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그 자신만의 향기로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제법당의 박경진 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불교대학을 다니며 자신의 내면에 대한 솔직하고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에게 거울처럼 자신을 비춰보게 해주는 ‘특별하지 않은’ 도반 박경진 님의 ‘특별한’ 수행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경주 남산순례에서 박경진 님▲ 경주 남산순례에서 박경진 님

힘겨운 시간에 깨달음을 준 행복학교

불교신자이신 시어머님께서 법륜스님의 행복톡을 저와 남편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당시 제 인생 최고로 괴로웠던 날들을 버티고 또 버티던 시기였습니다. 남편은 회사가 너무 바빠져 매일같이 새벽 6시에 나가 밤 9시에 오고, 토요일에도 새벽같이 나가 저녁 7시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저는 저만의 시간은 전혀 없이 혼자 육아를 맡았고, 두 아이의 나아질 기미 없는 아토피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되었으나 새로 지어 들어간 집은 구조가 에어컨을 달기에 비효율적이어서 낮에는 에어컨을 켜지도 못하고 아들과 그 더운 집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더위에 유독 약한 저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황에서도 저는 그 누구에게도 제가 힘들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들 힘들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고, 남편은 이 회사 다니다가 암 걸리겠다고 제게 자주 하소연을 하곤 했는데, 그런 남편에게 하소연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의 답답함과 화는 아이들에게 쏟아졌습니다. 매일매일 짜증 내고 화냈던 시간.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육아휴직을 해놓고서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화를 내는 제 모습이 모순적으로 느껴져 더욱더 괴로웠습니다.

2017년 9월 22일 행복학교에 입학하다.

시어머님께서 보내주신 행복톡 여기저기 살펴보다 행복학교를 알게 되어 입학했습니다. 거제에서 통영까지 가서 어머님께 둘째를 맡기고 다시 거제로 와 행복학교에 다녔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은 5년 전 아이를 낳은 순간 사라진, 제가 저에게 그동안 허락하지 않았던 첫 자유의 시간이었습니다.

행복학교에서 처음 나눈 내용은 "아이보다 남편을 1순위에 둬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들으며 저와 남편의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습니다. 처녀 시절 저는 언제나 저를 이해하고 저만 사랑해주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때 남편은 제 삶의 구원이었습니다. 저를 언제나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를 사랑해주는 남편을 통해 비로소 저는 스스로를 조금이나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구원 같았던 그 고마운 남편을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고 아이만 위하고 찬밥처럼 대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남편에게 든 고마움이 다시 떠오르고, 남편을 위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너무 힘들면 회사 그만둬도 돼, 나 복직해서 우리 가족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말해줄 수 있었습니다. 미래를 계획적으로 설계하고 모든 것이 제 계획에 맞춰져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제게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큰 변화였습니다.

한 달 동안 행복학교에 다니고 나니 매일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던 제가 4일 정도는 짜증을 내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마음만이라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1년 동안의 과정인 불교대학에 바로 입학하고 싶었지만, 거제에서는 가을불교대학이 개설되지 않아, 3월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행복학교에 계속 다니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개설되지 않으니 직접 지역 맘 카페에 글을 올려 사람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10월에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매달 끝 무렵이면 행복학교 소개하는 글을 카페에 올리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월까지 행복학교에 다니며 그 마음을 유지하였습니다.

특별해지고 싶은 나

그렇게 행복학교에 다녀도 저의 문제가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왜 이렇게 괴로워하며 사나?'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교사로 있을 때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괴로워했고, 그 괴로움 때문에 '좋은 부모나 되어보자' 하고 휴직을 하고 아이를 돌보았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책을 읽어도 저는 그들이 말하는 부모처럼 되기가 어려웠고, 그런 저를 늘 자책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니, 그 밑바탕에는 늘 '나는 특별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나는 특별해지고 싶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잘한 일임을 모든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교대학 도반들과 함께한 남산순례, 뒷줄 제일 오른쪽 박경진 님▲ 불교대학 도반들과 함께한 남산순례, 뒷줄 제일 오른쪽 박경진 님

저는 가난한 농촌에서 4남매( 딸, 딸, 아들, 딸)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외동아들인 아버지는 이미 아들이 있었기에 저는 낳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 꾸신 태몽이 좋아 저를 낳으라 하셨고 저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저는 할머니로부터 틈만 나면 그 이야기를 들었고, 고모들은 어린 제 앞에서 부모님께 '이렇게 가난한데 왜 애를 4명이나 낳아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그 말이 어린 제게는 깊숙이 박힌 상처였습니다. 저는 제가 잘 태어났음을 증명해야 제가 태어나 더 고생하시는 부모님 뵐 면목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그 이유로 이렇게 좋은 딸, 좋은 선생님,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썼구나' 하고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경진아, 그동안 참 애썼다, 고맙다, 고생 많았어.'라고 저를 다독여 줬습니다. 그 최초의 무지를 찾아내고 나니 처음에는 즐겁게 시작했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잘해야 한다는 욕심에 즐거움은 사라지고 오히려 괴로워하는 저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도 여전히 미운 감정이 남아있었고, 죄책감 또한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 속에서도 저의 괴로움이 조금씩 옅어지는 게 보여 불교대학에 입학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불교대학 입학식에서 - 맨 앞줄 중앙 박경진 님▲ 불교대학 입학식에서 - 맨 앞줄 중앙 박경진 님

2018년 3월 13일 불교대학에 입학하다.

처음 어떻게 오게 되었냐는 질문에 "저는 부처가 되고 싶어서 왔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하. 그때도 역시 저는 특별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접해보는 불교 문화가 가미된 불교대학은 행복학교와는 달라, 어리둥절했습니다. 제가 생각한 그 모습이 아니자, 처음에는 후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계속 가다 보니 불교대학에 점차 익숙해져 갔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갑자기 맹장이 터져 입원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2주간 빠지게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무조건 개근해서 법륜스님과 악수를 하고야 말겠다' 라고 맹세했는데, 어쩔 수 없이 그 맹세가 깨져버리자, 의외로 마음이 더 편안해졌습니다. 열심히 하려는, 뭐든 잘하려고 하는 저의 업식에서 절로 놓여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설 수도 없을 만큼 아프긴 하지만, 처음으로 아주 길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만약 불교대학을 안 다녔다면, 아이들을 돌봐주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힘들어 하며 그 시간을 보냈을텐데 말이죠.

맹장 수술을 하고 퇴원한 지 2주쯤 됐을 때 남산순례가 있었습니다. 엄청 고민하다가 법륜스님을 꼭 뵙고 여쭤봐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픈 배를 부여잡고 산을 올랐습니다. 드디어 즉문즉설 장소에 도착하여 스님을 처음으로 뵈었는데, 멀리서 보니 스님 주위에만 따뜻한 빛이 있는 듯하고, 커 보였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렇게 큰 분은 아니어서 조금 놀랐습니다. 불교대학을 개근해야 할 수 있는 악수를 거기서도 해주셨습니다. 드디어 즉문즉설 시간이 되고 저는 얼른 달려가 첫 번째로 질문자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동안 궁금해했던 '공'사상에 대해 질문드렸고, 저의 예상 답변과는 달라 조금 헤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드렸더니 다시 천천히 답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스님 말씀을 알아듣기 힘들어 오히려 스님께 실망했습니다. 저는 뭔가 제 머리를 번쩍 때리는 그런 후련한 답을 주실 것이라 기대했었는데, 그렇게 못 해주시는 것 같아 '스님의 능력이 별로인 건 아닌가' 하는 건방진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되돌아가는 길에 다시 생각하고 생각해 보니, 제가 아직 스님 말씀을 이해할 능력도 안 되고 제가 생각한 것을 굽히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교대학을 계속 다니다 보니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남산순례에서 스님께 질문하는 박경진 님▲ 남산순례에서 스님께 질문하는 박경진 님

2018년 5월 16일 혼자서 아침 수행을 시작하다.

지난해 9월부터 하려고 했던 108배 수행을 요가 선생님 덕분에 마음을 내어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요가 수행법과 정토행자 수행법 중 어떤 것으로 할지 갈등이 일었습니다. 저는 남에게 잘 숙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에, 정토행자 수행법이 더 나을 것 같아 그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딱 1년만 해보자. 안 달라지기만 해봐라.' 이런 심정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차 접촉 사고가 있었습니다. 원래 디스크가 있었던 저는 허리와 목, 머리가 너무 아파 병원에 다닐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냥 이 아픔은 넘어서야 할 마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을 넘지 못하면 또 다른 고통이 생기고, 핑계가 생기면 쉽게 수행을 포기하겠다 싶어, 아픈 몸을 이끌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수행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천일결사 입재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행을 어떻게 하는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2주 뒤 문경특강에 가서야 제대로 하는 방법을 알고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수행 도중 둘째 아이가 잠이 얕아 자주 깨는데, 아이가 울면 달려가서 재워주고 다시 와서 또 수행하고 또 일어나면 가서 재워주고 와서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다시 재우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고, 또한 저도 다시 잠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정토행자의 서원을 그 시간 동안 외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아들 덕분에 정토행자의 서원, 보왕삼매론, 사홍서원까지 모두 다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수행을 하여도 저는 똑같이 아이들에게 짜증과 화를 냈습니다. 수행 초기에는 전보다 더욱더 심했습니다. 이유를 생각해 보았더니, 매일 아침 4시 50분에 일어나니 채 6시간도 못 잤기 때문에 피곤해서 그랬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유지하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에 아이들이 잠드는 9시에 같이 자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8시간 가량 잘 수 있기에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컨디션을 잘 유지하고 수행을 하여도, 아이에게 짜증과 화가 올라올 때가 있었습니다.

2018년 6월 2일 문경특강을 가다.

처음으로 스스로의 뜻에 따라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1박 2일의 문경특강 길에 올랐습니다. 예전의 저라면 아이들을 두고 혼자 어딜 간다는 건 엄마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죄책감 때문에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마운 맹장수술과 입원,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이 많이 커서 저와 떨어져 잘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문경특강에 가서 정토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법륜스님의 꼼꼼한 성격이 여러 곳에서 묻어나는 걸 보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문즉설 시간에 또 제일 먼저 손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제 머리에 제대로 꽂혔습니다. 저의 업식,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큰 문제가 꿰뚫린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특별하길 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기어도 저는 날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날지 않으니 괴로웠습니다. 날 수 있는 노력도 다하지 않은 채, 제가 한 것보다 더 큰 결과를 바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수행해도 별로 나아짐이 없었던 건 당연한데,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침 수행의 효과에 대해 분별심이 났던 저는 다시 수행을 계속할 힘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는 아이들에게 짜증과 화가 올라왔고, 그런 저를 보고 날지 못한다며 스스로에게 또 실망하곤 했습니다.

천일결사 입재식에서 -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경진 님▲ 천일결사 입재식에서 -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경진 님

2018년 8월 1일 <깨달음의장>에 가다.

<깨달음의장>에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의 선택으로 태어났는데, 제가 부모님께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온전히 행복했습니다. 괴로움이 한 오라기도 없었습니다. 괴로울 일이 없었습니다. 그냥 맑고, 밝고, 가벼움, 그 뿐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설명하고 알려줄 뿐 강요하지 않았고,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마음을 먹고 대하자 아이들을 일주일 내내 혼자 돌보는 것에도 가벼워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가벼움이 다시 무겁게 변했습니다. 어느새 잠재되어 있던 제 업식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다시 계산을 하기 시작하고 저만의 틀을 금방 만들어버렸습니다. <깨달음의장>을 다녀오고 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리라 생각했는데, 일주일 만에 원래로 돌아오는 저를 보며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나는 왜 안되는 거야? 수행한 지 100일이 지나가는데 도대체 왜 안 변하는 거야?' 하며 이전에 겪은 우울감보다 훨씬 더 깊은 우울감의 늪에 빠져, 거기서 허우적댔습니다. 그렇게 회향수련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2018년 9월 8일 회향수련에 가다.

회향수련에서 법사님과 일문일답 시간이 되었습니다. 또 맨 처음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고민을 가진 다른 질문자들의 일문일답을 새겨 들으며 그 속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답을 찾았습니다. 화가 나면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구나'하고 알아차리고, '화가 날만하지, 그래 그럴 수도 있지'하고 바라봐 주는 것. 그 후 이성적으로 자신이 할 행동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른 인연과보를 그대로 받으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가 나는 것을 옳지 않다고 바라보았기에 스스로 문제 삼아 괴로워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수련 온 분들 대부분이 수련을 통해 얻은 지혜를 일상 속에서 계속 실천하고 사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그런 것이었구나!' 저 스스로가 자신을 특별해지길 원하지만 않으면 제 자신을 스스로 비난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그래, 그럴 수 있지'를 마음에 되뇌기로 했습니다. 저를 보고도 '그럴 수 있지', 남을 보고도 '그럴 수 있지'.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아니면 어때, 모두 그렇게 사는 걸'하고 생각하고 나니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또 넘어지면 일어나겠습니다.

의식의 힘이 사라지면 용수철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야 마는 35년간 살아온 습관! 얼마 전에도 아이들에게 미친 듯이 화를 낼 때가 있었는데, 그날은 이틀 밤이나 잠을 설친 날이었습니다. '아, 내가 엄청 피곤하니까 의식이 흐려지고 무의식에 휘둘리는구나'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피곤하지 않을 수 있게 컨디션을 조절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무리 피곤해도 그런 무의식의 습관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는 그날이 오기까지, 오늘도 수행정진합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법륜스님, 고맙습니다!
정토회를 함께 일구어 가시는 법사님, 도반님들, 모두 고맙습니다!
저의 제일 큰 스승인 아이들, 남편 역시 고맙습니다!

덕분에 앞으로 좌절이란 없습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또 넘어지면 일어나고, 또 넘어지면 또 일어나겠습니다.

글_박경진 (마산정토회 거제법당)
정리_ 김형옥 희망리포터 (마산정토회 거제법당)
편집_ 조미경 (경남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