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환한 얼굴로 수행, 보시, 봉사를 골고루 실천하며 몸을 사리지 않는 최주영 님을 만났습니다. 리포터가 불교대학 모둠장일 때 보았던 최주영님은 조용하고 소극적이었습니다. 수행에는 더 관심이 없어 보였던지라 그 당시에는 지금의 모습을 상상도 하지 못했답니다. 인터뷰 내내 주인공은 활짝 웃으며 정토회와 함께한 시간을 풀어 내놓았습니다.

JTS 캠페인 중인 최주영 님 (왼쪽 두번째)
▲ JTS 캠페인 중인 최주영 님 (왼쪽 두번째)

Q. 정토회와 인연이 된 계기는?

‘다음 생애가 있다면 다시는 고통스러운 인간세계에 태어나지 않으리라. 구름이 되어 아무 생각 없이 떠돌아다니리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는 것이 지치고 괴로울 때면 하소연하는 친구가 있는데 어느 날 그 친구 따라 법륜스님 즉문즉설 콘서트에 갔습니다. 질문할 때마다 법문을 하는 스님의 지혜로움에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그때부터 유튜브로 나와 비슷한 처지의 법문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정토불교대학 현수막을 보고 무작정 입학했습니다.

Q. 정토회를 다니며 좋은 점이 있다면?

만남입니다. 불법과 수행하는 도반들과 만남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기념으로 수행을 하면서 어제의 나를 되돌아보고 오늘의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화나는 일이 생겨도 그 ‘화’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점점 얼굴이 밝아진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한 명의 친구만 있어도 인생이 성공이라는데, 많은 도반과 인생 문제, 불법, 통일, 환경에 대해 마음을 나누니 나는 복이 많은 사람임을 느낍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을수록 아는 만큼 달리 들리니 하루하루가 축복입니다.

거리모금 중인 주인공
▲ 거리모금 중인 주인공

Q. 그동안 맡았던 소임에 대한 소감은?

하기를 잘했다 싶어요. 소임이 주어지면 왜 ‘예’하고 해야 하는지 조금씩 알게 됩니다. 소임은 고마움입니다. JTS거리모금담당, 가을불교대학 모둠장, 가을불교대학 부담당, 행복학교 장소제공, 통일축전 부스담당을 했고 지금은 봄 경전반 담당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불교대학을 다닐 때 봉사시간이 부족해서 억지로 나간 JTS거리모금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거리모금이나 전단지 돌리는 분들을 피해 다니다가 내가 거리모금을 하게 되니 부끄럽고 민망하여 1시간 내내 거의 울다시피 했습니다. 같이하던 도반이 “왜 우냐”고 핀잔 줄 정도였습니다. 도반 따라 울먹이며 외치는데 물건 배달하던 낡은 옷을 입은 아저씨가 꾸깃꾸깃 접힌 돈 5천원을 넣어주었습니다. 충격이었지요. 쇼핑가방 들고, 음료수를 먹으며가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20분 동안이나 외쳐도 아무도 보지도 않는데 장애인이 천원을 넣어주던 일, 아이는 돈을 넣고 싶어서 조르는데 어머니가 안된다고 끌고 가던 일... 그런 모습에서 나를 되돌아보고 반성했습니다.

JTS거리모금담당을 했을 때는 미리 법당에 가서 준비하고 차에 싣고 내리고 봉사자들을 챙기고 사진 찍고 법당에 가서 다시 결산하고 소감을 적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까지 해왔던 담당자들의 수고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처음엔 모금액을 많이 모아야지 했는데 하면 할수록 마음가짐이 겸손해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천 원이면 두 명의 아이가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외칠 때 올라오는 깊은 내면의 울림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입재식 때 카드섹션 공연
▲ 입재식 때 카드섹션 공연

그리고 지금도 내 인생의 기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9-6차 천일결사 입재식 축하공연 카드섹션 준비물 만들기입니다. 다들 하루 만에 완성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반들과 함께하니 하루 만에 다 완성되어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연습하고 또 하면서 단합하니 그 기쁨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불교대학 졸업식 때도 공연을 다시 했는데 지금도 그 추억이 꿈만 같습니다.

카드를 만들고 있는 주인공과 도반들
▲ 카드를 만들고 있는 주인공과 도반들

Q. 과거 어떤 괴로움에 힘들었고 어떤 계기로 가벼워졌는지?

친정아버지는 자랄 때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형의 정도 받지 못했는지, 무척 엄격하고 무서웠습니다. 아버지가 계실 때면 TV도 못보고 전화도 하지 못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어릴 때 죽을병에 걸려 독초를 먹고 바보처럼 된 어머니와 첩으로 들어온 둘째 어머니의 핍박 속에서 힘들게 살다가 결혼을 했답니다. 남편과 살기 어려웠지만 자기 자식들은 절대로 계모 밑에서 자라게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산 분입니다.

엄격한 아버지와 억눌려 살던 어머니 밑에서 그래도 밝고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내 소원은 자유롭게 TV를 실컷 보면서 전화도 마음대로 하며 사는 거였습니다. 대학 4학년때 만난 남편이 나를 무척 사랑해주고 또 내가 아니면 죽는다고 해서 집에서 빨리 해방되고자 하는 마음에 반대하는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은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시부모와 함께 월세로 방 두 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막상 결혼해보니 주말마다 시집에 가서 시부모와 한 방에 자야했습니다. 나는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막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한번도 안해 보고 결정한 결혼생활은 힘들었습니다. 나의 결혼생활의 그림은 화가인 남편 옆에서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며 자유롭게 전화도 하고, 쇼핑도 하며 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쥐약이었습니다. 연달아 생긴 아들과 딸, 그리고 미술학원 운영은 쉽지 않았습니다. 장난꾸러기 아들은 자주 다쳤고 그림을 사랑하던 남편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작업을 했습니다.

가을 불교대학 수업 중 (앞줄 오른쪽 세 번째)
▲ 가을 불교대학 수업 중 (앞줄 오른쪽 세 번째)

남편과 같이 운영하던 학원은 아주 잘 되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한 번도 안 해보고 학원 운영을 해보니 조금만 힘들어도 죽을 것 같았습니다. 친정에서의 탈출이 이렇게 더 힘들 줄 몰랐습니다. 매년, 매달 반복되는 운전기사와 강사 채용, 늦게까지 만들기를 준비하고 재료를 사야 하는 일상, 집에 가면 또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탈출 시도는 남편을 교수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 덕을 보고 싶었습니다. 남편을 대학원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림과 시부모를 사랑하던 남편은 욕심 많고, 시집에 대해 계속 불평만 하는 내가 싫어진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시집에 생활비를 드리고 학원 일에 최선을 다하고 아들딸 잘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도 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사랑스러운 아내를 원했지 억척스럽고 욕심 많고 입만 열면 시집 욕을 하는 아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원을 간 남편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대학 강의를 나가면서 더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더 표독스러운 마누라가 되어갔습니다. 남편은 또 다른 미술학원을 하나 더 한다고 통보해왔습니다. 안된다고 했지만 나를 끌고 가 보증을 세우고 돈을 빌려 학원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벌써 17년이 넘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과 5학년이던 딸이 벌써 29살, 27살이 되었으니 그 세월이 꿈만 같습니다.

동북아역사기행에서 기념촬영 (왼쪽 두 번째)
▲ 동북아역사기행에서 기념촬영 (왼쪽 두 번째)

자존심 강하고 잘났던 내가 이렇게 살아가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낮에는 미친 듯이 학원 일을 하고, 밤늦게 눈을 뜨는 날은 흐느껴 울었습니다. 내 인생이 불쌍해서 정신과를 찾아가 상담 받고 우울증 약을 먹었습니다. 그 약을 먹으니 슬픈 것도, 기쁜 것도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달을 먹다가 약을 끊었습니다. 대신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른 새벽 법당에 가서 기도하고, 법당 청소하고, 공부도 하고... 순간순간 괴롭고 부모님께 미안했습니다.

다행히 아들딸은 잘 자라주었습니다. 지금 전자공학 의료기계통 박사인 아들은 한양공대를 합격했는데도 엄마가 자기 뒷바라지하면 힘들까봐 경북대에 붙었다고만 말했습니다. 딸이 1년 뒤에 대학교에 합격하니 사실 한양공대에 붙었지만 엄마에게 부담될까봐 말하지 않았다고 했던 대견한 아들입니다. 딸도 미대를 나와 뉴욕디자이너가 되고 패션연구원에도 다니고 지금은 융합섬유대학원에 입학합니다. 스스로 학비를 모아서 공부합니다. 감사합니다.

Q. 특별히 생각나는 일이나 사람이 있다면?

인도 성지순례 때 박영미 자매, <깨달음의 장>돕는이 박분숙 부총무, JTS거리모금 담당에 함께 해준 도반 박정미 님, 가을불교대학 담당자 김순이 님, 자활담당자 김민숙 님, 행복학교 이임숙 님입니다.

학원의 토요반 수업을 정리하는데 경전반 졸업 때쯤 인도 성지순례를 더 늦기 전에 가보자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성지순례를 떠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깨어있지 못해 비행기 시간을 착각했습니다. 오후 12시를 밤 12시로 착각해서 박영미 자매와 저만 인천공항에서 못 떠났습니다. 하루 늦게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인천공항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70세가 된 영희 언니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네요. “택시를 타고서라도 인도에 가야지요!”. '그래, 가자! 어떻게 마음 낸 순례길인데.' 찜질방에서 108배를 하고 세 명이 힘을 합쳐 델리 공항, 바라나시 공항, 바라나시 숙소까지 긴 여정의 여행을 함께 했습니다.

인도 성지순례에서 최주영 님(앞줄 왼쪽)
▲ 인도 성지순례에서 최주영 님(앞줄 왼쪽)

자활담당자 김민숙 님은 양파껍질 같습니다. 천일결사입재식공연의 카드섹션연습이 힘들어서 안된다고 얘기해도 웃으면서 재료를 사비로 준비했습니다. 온종일 스케치북을 펴놓고 같이 그림 그려주며 다독거리고 모든 공덕을 우리에게 돌리니 공연 준비 할 때 웃으며 끝까지 열심히 할 수 있었습니다. 법당에서 새벽기도 후 콩나물국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전법 달리기 할 것을 조용히 얘기했습니다. 그 후 조끼를 제작하여 같이 입고 전법 달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법 달리기에서 (왼쪽 첫 번째가 최주영 님, 세 번째가 김민숙 님)
▲ 전법 달리기에서 (왼쪽 첫 번째가 최주영 님, 세 번째가 김민숙 님)

Q. 정토회 수행하면서 달라진 점이나 주변의 반응은?

여전히 감정 기복이 심하고 잘난 '나'와 억울한 삶을 놓지 못하지만 그때마다 왜 화가 나는지 왜 내가 억울하게 생각하는지를 떠올려봅니다. 그 화가, 그 잘난 내가, 억울한 삶이 내가 만든 것임을 수행을 통해 깨닫습니다. 쥐약을 먹고도 쥐약인 줄 몰랐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됩니다. 나 자신조차 그런 나를 보고 놀랍니다.

행복과 성공의 기준도 변해갑니다. 타인의 행복과 성공을 함께하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봉사를 하고 잘 쓰이니 내가 더 좋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편안하게 경청하고 순간순간 깨어있으니 어머니, 아들, 딸, 친구들 모두 옆에 있고 싶어 하고 나를 사랑해줍니다. 찾아와서 수업하는 꼬마화가들의 미소가 아름다워 보입니다. 학부모들도 편안하게 대해줍니다.

Q. 특히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나 수행담은?

최근 <나눔의 장>에서 도반들과 나눔을 통해 내 밑바닥에 묻혀있던 무의식 세계를 보았습니다. 늘 나만 힘들었고 자식들에게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나눔의 장>을 다녀오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곁에서 지켜보았을 아들과 딸의 가슴 아픔, 효자이면서 그림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던 남편이 한 번의 잘못으로 자식들에게 적대시 당하며 미움받던 가슴 아픔, 그리고 그런 아들을 지켜보는 시어른들, 손자 손녀를 당당하게 보지 못하는 시어른들의 가슴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절로 고개숙여 참회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었던 내가 좋습니다. 수행과 봉사를 통해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경험을 합니다. 정토회 봉사라면 무조건 하고 싶습니다. 불법을 만나 수행 보시 봉사하는 지금의 삶이 가장 감사합니다. 새벽마다 살아있음에 감사 기도를 합니다.


그동안 괴로웠던 삶이 지금 잘 쓰이기 위해 지나온 축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오늘의 주인공 최주영 님. 세상을 보는 관점에 따라 봉사가 일이 아니라 기쁨이 되고, 원망이 아니라 감사가 되어 행복한 삶에 미소짓는 최주영 님의 환한 얼굴이 깜깜한 밤, 어둠을 밝혀놓았습니다.

글_김화숙 희망리포터 (대구정토회 대구법당)
편집_강현아 (대구경북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