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교법당 부총무님은 저녁부 책임팀장인 조인숙 님을 일컬어 상대를 먼저 품을 줄 아는 큰사람이라 말합니다. 주·야가 화합되는 것도 조인숙 님 덕분이라고요. 그런 도반의 상찬에 자신은 그저 정토회를 만나 얻은 것이 너무도 커서 받은 만큼 나누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낮추는 조인숙 님. 5개월 전 부총무님의 수행담과 함께 전하려다 분량이 넘쳐 아껴두었던 그 눈물겨운 수행담, 지금 나눕니다.

하동 쌍계사에서 조인숙 님
▲ 하동 쌍계사에서 조인숙 님

인연의 시작, 화병(火病)!!

2009년 즈음 동료 교사들은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한의사 남편에 호주에서 유학하고 있는 딸, 그리고 듬직한 아들까지 두었으니 세상을 다 가졌다고요. 하지만 그때 정작 저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거듭되는 고부갈등, 저를 향한 시누이의 이해할 수 없는 패악질, 거기다 평소엔 더없이 다정한데 시댁만 다녀오면 돌변하는 남편까지. 어떻게든 풀고 잘살아 보려고 부부 상담을 5년이나 받아오던 참이었지만 제 안에 들어앉은 불덩이는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다 결국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파 휴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렀지요. 화병(火病)! 신혼 초부터 차곡차곡 쌓인 억울함이 화병이 되어 저를 삼켜버린 것이었습니다.

그즈음 당시 울산법당에서 불교대학을 담당하고 있던 친구가 입학을 권유해 왔지요. 당장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데 불교대학이라니! 처음엔 어이없고 가당찮은 말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정성스럽게 권하던지, 나중엔 이대로 안 가면 친구에게 미안하겠다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남편에게까지 닿아 2009년, 우리 부부는 함께 불교대학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경전반에 올라가면서 수행과 봉사의 맛도 조금씩 알아가고, 몸도 점차 회복되니 이제 좀 살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살았다 싶은 순간 천지가 뒤집힐 일이 생기더군요.

살았다 싶은 순간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린 딸!!

돌이켜보면 정말 어리석게도 저는 딸이 보낸 숱한 구조 신호를 놓쳤습니다. 과하게 공부 욕심을 부려도 강한 아이이니 넘어설 거라 믿었고, 고3이 되어서도 상위권을 유지했기에 타국에서 잘 지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이상을 감지했을 때, 이미 딸은 임계점을 넘어버린 뒤였습니다. 국제전화를 붙잡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저에 대한 원망을 끝없이 토해내던 딸. 매일매일 어찌나 아프게 후벼 파던지 딸에게 들볶여 이대론 내가 죽겠다 싶고, 딸도 잃겠다 싶어 제발 들어오라 사정을 해도 딸은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꼭 거기서 성공해야 한다고 눈물바람으로 버텼었지요. 그러던 즈음 방학이니 학업에 지장 없다고 겨우겨우 설득하여 딸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귀국 직후 전문의에게 딸의 상담치료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저는 법당에 나와 새벽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딸을 놓치지 않으려 몸부림치던 그 순간에도 딸의 고통보다는, 시댁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너까지 왜 이러느냐고, 내 안의 억울함만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았습니다. 겁에 질린 어린 딸의 눈동자를요!

보수법사님과 함께 한 <일상에서 깨어있기> 단체사진 (앞줄 맨 왼쪽이 조인숙 님, 맨 오른쪽이 남편 정병태 님)
▲ 보수법사님과 함께 한 <일상에서 깨어있기> 단체사진 (앞줄 맨 왼쪽이 조인숙 님, 맨 오른쪽이 남편 정병태 님)

아가, 엄마가 미안하다

시댁과의 불화로 고통받던 제 곁엔 늘 어린 딸이 있었지만 저는 미처 아이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시누이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돌아온 날도 그 괴로움을 똘똘한 아이를 통해 위로받으려 했을 뿐 충격받았을 아이 마음을 품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어미 마음을 민감하게 알아채고 어미의 기쁨이 되려 했던 딸. 그렇게 어린 것이 제 힘든 마음을 누르고 부모를 기쁘게 해주려 애를 쓰다가 병을 키운 것이었음을, 저는 그제야 통곡하며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딸에 대한 원망 없이 딸을 품어서인지 5주간의 방학을 보내며 딸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습니다. 하여 다시 학교로 돌려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이가 간절히 원하고 저는 저대로 설마 여기서 더 안 좋은 일이 있겠냐 싶어 졸업이나 하라고 보냈었지요.

락(樂)이 곧 고(苦)! 진실로 즐거움이 고통 되더라!!

호주로 돌아간 딸은 놀랍게도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한국인은 우리 아이 하나밖에 없던 고등학교에서 현지인도 엄두를 못 내는 의대에 진학한 것이라 지역신문에 날 정도로 떠들썩했지요. 그러나 기쁨도 잠시, 딸은 의과대학에 입학한 지 반년 만에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과도한 학업량과 경쟁에 지쳐 에너지가 다 소진돼버린 것이었지요. 그렇게 학교를 중퇴하고 영구 귀국한 뒤, 딸은 문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포기란 말을 금기시하며 성공에 욕심내던 딸이었기에 자기 인생은 끝났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런 딸을 밖으로 이끌어 치료를 받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진짜 문제는 제 안의 번뇌였습니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가 감당하기에도 너무 많은 돈이 들었고, 상담 치료의 특성상 눈에 띄는 진척을 보이지 않는 것도 괴로웠습니다.

막막함 속에서 만난 등불, <일상에서 깨어있기>!

단단히 각오하고 시작했는데도 진전없는 치료에 지쳐갈 즈음, 저를 일으켜 세운 건 남편이었습니다. 하루라도 한의원을 비우면 큰일 나는 줄 알던 사람이 <깨달음의 장>에 다녀오더니 <일상에서 깨어있기> 수련을 가겠다고 하더군요.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을 내주고 <일상에서 깨어있기>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하겠다던 남편. 그때 전 그것이 뭔 줄도 모르면서 남편을 따라나섰습니다. 집에 있으면 답답하니 함께 가겠노라 했지만 사실 저를 움직인 건 조금씩 변해가는 남편에 대한 감동이었지요. 그리고 어찌 보면 당연한 깨달음 하나! 내 목숨보다 더 귀한 내 자식을 나처럼 목숨 바쳐 지켜줄 단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남편임을 온 마음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상에서 깨어있기> 수련이 어느덧 9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저는 수련 공양팀장으로 남편은 내부봉사를 하며 <일상에서 깨어있기> 회향 프로그램에 꾸준히 참여한 이유는 수련 첫날부터 얻은 것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울산에서 문경이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한번 경험이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참여했던 첫날, 저는 어둠 속에서 등불을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아픈 딸에 대한 근심을 보수법사님 앞에서 풀어내니 우선 당장 숨통이 좀 트였으니까요. 심리 치료에 지친 딸이 값비싼 가방으로 힘든 마음을 채우려 했을 때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고 딱 중심을 잡아주신 보수법사님! 그렇게 점검받고 일상으로 돌아온 저는 명품가방을 안 사주면 죽겠다는 딸의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배운 대로, 성냄 없이 딸의 원망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미친 듯이 요동치던 딸의 마음이 잦아들더군요. 그렇게 <일상에서 깨어있기>의 힘을 체험한 뒤 저는 죽기 살기로 수련에 임했습니다. 공양간에서 10년을 봉사하면 곰도 사람이 되어 나온다기에 공양간 봉사 10년의 원을 세웠습니다.

2018년 9월 <일상에서 깨어있기> 공양간 봉사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조인숙 님)
▲ 2018년 9월 <일상에서 깨어있기> 공양간 봉사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조인숙 님)

그러나 숙이고 또 숙였는데도 끝없이 올라오던 억울함!

보수법사님은 그런 제게 가진 것이 많으니 감사하라고, ‘오직 감사할 뿐’이라는 명심문을 주셨지만, 저는 그 명심문을 온전히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참고 사는지 아시냐고, 법사님이 우리 집에 와서 한번 살아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라고 대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보수법사님 앞에서 억울하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입이 딱 닫혔습니다. 끝없이 원망하는 제 모습이 딸의 모습임을 자각한 것입니다. 딸이 아니라 내 문제임을 자각하니 희망이 생기더군요. 제 안의 억울함을 풀어내면 딸도 해낼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을 잡고 제 안의 억울함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 방편이 보시고 봉사였기에 저는 <일상에서 깨어있기> 외에도 불교대학 담당을 맡아 낮에는 중학생들 가르치고, 밤이면 불교대학 학생들 먹일 떡을 한 시루씩 이고 울산법당으로 향했습니다. 그즈음 남편도 새벽기도 집전 10년의 원을 세웠고, 그렇게 우리 부부는 함께 새벽기도 담당을 맡아 서로를 격려하며 정진해나갔습니다. 두북정토마을에서 <일상에서 깨어있기>가 열릴 때는 바라지 장보기까지 도맡았지요. 새벽기도를 올린 뒤 새벽시장에서 남편과 함께 콩나물 한 시루, 두부 한 판, 과일, 감자 등 부식꺼리를 사면서 어찌나 재미나던지 현물 보시하는 비용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보시와 봉사를 하면 할수록 자기 시간과 재물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을 남편이자 도반으로 두었으니 여기서 더 무엇을 가지랴 싶었습니다.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던지 저를 귀하게 여겨주더군요. 그렇게 현물 보시와 공양간 봉사가 몇 곱절의 복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느낄 즈음, 제 안의 모순 하나가 잡혔습니다. 현금 보시는 선뜻선뜻 못하면서 현물 보시는 하나도 아깝지 않으니 이 무슨 조화인가 싶었던 것입니다.

사천왕사지 기도도 부부가 함께 합니다.
▲ 사천왕사지 기도도 부부가 함께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잡은 괴로움의 실마리!

그제야 저는 제 무의식에 박혀있던 돈에 대한 집착을 자각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모습!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장이 되어야 했던 우리 아버지는 자린고비란 평을 들었던 분입니다. 9남매의 장남으로 동생들 먹이고 처자식 거두려면 알뜰해야 했기에 돈을 아꼈던 것인데, 그것이 습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아버지도 음식을 베푸는 것은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 받는 막내딸이었기에 저 또한 돈을 아끼는 것을 당연시했던 것인데, 결혼이라고 해서 보니 살림은 무능한 부모 대신 잘난 둘째 아들이 다 책임지고 있고, 형님에 동생들까지 건사하고 있으니 아무리 참고 이해하는 시늉을 해도 돈에 대한 집착을 부리는 제 무의식에선 힘들고 억울한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비 없이 제 마음을 이해하며 장막을 걷어내니 또 다른 장막이 나오더군요.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얽힌 실타래에서 실마리를 찾아 실패에 감듯, 봉사를 동력 삼아 계속 제 마음을 관찰하다 보면 언젠가 그 장막도 걷힐 것을 믿었으니까요. 그러던 즈음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친구가 사고로 그만 딸을 잃는 것을 보고 저는 딸에 대한 욕심을 다 놓아버렸습니다. 아이를 잃고 죽을 지경인 친구를 위로하며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나누던 그 밤, 제 안에 남아 있던 딸에 대한 집착이 뽑혀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제 마음에서 욕심이 녹은 것을 딸이 알더군요. 엄마는 아직도 자기 화려했던 시절을 못 잊고 있다고 시비하던 것을 멈춘 것입니다. 더 이상 어미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딸을 보며, 그때는 아직 심리치료가 끝나기 전이었지만 저는 딸이 건강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아니, 이미 건강한 아이였습니다.

옥교법당 저녁부 도반들과 함께 한 JTS 거리모금 (맨 왼쪽이 조인숙 님)
▲ 옥교법당 저녁부 도반들과 함께 한 JTS 거리모금 (맨 왼쪽이 조인숙 님)

시어머니,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으십니다!

그렇게 자식에 대한 애착을 끊고 나니 시어머니도 달리 보였습니다. 자식을 낳기만 했지 둘째 아들과 며느리인 우리 부부에게 다 미루고 도대체 당신이 부모 맞느냐고 시비하던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대신 미움 자리를 채운 건 연민! 사실 시어머니께 제 남편은 당신 평생의 자랑이요, 말만 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화수분에 무능한 시아버지 대신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을 장가보냈다고 집착이 끊어질 리 만무! 꿀단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는 것이 당연했지요. 그렇게 시어머니를 이해하고 나니 저만 보면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이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를 향한 시누이의 패악질도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남동생과 비교당하며 살아왔으니 그 마음이 온전할까, 걸핏하면 부모와도 싸우는데 동생의 아내가 뭐 대수라고 조심하길 바란단 말인가 싶었지요.

그렇게 시어머니와 시누이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품게 된 저는 시댁에 대한 감사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기도를 하면 할수록 제 마음속에 돌아가신 친정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음이 알아차려지더군요. ‘나는 분명 부모님을 존경하는데 왜 그럴까?’ ‘왜 감사하지 않을까?’, 그날 이후 저는 그 물음을 화두처럼 잡고 끝없이 제 마음을 살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마주한 목소리!

“나도 엄마가 필요해요! 엄마 사랑 받고 싶어요!”

시댁 때문에 억울하고, 딸 때문에 원통한 줄 알았는데, 자식 넘고, 시댁 넘고, 그 너머 너머의 밑 마음에 다다르니 엄마 사랑 고파 병이 아프게 박혀 있더군요. 늘 언니를 감싸고돌았던 어머니. 언니가 어린 저를 때리고 제 것을 빼앗아도 어머니는 언니를 이해하라는 말만 거듭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도 언니를 제게 부탁하셨는데, 그러겠다고 했지만 전 그때도 억울했고, 어린 시절엔 매일매일 억울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막내인 저를 워낙 예뻐하셨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언니를 어머니라도 감싼 것이었지만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어린 저는 어머니가 미웠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을 넘치게 받아서 그냥저냥 풀고 넘어간 줄 알았는데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뭉쳐있던 억울함! 그렇게 제 억울함의 뿌리가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배고픔이었음을 자각하고 나서야 저는 억울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내리 3년을 어머니에 대한 감사 기도로 채우면서 부족한 언니를 동생인 제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애달픔을 품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니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맺힌 마음도 사라지더군요. 그즈음 오랜 심리 치료를 마친 딸이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겼다며 사이버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보고 저는 불법의 신묘함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일을 다 겪고 저녁부 책임팀장 소임을 제안받았으니 마땅히 해야 할 내일이었지요. 각자 좋아하는 전공을 연마하며 건강한 사회인으로 나아갈 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는 아들과 딸. 정토회 활동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남편. 그런 가족들을 보며 저는 오늘도 수행 보시 봉사의 공덕이 한량없음에 감사합니다.

눈처럼 맑은 옥교법당 도반들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가 조인숙 님)
▲ 눈처럼 맑은 옥교법당 도반들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가 조인숙 님)

연기(緣起)! 아픈 딸의 손을 잡고 봉사를 등불 삼아 긴 터널을 건너온 조인숙 님이 터널 끝에서 만난 것은 부모가 뿌리 되고, 부부가 가지 되어, 자식이라는 열매를 맺는 연기의 이치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오직 감사할 뿐’이라는 명심문을 마음으로 받았다는 조인숙 님. 그렇게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자신과 가족을 살린 자양분이었음을 증득한 조인숙 님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살아서 할 일은 진정 감사뿐이라고!!

글_정진옥 희망리포터(울산정토회 옥교법당)
편집_방현주(부산울산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