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속 정토맑은마음,좋은벗,깨끗한 땅을 실현하는 정토회



또르륵 딱, 또르륵 딱.
후끈 달아오른 도심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목탁의 경쾌함이 장거리 여행에 지친 우리들을 반겨주었다.불교가 대중들의 요구로부터 점점 멀어져갈 때 대승불교가 발생했듯이, 불교의 근본 교리체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 발길을 머물게 한다.
이번 호 에서는 불교계 사회활동의 대표주자인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스님을 만나보았다.



도심에서의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하루 일과가 규칙적이지 못한 편이에요. 지방에 법회가 끝나면 11시 차 타고 서울에 새벽 5시쯤 도착하나요. 그러면 세수하고 공양하고 7시 약속 있으면 나가거나 아니면 눈 좀 붙이고요. 그 다음 9시 약속, 11시 토론회 또는 법회 보고요. 2시부터 3시까지는 법회에 대한 질의응답을 하고, 그 다음에는 제 사무보고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는 내부 회의하고…. 또 1년 중 6개월은 해외에 있고 6개월은 서울에 있고, 국내 있을 때는 일주일 중 2일 정도는 서울에 있고 나머지는 지방에 있어요. 따로 일과라고 정해져있는 게 없습니다. 잠자는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고, 식사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은 그런 생활이에요.


'승적문제'를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많은데, 어떻게 출가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불교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용성 스님의 법을 계승한 불심 도문 스님을 뵙게 되었죠. 당시 분황사에서 주지로 계셨는데 뵈면 뵐수록 저의 생각이 많이 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고2 때 불교 학생회 회장도 맡으면서 절에서 살았는데, 졸업하려니까 이제 나가서 살라 하셔서 나왔죠. 그 후로 20년을 재가법사로서 활동을 했어요.
그러다가 90년 말이었습니다. 우리 스님께서 몇 번이나 그러시더군요.
"인제 들어와서 활동을 해라"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스님, 도에 무슨 안팎이 있습니까?"
"도에는 안팎이 없지."
"그런데 왜 자꾸 안으로 들어오라고 그러십니까?"
"네가 밖을 고집하니까 안이 생기지."
스님의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안팎이 없다' 라는 주장을 하면서 밖을 고집하는 나를 보게 되었어요. 그때 바로 그 자리에서 삭발을 했지요. 그 때 스님께서 사미계는 옛날에 받은 걸로 하고, 계율에 대해서만 다시 설하고 비구계와 법사계를 받고 전법을 받았죠. 그때가 91년 1월이었어요.
내 승적문제에 대해서 스님이 '네가 20년 밖에서 나가 살면서 장가를 간 것도 아니고 딴 짓 한 것도 아니고 불교 활동했으니까 승적문제는 내가 한 번 의논을 해보겠다' 그렇게 얘기를 하셨기 때문에 당장 수속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죠.
그런데 94년도에 종단사태가 생기고, 같이 참여하자고 전화가 빗발치듯이 왔어요. 당시 종정이셨던 서암 스님께 찾아갔더니
"아무리 좋은 일도 여법(如法) 해야된다. 데모 같은 건 불교의 방식이 아니다. 주먹을 흔들고 단식을 한다며 아우성을 치는 것이 어떻게 불교적이냐?"
하셨어요. 그래서 동참을 안 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기존 종단을 지지하는 게 아니냐' 라는 오해를 받았죠. 그러다가 스님이 갑자기 사퇴를 하시게 됐어요. 그래서 제가 사퇴를 하실 수 있도록 사회를 보게 되었는데, 그 때 종단의 개혁하시는 스님들이 와서 보니까 비록 사퇴하는 자리지만 거기서 사회를 보고 있으니 혹시 종단사태에 개입되지 않았나 하는 오해를 받게됐죠. 그래서 나를 징계하려고 승적(僧籍)을 찾아보니까 승적이 없어요. 불교신문에 '가짜 승려다' 라고 대대적으로 났어요. 그래 기사를 보고 총무원에 찾아가서 내가 승적이 없는 것은 사실인데 내가 뭐 가짜 승려 행세를 한 것도 아니고 '여차해서 이렇게 됐다' 라고 했더니, 호법부에서 스님은 대상이 안 된다는 거예요. 승려가 아니기 때문에 징계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해명 할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유를 쭉 썼어요. 91년에 제 은사스님께 사미계를 받았는데 마침 단일 수계가 없었던 해이고, 스님이 기다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단일수계를 지나쳐버리고 계를 못 받게 됐다. 그랬더니 단일 계단에 참여를 안 했기 때문에 인정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은사스님한테 말씀을 드려서 행자교육원 입방원서를 다시 썼는데 그게 8월 25일부턴가 그랬어요.
그런데 그 해 6월부터 '북한돕기 백만인 서명운동'을 두 달간에 걸쳐 끝내고 8월 15일날 회향하면서 김수환 추기경, 송월주 총무원장 스님과 함께 대통령과 면담신청의 날짜를 잡아야 했는데 그게 8월 29일로 잡혀버렸어요. 그래서 며칠 늦게 가면 안되냐 물으니까 '안 된다' 라고 해서 참석을 못했어요. 모든 행사를 제가 진행해왔는데 중간에 수계 받으러 갈 수가 없는 상황이 돼버린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북한 동포들 놓아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이렇게 해서 승적이 없게 되었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현행의 사회에서는 행정절차가 매우 중요한 거잖아요. 그래서 행정 절차를 제대로 이수 못했기 때문에 승적이 없는 거니까, 제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종단 밖에서라도 열심히 활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렇게 활동을 하면 모두 불교로 가고, 조계종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정토회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배경과 운영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해주십시오.


85년도에 중앙 불교교육원이라고 승가대 스님들과 동국대 학생 및 대학원생을 가르쳤던 것이 출발동기였다고 할까요. 당시 학생들은 민주화라든지 사회에 대한 변화의식은 있는데 불교사상은 없었어요. 그래서 붓다라는 분이 어떤 인격적 성장을 해오셨는지 공부를 해야되고, 두 번째는 그 분의 근본 가르침, 근본 교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된다. 또한 현재 사회의 시대적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된다. 이렇게 방향을 잡으며 시작했죠. 그러니까 스님들과 부처님의 일생이라든지 불교의 근본 교설이라든지 불교 변천사를 공부함과 동시에 현 사회과학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줬죠.
저희들이 88년에 '정토회' 라는 말을 처음 썼어요. 정토삼부경에 묘사된 정토는 자연이 아름답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모든 유정·무정들이 언제나 수행하고 있어요. 이 세 가지에 힌트를 얻어서 '맑음 마음·좋은 벗·깨끗한 땅' 으로 표현했는데, '맑은 마음'은 개인적인 수행이고 '좋은 벗'은 통일운동과 제3세계 복지운동, '깨끗한 땅'은 환경운동으로 사업방향을 잡은거죠. 그래서 현재 정토회 내의 단체는 크게 5개가 있거든요. 수행단체가 2개이고 사회사업파트가 3개입니다.
수행파트의 2개 중 하나는 '정토법당'인데 여기서는 주로 대중들이 모여서 수행을 하는 곳이지요. 두 번째가 '정토수련원'인데 법당하고 구별한 이유는 법당이 불교를 가르치는 곳이라면, 수련원에서는 너무 불교에 국한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보자. 그래서 거기는 농사짓는 공동체라든지 불교라는 이름을 굳이 쓰지 않고 수련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이것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사회파트로 세 개가 있는데 하나는 환경운동인 '한국불교환경교육원' 또 하나가 '한국 JTS' 인데 세계 인류적 차원에서 기아·질병·문맹 퇴치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마을에 학교와 병원 등을 세우고, 북한에 지원하는 일, 몽골에 지원하는 일 등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사단법인이죠. 세 번째 사단법인은 '좋은 벗들' 인데 주로 통일 운동하는 단체입니다.

스님의 백일법문을 듣고 모두들 그 해박함에 대해서 '어떻게 공부하셨을까?' 궁금해했는데요…


저의 은사스님께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저녁 먹고 6시나 7시쯤 앉았다 하면 이튿날 예불할 때까지 말씀을 하시는데, 저 혼자 앉혀놓고 말씀하셔도 백 명을 앉혀놓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크고 또박또박하게 하셨어요. 혼이 들어있는 듯한 말씀이 저한테는 굉장한 힘이 되었지요.
또 저는 경전을 읽을 때마다 '왜 그럴까?' 라는 의심을 많이 하거든요. 늘 저 자신의 마음에서 제 주위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문제를 살펴보면서 부처님의 경전을 살피고, 반대로 경전을 읽으면서도 늘 그 경전의 구절에 대한 의문을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내가 생활하면서 부딪쳤던 문제를 통해서 '아 그게 이런 말씀이셨구나' 이렇게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부를 했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늘 그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연구하는 자세를 갖게되면, 고속버스를 타고 그 속에서 영화를 보더라도 그곳에서 해답을 찾아낼 수 있지 않느냐? 제 경험은 주로 그런 쪽에 있어요.



예불이나 기도의 집전을 모두 재가자들이 하고 있던데, 천도재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요.


저는 제사를 문화라고 보는데, 법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마음을 깨치면 되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보거든요.
우리도 처음에는 제사를 안 지냈어요. 그런데 대중의 현실적 요구, 즉 서비스 차원에서라도 대중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49재를 바라볼 때, 다르마적 차원의 의미는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자식이 널리 베풀면 영가에 도움이 된다는 것 아니냐?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아픈 자에게 약을 주는 것이라면, 가장 배고픈 자가 누구냐? 안거를 끝내고 나오는 스님이야말로 가장 배고픈 자이니까 거기에 공양을 대접함으로써 영가에게 도움이 된다. 이런 이치라 말이에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거꾸로 승려가 영가한테 음식을 올리는 것을 주도하고 스님은 제주(祭主)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난 승려가 성직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승려는 사제가 아니라 수행자인데 오늘날 대부분 사제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사는 베푸는 것이니까 인도에 굶어 죽는 사람을 위하여 시주하게 하거든요.
그런데 그러고 말면 '제(祭)'를 지내는 문화는 있으니까 섭섭하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절에서 수용해주고 대신 음식은 집에서 가져오자.
제사는 원래 유교방식이니까 자식이 제주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제사는 제주들이 지내는 것이고, 그러면 스님은 무엇을 해주느냐, 법문만 해주면 된다 이렇게 하고 있죠.


요즘 도심 속의 포교가 사유화·세력화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스님의 견해가 있으시면…

그것은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본주의에 물이 들어서 불교의 어떤 면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동화되어 버린 것이지요.
예를 들면 신라시대나 고려시대는 노비를 두고 움직이는 신분제 사회 아닙니까? 그래서 사찰을 유지하려면 사찰에 소속된 땅이 있어야 하고, 그 때는 보시를 하면 땅으로 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땅을 경작 할 사람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 땅의 노비가 농사짓고 절에서 밥짓고, 그 기초 위에서 모든 스님들의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난 이것을 뛰어넘은 스님은 원효스님 정도 외에는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신분제 사회에 있으면서도 그 신분체계를 부정 하셨잖아요. 신라나 고려는 아무리 사상적으로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벗어나지 못했거든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죠. 신분제 사회에서는 노비가 기초이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기초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찰에서도 스님은 한 때는 노비의 주인이었고, 또 대지주였고, 그렇다면 지금은 사찰이라는 운영의 사업자 아니에요. 제를 지내는 데도 밥하는 사람에게 월급을 주고 그 남는 것이 이익이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새롭게 바뀐 사회에서 볼 때에는 이 시대에 살았던 스님들은 진정한 출가라고 할 수 없는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사찰이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 있으면서 돈을 주고 사람을 부리고, 스님들도 월급 받고 부전을 보고 있잖아요. 또 중책을 맡은 스님들은 수입원이 많은 것들이 우리 눈에도 다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승가 안에 있을 수 없는 빈부격차가 명백히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찰에 들어오는 돈은 주지와 같은 권한이 있는 스님이어야 돈을 가질 수 있지, 권한이 없으면 노력 봉사로 끝나거나 월급을 받는 노동자만 되지 자신이 사용주는 되지 못하잖습니까. 이러니까 한 쪽은 주지나 직임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게 되고, 그렇지만 절은 한정되어있고 스님은 많으니까 나머지 스님은 어떻게 되겠어요. 이러니까 세속에서 사람들이 자기 개인 사업체를 가지려고 하려는 것과 같이 이러한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자기 것이라야 최선을 다해서 하지 자기 것이 아니면 괜한 노력봉사 일 뿐이잖아요. 바로 이게 자본주의의 생존방식이잖아요. 그런데 스님들에겐 이러한 자본주의 내에서 수행과 병행해 갈 수 있는 자기 존립방식이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스님들이 모두 다 자기 것 하나를 갖고 싶다. 자기 절 짓기 좀 미안하니까 토굴 하나 짓는다. 이것이 개인 사찰 하나 만들겠다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러한 추세는 종단의 체제가 문란하면 문란할수록 그 속의 승려들은 각기 제 살길을 찾아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종교는 장로나 교구라는 견제책이라도 있지만, 승려는 그런 견제도 받지 않고 완전히 개인 것이 되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런 점에서 저는 상업화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현 교단의 시스템 안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라도 불교가 양적으로 확대하려면 이러한 방식을 인정해 주는 것이 낫지, 가두어 둬서 작은 밥그릇으로 서로 싸우는 것보다는 오히려 풀어주는 게 내부로도 갈등이 적어지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게시판에 올리기엔 글이 너무 길어서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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