양말내 님

오직 다를 뿐임을 인정하다

남편과의 관계가 불편하고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아이들 교육에서부터 여러 가지 일로 자꾸 갈등이 생기니까 언제부턴가 남편에 대한 마음의 끈을 놓아버리게 되었습니다. ‘마이웨이, 신경 쓰지 말고 각자 가자’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밥을 안 주거나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의 역할은 하되,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은 남편 의사와 관계없이 그냥 했습니다. 물어봤자 부딪힐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뭐라 하든지 말든지 투명 인간처럼 무시했습니다. 그렇게 남편을 놓고 나니 오히려 편했습니다. 저도 바깥 활동으로 바빴고 남편도 학교 가고 보충수업으로 늦게 들어오고, 각자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드니 전보다 덜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늘 마음 한 켠에 남편에 대한 미움이 있었습니다. 젊을 때는 아이들 때문에 안 되지만 애들 다 키우고 나중에 늙어서는 황혼이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함께한 세월도 이제는 40년이 다 되어가고 스님 법문 들으면서 저도 많이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이지만 집, 학교, 집, 학교밖에 모르며 자기는 보충수업비로 용돈 쓰며 아내에게는 월급봉투 꼬박꼬박 가져다주는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촌스럽고 멋 낼 줄 모르지만 그만큼 검소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늘 먼저인 사람이라 아내로는 서운했지만, 시어머니께서 요양병원 계실 때 하루도 안 빠지고 조석으로 두 번 찾아가서 인사드릴 정도로 둘도 없는 효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을, 저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내 식대로 안 해준다'고 도외시했었습니다. 남편 입장에서도 자기 자리 찾으려 하는데 외향적이고 밖을 좋아하는 아내가 주도권을 안 넘겨주려 하니 남편 마음도 더 그랬겠다 싶었습니다.

이렇게 돌이켜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남편이나 제가 확 바뀌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서로 ‘마이웨이’하고 있습니다. 다만 통보정도는 해줍니다.(웃음) 사실 마음속에는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감정이 있지만 그냥 그 사람 자체를 인정하며 있는 그대로 봐줍니다. 젊어서야 서로 으르렁거리지, 나이가 들고 아이들도 결혼해서 다 나가니 서로 측은지심도 생기고 이젠 싸울 힘도 없습니다. 남편도 전보다 많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저를 많이 좋아합니다.(웃음) 저도 남편에게 더 따뜻하게 대해 주려고 합니다.

여행지에서 남편과 함께
▲ 여행지에서 남편과 함께

소임을 통해 얻는 기쁨

저는 소임으로 일요법회 담당과 주말 저녁예불을 맡고 있습니다. 일요법회는 시작한 지 1년 6개월 정도 되었는데 참여하는 분도 많아지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하며 안정적으로 자리잡혀 뿌듯합니다. 많은 도반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저녁예불은 보통 혼자서 하는데 부처님과 1대1로 오롯이 마주 보며 예불하는 순간에 마음이 경건해지고 부처님처럼 존귀해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소임 덕분에 부처님 전에 청수 한 번이라도 올릴 기회가 오니 참 감사하고, 예불하며 편안해서 참 좋습니다.

지금의 소임 전에는 두북울력 담당을 했었습니다. 두북울력은 한 달에 두 번씩 사람들을 모아 두북정토마을에 가서 그때마다 주어지는 일감들을 함께 합니다. 불교대학 동기들이 주축이 되어 함께 해주었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일감도 함께하는 즐거움이 있었기에 더 신이 났습니다. 특히 울력 가시는 분들 드실 음식을 준비해서 먹이고 좋아하는 모습 보는 것도 참 좋았습니다.

두북에서 처음 화광법사님을 뵈었을 때 생각이 납니다. 쪽을 진 법사님의 머리를 보니 순간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벌써 50년이 지나버린 여중생 시절, 학기 초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는데 저는 커튼 뒤에 숨었습니다. 다른 엄마들 보다 늙은 내 어머니가 부끄러웠습니다. 쪽을 지고 한복을 입고 오신 어머니가 왜 그렇게 부끄러웠을까요. 화광법사님 모습을 볼 때마다 아련히 엄마 생각이 나서 제가 더 두북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눔의 장>을 마치고 도반들과(가운데)
▲ <나눔의 장>을 마치고 도반들과(가운데)

당신이 있어 나도 있다

저녁예불을 하니 여름에는 해가 길어서 괜찮은데 겨울에는 해가 짧아 밖도 깜깜하고 넓은 법당이라 휑하기도 해서 법당에 남편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남편은 시어머니께서 절에 다닐 때도 모셔드리러 따라는 가도 부처님께 절은 안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남편과 법당에 같이 다니면서 제가 차츰 남편에게 “여보, 초를 한번 켜보세요”, “향을 한번 올려보세요”하며 하나씩 함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남편도 웬일인지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일요법회 법문을 두 번 정도 듣고는 불교대학에 입학하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는 같은 도반이 되어서 나누기도 하고 봉사도 함께 할 수 있어 좋습니다. 얼마 전 두북울력 봉사에 함께 갔다가 오는 길에 남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동네에서도 그랬는데 법당에서도 심복생(남편이름)이는 없고, 양말내 보살의 거사님만 있더라”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양말내는요, 심복생 씨가 있으니까 양말내가 있는 거예요. 남들이 하는 말 신경 쓰지 마소”하고 말하니 남편이 또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자존심 강하던 남편이 “나도 요새 많이 변했다. 니한테 잘해 줄라한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뭐가요, 잘 안 해줘도 되는데요”라며 웃습니다. 사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요?(웃음)

백령도 가는 배를 타기 전 남편과 함께
▲ 백령도 가는 배를 타기 전 남편과 함께


새벽예불부터 시작해서 5시간 동안 함께하며 주인공의 수행담과 삶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때론 눈물짓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주인공은 가볍게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주었습니다. “이 정도면 잘살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웃으며 인터뷰를 마치고, 다음 소임이 있어 나서는 주인공의 표정 속에서 행복이 아른거리는 듯했습니다. 사회활동과 가정일로 바쁜 와중에도 주인공은 법당에서 두루 잘 쓰이며 열정적으로 수행과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남편분과 함께 부부도반으로 ‘행복한 수행자’의 삶을 잘 이어나가시길 응원합니다.

양말내 님 인터뷰 날 새벽예불 함께 한 도반들과(오른쪽에서 세 번째)
▲ 양말내 님 인터뷰 날 새벽예불 함께 한 도반들과(오른쪽에서 세 번째)

글_노희동 희망리포터(해운대정토회 반여법당)
편집_방현주(부산울산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