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엘에이정토회 샌디에고법당에는 늘 대학생 같은 풋풋함과 순수함으로 굵직한 정토일을 척척 해내는 김혜진 총무가 있습니다.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정토회를 만나고 어느덧 수행자의 삶을 살고 있는 김혜진 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샌디에고 도반들과 한반도 평화 피켓행진 중 (왼쪽에서 세 번째 김혜진 님)
▲ 샌디에고 도반들과 한반도 평화 피켓행진 중 (왼쪽에서 세 번째 김혜진 님)

미국 유학생에서 투덜거리는 연구원으로…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 특별히 뭐가 되고 싶다거나 바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혼자 하는 일을 하고 싶다’가 유일한 바램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가끔 어머니께서는 회사생활은 못 할 것 같으니 선생님이 되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곤 하셨습니다. 아마도 남과 타협하는 것을 싫어하고 제 고집대로 하고 싶어 하는 제 성격을 보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오고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꿈꾸던 일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캘리포니아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바랬던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는 것과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남편과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연구소 생활은 스트레스가 너무 많았고 아이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이 지옥 같았습니다. ‘상사가 성격이 이상해서 그렇다’, ‘일을 너무 많이 시켜서 그렇다’, 늘 원망의 화살을 상사에게 돌렸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고 실제로 같은 연구실에 있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했고, 때문에 상사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 인간은 진짜 나쁜 인간이다’, ‘직원을 부당하게 대한다’ 라는 생각에 빠져들어 점점 더 저를 합리화했습니다.

그렇게 생활 하던 중 불교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2013년〈깨달음의 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의 경험들은 저를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을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당연한 줄 알고 아등바등했던 지난날들을 이제는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7년 문경에서 묘당법사님과
▲ 2017년 문경에서 묘당법사님과

그냥 마음이 그런 거야…

〈깨달음의 장〉에 다녀온 후 샌디에고 강연 총괄을 맡았습니다. 강연이 성공적으로 잘 끝이 났고 엘에이정토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바로 샌디에고법당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8차 천일결사를 시작하면서 법당 부총무를 맡았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보고 싶은 사람만 보고 살았는데, 법당 일을 하다 보니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간의 저는 저만 생각하고 살았지, 누군가를 챙긴다거나 주위를 돌아본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법당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야 할 것들 투성이였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법당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다 보니 그 힘듦에 대한 원망이 고스란히 상대에게 향했습니다.

그러던 중 2015년 뉴욕에 법륜스님이 오셨습니다. 그때 스님께 직장 생활에서 원하는 만큼 연구 성과가 안 나서 괴롭다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좌절이었습니다. 스님과 긴 대화 끝에 ‘그냥 마음이 그런 거야’ 라는 부분에서 비로소 제 마음이 숙여졌습니다. 제게는 정말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아, 그냥 마음이 그런 거구나! 아파하는 것도 내 마음이고, 좌절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것도 내 마음이다. 이 마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불안한데, 그냥 내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2017년 백악관 청원 캠페인 중 (오른쪽 김혜진 님)
▲ 2017년 백악관 청원 캠페인 중 (오른쪽 김혜진 님)

이후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 배우게 된 것은, 각자 맡은 역할에 따른 자기 입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사는 상사 입장에서 내게 일을 시키는 것이 당연했고, 데드라인이 있으면 당연히 재촉을 해야 했고, 연구비에 비해 많은 성과를 내야 경쟁력이 있어 연구비를 따 오는데 도움이 되니 성과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해하는 마음이 나기 시작하자 연구소 생활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아 사실은 내 마음이 불안해서 데드라인이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는구나, 사실은 내가 성과를 중시하니 마음이 쫓기는구나, 월급 주는 사람이 사장이고 월급 받는 나는 종업원인데 나를 사장처럼 대우해주기를 바라는구나.’ 조금씩 나를 이해하게 되면서 출퇴근하는 일이 전처럼 힘들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일 수 있었구나 …

내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아 늘 힘든 마음이 있었는데 2017년 1월 인도성지순례에서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인도에 도착해서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을 봐도 이미 예상을 하고 가서 그런지 별 마음의 동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르나트 다메크 스투파 뒤편에서 작은 남자아이를 만났는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아이는 수줍은 듯 다가와 손을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제게 뭔가를 얘기했습니다. 갑자기 이 아이가 나일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가 좋아서 구걸을 나왔을까?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다가오는 그 아이의 모습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여기 태어났었다면 나도 저렇게 구걸을 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았던 내 모습이 한심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수자타 아카데미를 방문하여 눈망울이 너무나 맑고 미소가 더없이 행복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아, 아이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굳이 내 아이를 갖겠다고 노력하며 괴로워했던 시간들이 부질없게 느껴졌습니다. 세상에는 이미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내가 내 아이를 하나 낳는다고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신기하게도 내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습니다.

인도성지순례중에 (가장 오른쪽 김혜진 님)
▲ 인도성지순례중에 (가장 오른쪽 김혜진 님)

법당 활동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보니, 이제는 뭐든지 저를 탓하고 있는 제가 보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문제고, 저것이 문제고… 그러다 보니 ‘너는 안된다.’ 하는 결론을 마음속에 갖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LA 정토를 일구는 사람들” 에 참석하여 선주법사님을 뵈었습니다. 그때 ‘성냥으로 산을 태우려고 하니 다만 지켜보기를 과제로 삼으라’는 말에 마음이 편안해 졌습니다. 그전에 저는 무언가 한 번에 되기를 바라는 마음, 연습 없이 바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 조급한 마음이 저를 몰아세웠던 것 같습니다.

정말 포기할 수 없는 아침 잠, 그러나....

미국에 유학 온 후 제가 바랬던 두 가지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도 없고, 제가 하던 연구 프로젝트가 없어지면서 직장도 정리해고되어 지금은 남편 월급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감사한 일입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수도 있었는데, 착한 남편 만나서 서로 이해해주면서 잘살고 있고, 제 월급은 없지만 먹고사는 데 지장 없는 남편 월급이 있어 제가 돈을 벌지 않아도 되니 정토회 활동도 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침잠이 많아 새벽 5시 기도는 절대 불가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매일 기도하면 되지, 뭐 꼭 5시에 해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제 게으름을 합리화했습니다. 이번 9-8차 입재식을 시작으로 5시에 일어나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선후배 도반님들 덕분입니다. 이제 막 정토행자가 된 것 같습니다. 막상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보니 지금까지 한 기도는 기도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정토회에 붙어있는 저 자신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해 줍니다. 사실 아직도 새벽 정진은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루 한 번만 하면 된다는 지도법사님 말씀을 새기며 쭉 가겠습니다.
내 인생의 희망이 되어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PEACE IN KOREA” 스크립스피어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김혜진 님)
▲ ”PEACE IN KOREA” 스크립스피어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김혜진 님)

글_김혜진 (샌디에고법당)
정리_백지연 희망리포터 (엘에이법당)
편집_박승희 (해외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