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어미를 위해서 정토회 근처에 집을 얻어야 한다”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남편. 그런 남편과 이혼을 하루도 꿈꾸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는 신성숙 님. 그 아름다운 변화의 수행담 이야기를 함께 합니다.

'나 정토회 다녀!'

2011년 1월, 오랜만에 나간 지인 모임에서 친한 언니를 보았습니다. 언니의 환해진 얼굴을 보고 저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며 물었습니다. 언니는 “나 정토회 다녀!”라고 했습니다. 언니의 그 한마디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작정 정토회를 찾았습니다. 평소에 신뢰가 두터웠던 직장 동료이기도 했고, 언니도 가정사로 무척 힘들어했었는데 환하고 편해진 얼굴을 보니 ‘분명히 무언가 있을 거야, 나도 언니처럼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하는 절박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즉문즉설 홍보에서 도반들과 함께 – 오른쪽 두번째 신성숙 님
▲ 즉문즉설 홍보에서 도반들과 함께 – 오른쪽 두번째 신성숙 님

한시도 이혼을 꿈꾸지 않은 날이 없었다

저는 결혼 생활 내내 힘들고 바쁘게 살았습니다. 종가 집 종손의 큰며느리로, 세 아이의 엄마로, 학교 교사로 직장에 다니면서 일 년에 11개나 되는 제사부터 시작해 종부로서 모든 집안의 일들을 전담해야 했습니다. 한 집에서 시어머니와 시동생 한 명과 함께 살면서 손 아래 시동생 세 명의 결혼까지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큰며느리 역할을 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것은 집안일에는 무관심하고 가부장적이었던 남편의 무뚝뚝함이었습니다. 남편은 저에게 칭찬 한마디가 없었고, 그런 남편과의 갈등은 결혼 생활 내내 정신적으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춘기의 세 아들까지 말썽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열심히 뒷바라지했는데 세 명 다 재수를 했고 다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아이들을 잘못 키웠다고 모든 원망을 고스란히 저에게 했고 술만 마셔댔습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으면서 미워했습니다.

쉰두 살 되던 해, 저는 갱년기와 맞물려서 극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운전을 하며 출근하는데 갑자기 극심한 공황장애가 왔습니다. 간신히 근처의 대학병원 주차장까지 운전해서 도착했는데 차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기절을 했습니다. 다행히 대학생들이 쓰러져 있는 저를 발견해 응급실로 데려다주었습니다. 병원에서 보호자 이름을 대라고 하는데도 저는 남편 대신 제 직장의 교장, 교감선생님 연락처를 드려서 그 분들이 오시게 했습니다. 끝까지 남편을 부르고 싶지 않았지만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남편을 불렀고 입원했던 내내 남편과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로 10년을 더 살았습니다.

늘 이혼을 하고 싶었지만 제가 이혼을 하자고 하면 성격이 불 같은 남편이 학교에 와서 난동을 피울 것만 같아서 실행하지 못했고, 대신 퇴직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는 ‘황혼 이혼’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2017년 12월 평화행진 대회에서 손녀와 함께
▲ 2017년 12월 평화행진 대회에서 손녀와 함께

황혼이혼 대신 수행을

저는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저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극복해보고자 새벽 예배, 금식 기도 닥치는 대로 5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5년이 지나서도 제 상황은 하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고 오히려 상황이 나빠졌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계시나?’ 하면서 신을 부정하게 되었고, 성당을 나가지 않게 되면서 저의 두려움은 더 커져만 갔습니다. 이 두려움은 그 후 4년간 지속되었습니다. ‘퇴직 날이 나의 이혼일이다’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며 남편에게 복수할 날만 기다리던 저는 운명처럼 퇴직하던 그 해에 “나 정토회 다녀! “ 하고 편하고 환해진 얼굴로 인사하는 언니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처음으로 나간 수요 법회에서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은 상대가 잘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고, 모든 것은 나에게서 나아가 나에게 돌아온다’라는 법문을 듣는 순간 이런 말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기 때문에 의아했습니다. 곧 돌이켜보니 한편으로 ‘정말 이 말이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JTS 안산 다문화센터 개원식에서
▲ JTS 안산 다문화센터 개원식에서

그 날부터 정토회에서 시키는 모든 행사에 참여했고 하루도 빼지 않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마음으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5 년 간 천주교에서 매달리고 해답을 찾으려고 했듯이 정토회에서도 절박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때, 기도와 수행을 하면서 천천히 깨닫기 시작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고통스러워했던 문제가 남 탓도 남편 탓도 아닌 내 탓이었다는 것을 온전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남편도 나처럼 힘들었겠구나’라고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저보다 먼저 공황 장애를 앓았고 지금도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훌륭한 사람인데 상대를 바꾸려던 내 어리석음이 남편을 힘들게 했구나!,’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2018년 8월 필리핀 민다나오 봉사_ 현지 원주민들과 옥수수농장에서
▲ 2018년 8월 필리핀 민다나오 봉사_ 현지 원주민들과 옥수수농장에서

정토회에서 만난 자유로움, 나

정토회를 다니면서 존재 자체는 이렇다 저렇다 할 것이 없는 자유로운 것임을 오롯이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졸업하고, 통일기도 천일 담당을 하고, 집전을 배우면서 사시기도도 담당했습니다. 법당에 일주일 중 4일을 나옵니다. 요즘에는 천도재의 목탁 바라지도 맡았습니다. 법당에 나와 쓰이는 것이 집에 있는 것보다 더 좋습니다. 지난 2018년에는 8월 24일부터 10월 21일까지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두 달 동안 봉사를 하고 왔습니다.

여전히 무뚝뚝한 남편이지만 제가 법당에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참견을 하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집사람이 정토회에 다닌다고 자랑을 하고 다닐 정도입니다. 최근에 집을 이사해야 했는데 아들 내외에게 “니 어미를 위해서 정토회 근처에 집을 얻어야 한다”라고 신신당부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필리핀에 봉사를 가는 저의 건강을 염려해 손수 건강식품도 챙겨주었고, 필리핀에서 돌아오는 날 공항에서 나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무뚝뚝하다고만 생각했던 남편이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를 새삼 느꼈습니다.

민다나오 봉사는 예전부터 사회활동에 관심이 많아서 염두에 두고 있었고, 공동체 생활에 대한 동경이 있어서 자청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규칙적이고 정제된 그 곳 생활이 저하고 정말 잘 맞았습니다. 통신도 안되는 깊은 산속에서 오롯이 나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곳에 자라는 풀도 나도 똑같은 존재임을 느꼈습니다. 작지만 어딘가에서 잘 쓰일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일수행중이신 신성숙 님
▲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일수행중이신 신성숙 님

마지막으로 수행을 하루도 안 빠지고 하신 신성숙 님 만의 비결을 여쭤보았습니다.

“저에게 정토회가 없었다면 이미 우리 가족은 모두 흩어져 풍비박산이 났을 겁니다.” 그래서 절실하게 수행을 했습니다. 만약에 기도가 하기 싫은 분이라면 그분이 처한 상황이 그리 절박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는 데 있어 ‘몸이 아프다’는 핑계는 저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제 하루의 시작이 수행이기에 몸이 아프면 병원 가면 되고 나이 들어서 더 이상 못 움직이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됩니다.”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도반과 함께 가운데 신성숙 님
▲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도반과 함께 가운데 신성숙 님


신성숙 님은 올해 정토회에서 수행한 지 8년 만에 서원행자가 되었습니다.
“수행을 통해 내가 행복해졌으니 이제는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일에 잘 쓰이겠습니다.” 하며 환하게 웃으시는 신성숙 님을 보면서 한번 더 ‘수행의 힘’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글_박문구 희망리포터(서울정토회 서초법당)
편집_권지연(서울제주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