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깊어가는 가을, 스님은 경주에서 이틀을 보냈습니다. 1일에는 경주 남산에 올라 유튜브에 올릴 영상 촬영을 하고, 2일에는 전국에서 모인 통일의병들을 위해 경주역사기행을 안내했습니다.

11월 1일, 경주 남산 영상 촬영

금요일 아침, 평일이어서 그런지 인적이 없는 경주 남산은 아주 고요했습니다. 경주 남산 안내를 영상으로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리자는 제안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막상 시간을 내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말에 이어서 오늘 하루 더 시간을 내어 영상 촬영을 이어갔습니다.

오늘은 용장골로 올라가 삼화령을 지나 포석정으로 내려왔습니다. 8시 30분부터 용장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남산의 두 봉우리인 고위봉과 금오봉 사이에 흐르는 골짜기가 용장골입니다.


스님이 어렸을 때부터 자주 오르던 산입니다. 산길에 버려진 작은 쓰레기가 보이면 주우면서 산을 올랐습니다.

“날씨 좋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산을 오르기에 딱 좋네.”

용장골을 오르던 중 가장 먼저 절골을 만났습니다. 절골은 용장골의 한 지류인데요. 옛날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절골이라고 부릅니다. 무너진 축대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홍수가 한번 지나가고 나면 계곡에서 불상을 발견하곤 했어요. 여기는 절이 있던 평지였는데 아주 큰 홍수가 나서 저쪽으로 흐르던 물이 이쪽으로 흐르면서 축대가 무너진 거예요.”

축대를 지나자 머리 부분이 잘려나가고 없는 약사여래좌상이 나타났습니다.

약사여래좌상 앞에서 촬영을 한 후 다시 용장골을 올랐습니다.

“탑 봐라!”

계곡을 건너는데 갑자기 스님이 소리쳤습니다. 허겁지겁 따라가 보니 정말 산 정상 부위에 탑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저기 산 위에 탑이 보이죠? 탑을 향해서 반야심경 봉독을 하겠습니다.”

설잠교를 지나 용장사터에 도착했습니다. 햇볕이 잘 드는 땅에 무덤만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한 편에 ‘용장사터’라는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남산에서 가장 크고 번창했던 용장사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제 가파르게 올라야 해요.”

한 능성이를 오르니 산 위에 보이는 탑이 조금 더 가까워졌습니다. 오늘은 산길을 따라 둘러 왔는데 스님이 어릴 때는 탑이 보이는 산 아래에서 가파른 길을 직진으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탑이 완전히 하늘 위에 있는 것 같죠?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능성이마다 저 탑이 보였어요. 탑이 보일 때마다 절을 하면서 올라왔어요.”

11시 무렵에 삼륜대좌불과 바위 속 부처님을 지났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드디어 용장사 삼층석탑 앞에 도착했습니다. 합장하고 탑 앞에 인사를 한 후 스님의 설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탑은 산을 기단으로 해서 쌓은 거예요. 원래는 여기에 하층 기단이 하나 더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산 전체를 하층 기단으로 삼은 겁니다. 3개 층의 높이는 4.5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 산 전체가 탑의 기단이니까 탑의 높이는 400미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세계에서 제일 높은 탑일지도 모습니다. (웃음)

이 산을 수미산이라고 생각하고, 수미산 위에 하늘나라를 지나서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미로 삼층탑을 쌓은 겁니다. 탑에 조각을 할 때가 있는데, 상층 기단에는 팔부 신장을 그립니다. 이건 하늘나라를 뜻합니다. 그 위에 1층 탑신에는 사왕천을 그리고, 그 위에 2층 탑신에는 도리천을 그리고, 그 위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미예요.”

산 아래에서는 하늘 위에 있는 것 같던 탑 앞에 이르니 하늘 아래에 산 능선과 계곡이 펼쳐졌습니다.

스님은 합장하고 탑을 돌았습니다. 바람이 가사를 흔들었습니다. 건너편에 남산에서 가장 높은 고위봉이 보였습니다. 용장사 삼층석탑을 지나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각자 싸온 반찬을 내어놓으니 그대로 풍성합니다.

길을 걷다 보니 머리 위에 큰 바위가 있습니다. 스님은 '연화대좌‘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불상은 없고, 불상을 모신 자리만 남아있습니다. 수리봉, 금오봉, 삼화령 세 곳이 남산에서 가장 높은 세 봉우리입니다.

직접 연화대좌까지 올라보았습니다. 스님은 잠시 연화대좌에 앉아 명상을 했습니다.

삼화령에서 포석정 골로 내려오는 길을 택해 남산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팔각정터, 상사바위, 늠비 5층 석탑, 황금빛 마애불, 윤을곡 삼존 마애불을 차례대로 둘러보고, 촬영도 했습니다.

늠비5층석탑
▲ 늠비5층석탑

황금빛 마애불
▲ 황금빛 마애불

윤을곡 삼존 마애불
▲ 윤을곡 삼존 마애불

산길이 넓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오르던 산이어서인지 스님은 골짜기마다 부르던 옛 이름과 불상에 얽힌 옛이야기 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늘 촬영한 영상은 유튜브 채널에 시리즈물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포석정으로 내려오니 단풍이 아주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촬영을 간단하게 한 후 지마왕릉을 지나 삼불사에서 통통하고 천진난만한 부처님 세 분을 만났습니다.

지붕을 씌워 놓아서 부처님의 얼굴 모습이 잘 안 보였습니다. 스님이 어릴 때는 지붕이 없어서 부처님의 천진한 얼굴 모습이 햇살을 받아 아주 잘 보였다고 합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엽서로 만들어져서 기둥에 꽂혀 있었습니다.

“햇살을 받으면 이렇게 얼굴이 잘 보였어요.”

오후 4시가 넘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불교대학생들과 남산 순례를 할 때 두 번, 오늘까지 총 세 번에 걸쳐 영상 촬영을 했습니다. 아직도 설명해야 할 유적이 더 있지만, 스님은 촬영팀에게 무리가 될 것을 염려해 오늘은 여기까지 촬영하기로 하고 일정을 마쳤습니다.

8시간 내내 걸으니 다리가 시큰합니다. 맑은 공기를 마셔서인지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뜻한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11월 2일, 제9차 통일의병 대회

경주에서 맞이하는 아침이 밝았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신규 통일의병 300여 명과 함께 법흥 왕릉, 황룡사지, 사천왕 사지, 선덕여왕릉 등 경주 일대를 순례한 후 동국대학교에서 제9차 통일의병 대회를 함께 했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법흥 왕릉에 전날 밤 혹은 오늘 새벽에 출발한 통일의병들이 속속 도착했습니다. 7시 30분, 대중이 모두 법흥 왕릉에 도착하자 제9차 통일의병 대회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오늘 역사기행의 주제를 알려주었습니다.

어떻게 가장 약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을까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과거 역사 속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통일은 두 번 등장합니다. 7세기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고, 10세기에 고려가 후백제와 신라를 통일했습니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작고 약한 나라였지만, 결과적으로 삼국을 통일한 주인공은 신라였습니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면서 민족사가 축소됐다는 부분에서 많은 비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볼 점은 ‘가장 약했던 신라가 어떻게 통일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느냐’ 예요.

전쟁이 끝나고 폐허였던 한국이 발전한 모습을 세상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기적은 없습니다.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과만 보고 말하는 거예요. 하나하나 피땀 흘려서 이룩하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주에 온 이유는 약소했던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현재 우리 상황에 교훈을 얻기 위해서예요.”

5세기 초기만 해도 신라는 가야-왜 연합군이 침공해 멸망할 위기에 처했는데, 고구려의 도움으로 겨우 국난을 극복했습니다. 작은 나라였던 신라가 비약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스님은 신라와 가야의 합의통일을 꼽았습니다.

“법흥왕의 치적 중에 그 첫째는 율령의 반포입니다. 다시 말해 법 체계를 잡은 겁니다. 둘째는 불교를 공인한 겁니다. 셋째, 병부를 설치하고 화랑을 양성했습니다. 즉, 군제를 개편하고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기관을 세운 겁니다.

넷째, 신라는 가야와 평화적 통일을 합니다. 가야는 통일의 조건으로 가야 귀족의 신분 보장과 불교의 공인을 요구했어요. 신라는 가야의 요구를 받아들여 평화적인 통합을 했습니다.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에게 공주를 시집보내서 사위로 삼고, 가야의 수도인 금관가야를 제2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예를 들어 남한과 북한이 통일하게 되면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제2수도로 삼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가야의 왕을 사위로 삼아서 제2수도의 성주로 삼은 겁니다.

그리고 가야 출신들이 출세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신분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가야와 신라는 완전히 하나의 나라가 된 겁니다. 가야의 마지막 왕의 증손자가 바로 김유신 장군입니다. 김유신의 여동생이 태종 무열왕의 부인이 되고, 그 사이에서 난 아들이 문무대왕입니다. 그러니까 가야의 외손이 신라의 왕이 된 격입니다. 이것은 혈통적으로도 완전히 통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후대에 신라가 아무리 약해지고 분열이 되었어도 후 가야를 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백제는 후백제, 고구려는 후 고구려를 나중에 다 세웠거든요. 왜냐하면 신라는 가야와 통합할 때 가야 사람을 특별히 차별하지 않고 완전히 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는 무력으로 진압하고, 백제와 고구려 사람을 차별했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 불만이 점차 쌓였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생기니까 바로 자신들의 나라를 세운 겁니다. 그러나 가야와 신라는 평화적으로 통합했고, 이걸 이어서 진흥왕 때에는 한강 유역과 강원도, 함경남도를 차지하고 대가야를 복속시켜 낙동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을 유지 관리하는 시기가 진지왕 진평왕 시대입니다. 그러나 신라가 발전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땅을 뺏었으니까 백제와 고구려가 가만히 있지 않았겠죠. 그래서 동쪽에는 왜, 서쪽에는 백제, 북쪽에는 고구려가 사면에서 신라를 공격하니까 신라는 결국 국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바다 건너 수나라 당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런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고, 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 중에 하나로 삼한일통을 생각한 겁니다. 진정한 평화가 오기 위해서는 통일이 되지 않고는 어렵다고 본 거예요. 이런 적극적인 통일 정책이 당나라의 야심과 결합하면서 후반기 50년은 통일 전쟁 시기가 됩니다. 이 시기가 바로 선덕여왕, 진덕여왕, 무열왕, 문무왕, 이렇게 4대에 걸친 시기입니다. 앞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때는 국난 위기의 시기였고, 뒤에 무열왕과 문무왕 때는 삼국 통일의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국난 극복의 차원에서 통일 문제가 제기된 겁니다. 어떤 고도의 전략을 세워서 통일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위기에 처해서 그 위기를 막으려고 여기저기서 외교 전략을 쓰다 보니 통일이 이뤄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이 삼국통일을 외세가 주도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광활한 만주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우리의 내밀한 전략에 의해 통일을 추진하지 않고, 북한으로부터 위협을 느껴서 북한을 멸망시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전쟁에서는 승리할지 몰라도 그 결과는 민족사의 큰 손실을 가져올 위험도 있습니다. 북한을 중국이 차지해버린다든지, 북한을 분할 점령하게 된다든지, 북한에 미군이 군정을 실시한다든지, 이런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가야와 신라의 평화적 통일과 삼국을 통일한 과정을 들으며 오늘날 남과 북이 어떻게 통합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설명을 듣는 사이, 안개는 걷히고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습니다.

황룡사 9층 탑, 통일을 발원한 선덕여왕

법흥 왕릉 순례를 마친 후 버스를 타고 황룡사지로 향했습니다. 대중이 모두 모이자 스님은 황룡사가 지어진 연원과 그 과정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빈터에서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웅장했던 황룡사가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황룡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스님을 선두로 다 함께 남문터, 중문터, 9층 목탑터를 지나 금당터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금당 뒤쪽으로 민족의 역사와 의병의 역사를 상징하는 28개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신라는 이 황룡사 탑을 세우면서 삼한일통을 기원했습니다. 첫째,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것을 기원했고, 둘째, 근본적으로 이 전쟁을 없애기 위해서는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기원했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어려움을 막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를 위해 더 큰 원을 세워서 삼한일통을 발원한 겁니다.

이 탑을 세우고 15년이 지나서 백제가 멸망했고, 23년이 지나서 고구려가 멸망했습니다. 30년이 지나서 당나라를 몰아내고 삼국통일의 원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국가 개혁을 목표로 한 30년 정도 노력하면 세상이 바뀝니다. 한국이 산업화를 목표로 세웠을 때도 30년이 안 돼서 그 목표를 이루었고, 민주화를 목표로 내걸었을 때도 30년도 채 안 되어서 정권 교체와 민주화를 이뤄내었습니다. 물론 빈부격차가 심하고, 아직 정치가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30년 정도 노력하면 이런 큰 사회적 변화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30년을 목표로 원을 세우고 살지 않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30년을 내다보고 국가적으로 세워야 할 목표는 통일입니다. 관군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민간 차원에서 의병이 먼저 나서야 해요. 그러면 나중에 관군도 정신을 차리고 따라올 것입니다.

자, 그러면 햇살 때문에 얼굴이 좀 뜨겁긴 하지만 기도는 탑을 보고 해야 합니다. 탑을 향해 돌아앉으세요. 황룡사 9층 탑을 복원하고 기도를 하면 30년 안에 통일이 될 텐데 언제 다 짓겠어요. 지금 생각으로 복원해버려요.(모두 웃음) 신라인들처럼 우리도 평화와 통일을 발원해보겠습니다.”

다 함께 신라인들이 평화와 통일을 발원했던 것처럼 정성을 기울여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탑터를 한 바퀴 돌고 능지탑으로 향했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의 솔선수범

능지탑 앞에 통일의병이 모두 모이자 다시 스님의 설명이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능지탑 앞에 도착했습니다. 능을 대신해서 세운 탑이라고 해서 능지탑이라고 부릅니다. 누구의 능이냐면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의 능입니다. 문무대왕이 죽고 나서 이곳에서 화장을 했다고 해요. 유골을 동해 바다에 묻고(대왕암), 화장한 자리에는 이렇게 탑을 세운 거예요. 탑을 세웠는데 그 용도는 능이기 때문에 능지탑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문무대왕은 죽기 전에 이렇게 원을 세웠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신을 화장해서 그 유골을 동해 바다에 묻어 달라. 그러면 내가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서 바다로부터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아내겠다.’

이 얘기를 듣고 어떤 스님이 ‘아무리 용이 큰 힘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용은 축생에 불과한데, 어떻게 축생이 되려고 합니까’라고 말했다고 해요. 그러자 문무대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축생이 된들 어떠냐. 나라만 지킬 수 있다면.’

이 얘기와 비슷한 얘기가 있어요. 김구 선생이 ‘나라가 독립이 된다면 내가 중앙청의 수위가 되어도 좋다’라고 말한 적이 있죠. 이런 것은 지도자의 솔선수범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줍니다.”

가을바람을 맞으며 선덕여왕릉으로 향했습니다. 선덕여왕릉 주위에는 솔숲이 넓게 있어서 아주 시원했습니다. 대중들은 솔숲 곳곳에 삼삼오오 자리를 펴고 앉아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을 비켜서 자리를 깔도록 하세요.”

스님은 다른 관광객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스님도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서울 제주지부 통일의병들은 반찬만 싸오고 단체로 떡집에서 찰밥을 주문했습니다. 서초 법당에서 온 분이 찰밥 한 그릇을 가져왔습니다.

“스님도, 행자님들도 서초 법당에 계시니까 찰밥 좀 드셔 보세요.”

“노, 땡큐. 고맙습니다. 그러나 안 받겠습니다. 여기 어떤 행자라도 받으면 제명시킬 거예요.” (웃음)

스님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선덕여왕릉 앞에 모여 앉아 지혜로웠던 선덕여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운 절,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아래에는 사천왕사지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천왕사지를 참배했습니다. 사천왕사는 당나라의 20만 대군이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해 명랑 법사와 12명의 유가승이 문두루 비법으로 정성을 기울여 기도를 했던 곳입니다.

선조들이 1300여 년 전 이곳에서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정성껏 기도를 올렸듯이 스님과 통일의병들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발원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역사기행을 모두 마치고 곧바로 경주 동국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대강당으로 향했습니다.


오후에는 동국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대강당에서 통일의병 임명장과 배지를 수여하고 통일의병의 길에 대한 법문을 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300여 명의 새로운 통일의병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습니다. 모두 큰 박수로 통일의병이 된 것을 축하했습니다.

이어서 통일의병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스님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국가는 발전하고, 국민은 행복해야 합니다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면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전 국민이 일어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의식이 깨어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열정을 가지고 헌신과 희생을 해나가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현대사만 살펴봐도 1960년 초에 군인들 일부가 힘을 합해서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 왜 우리는 늘 가난하게만 살아야 되는가?’라고 하면서 조국의 근대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나섰습니다. 당시에는 약간의 웃음거리 같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30년이 안 돼서 대한민국이 88 올림픽을 치르는 모습을 보고 전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한강의 기적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밥 먹고 살만해지니까 이제는 ‘왜 우리가 독재체제에서 억압받고 살아야 하는가? 사람이라면 좀 자유롭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청년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주장했습니다. 그때 어른들은 ‘아이고, 그거 계란 갖고 바위 치기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결국 민주화를 쟁취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발달된 민주주의 국가를 우리는 만들어냈습니다. 비록 일본이 우리보다 더 앞선 민주국가라고 하더라도 일본은 위로부터의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말이 민주주의지 국민들 대부분은 권력에 순응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갖 억압 속에서도 밑으로부터 그것을 뚫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사회를 만들어냈습니다. 서양에서는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몇 백 년이 걸렸는데 우리는 3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민주적인 정권교체와 민주사회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렇게 소수의 사람이라도 헌신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목표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들의 목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한 단계 발전해 나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한반도는 미소의 양 패권 사이에서 분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중국이 새로 부상하면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굉장히 유동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잘못 대응하면 더 큰 불행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남방에서 한국, 미국, 일본의 삼각동맹이 형성되면, 북방에서는 중국과 러시아, 북한의 삼각동맹이 이루어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동아시아는 신 냉전구조로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또 강대국의 하위 변수로 전락해서 지금까지 겪었던 분단과 전쟁, 갈등의 고통을 다시 겼을지도 모릅니다. 분단이 된 지 70년이 된 것도 긴 시간인데, 한 세기 이상 분단을 더 끌고 가야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런 새로운 질서의 재편기에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뤄내서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권 경쟁에 휘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의 발전 전략을 어떻게 마련해 나가야 할까요? 이것이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입니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통일의병을 만든 거예요.

첫째, 통일의병은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평화 의병입니다. 둘재,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해내는 통일의병입니다. 원래는 정부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정부가 이 일을 잘한다면 의병이 굳이 필요 없습니다. 관군이 잘 싸우면 의병이 왜 필요하겠어요? 전문적으로 월급을 주고 지위도 주고 명예도 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관군을 양성했는데, 지금 관군이 좀 신통치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 관군만 갖고는 도저히 이 문제를 극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통일의병을 만든 겁니다.

물론 한국 사회 내부의 개혁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내부의 개혁만 갖고는 국가 발전에 한계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여러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그래도 밖에 나가 보면 대한민국은 괜찮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살고 싶어 해요. 경제가 안 좋다 하지만 밖에서 보면 이만하면 괜찮고, 정치가 엉망이다 하지만 밖에서 보면 민주주의가 이만하면 괜찮은 거예요.

우리가 해결해야 될 과제가 많지만, 그러나 대한민국이 괜찮다는 긍정적인 마인드 위에서 비판적 마인드를 가져야 혁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냥 괜찮다고만 생각하면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비판만 하게 되면 대한민국을 떠나거나 다 때려 부셔야 된다는 파괴적인 에너지로 가게 됩니다. 비록 국내 문제도 많이 있긴 있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이보다 더 위험한 건 미국과 중국 사이의 경쟁 국면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안보 질서가 급속도로 바뀌는 거예요.

트럼프가 성격이 고약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어제의 적대관계가 오늘은 친구 관계로 바뀔 수 있어요. 한일 간의 갈등도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에요. 지난 50년간 아무 문제없던 친구 관계였는데, 정상 간에 갑자기 악수도 안 하고 얼굴도 안 보고 인사도 안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지금의 국제 정세입니다. 이렇다 저렇다 예측하기가 어려워요. 지금은 안 좋지만 내일 또 좋아질 수도 있어요. 지금 나라마다 서로 이합집산을 하거나 짝짓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오직 자기 국가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욕할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각 국의 관계가 유동적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대한민국의 국익이라는 관점을 분명히 가지고 여기에 잘 대응하는 겁니다.

이렇게 유동적이기 때문에 혼란스럽다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어요. 각국의 역학 관계가 딱 짜여 있으면 분단 극복이 어렵습니다. 유동적이기 때문에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뤄낼 수도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대결 구도가 안정적으로 되어 있어서 냉전은 유지되었지만 전쟁 위협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유동적이니까 냉전이 해체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전쟁이 벌어질 위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장단점이 있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남북 관계를 설정하고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설정해 나갈지 연구해야 합니다. 이전에는 미국하고는 찰떡궁합처럼 잘 지내고, 북한하고는 적대적으로 지내면 됐는데, 이렇게만 해서는 더 이상 국가 발전이 없는 거예요. 남북 관계가 약간 개선되고, 한미 관계가 약간 찌그럭대는 이런 속에서 우리는 국익에 유리하도록 관계를 조율해 나가야 해요. 이건 어느 점쟁이가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이런 변환기에 국민들이 방황하고 있으니까 국민들이 불안해하지 않고 심리가 안정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국민 행복도를 높이는 행복 운동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는 그냥 종교활동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이런 활동만 할 거라면 굳이 통일의병을 만들 필요가 없어요.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 더 나아가서는 동북아의 신질서 구축 과정에서 우리가 남북관계, 한미관계, 한중관계, 한일관계를 어떻게 설정해 나가야 국가 발전을 지속해 나갈 수 있을지, 이런 것들을 우리가 만들어 나가기 위해 통일의병을 만든 겁니다.

그러니 통일의병은 정부가 추진하는 것을 지켜보고 잘하면 지원해주고, 잘 못하면 비판하고, 능력이 없으면 대신 그 일을 하는,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던 일은 전쟁이 일어날 위험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의 위험이 최고조로 올라갔을 때가 2017년 하반기였습니다. 2014년에 벌써 전쟁의 위험을 예측해서 통일의병 활동을 시작했지만, 2017년에 정권이 교체되고 용케 전쟁 위기가 좀 안정이 되었어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에 좀 잘하는 것 같더니 다시 정체 국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통일의병이 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막는 것만이 의병이 역할이 아니에요. 전쟁 속에 피난민이 생기면 우리는 피난민을 보살피기도 해야 되잖아요. 올해 상반기에는 북한 주민들이 경제 제재 국면에서 굶주림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해서 옥수수 1만 톤을 지원하는 일도 했습니다. (모두 박수)

통일의병의 과제는 두 가지예요. 첫째, 국가가 발전해야 합니다. 국가가 발전만 하면 국민은 고통을 겪어도 괜찮아요? 아니에요. 둘째, 국민은 행복해야 합니다. 국민은 행복해야 하고, 국가는 발전해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통일의병은 항상 국민을 생각하는 통일을 염원해야지,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국가 발전을 꾀해서는 안 됩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를 한 번 보세요. 국가는 발전했지만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한국인들만 고통을 겪은 게 아니고 일본인들도 엄청난 고통을 겼었어요. 우리는 그런 국가 발전을 호소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웃나라의 침공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하지만,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이웃나라를 침공하는 것도 용인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배타하면 비굴하게 굴복하진 않지만 우리가 나서서 이웃나라를 배타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를 지향해야지 내 민족만 잘났다는 민족주의를 지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늘 보편적 가치 위에서 부분적인 특수한 가치를 추구해야 됩니다. 만약 외국인에게까지 통일의병 운동이 확산된다면, 통일의병이 아니라 평화 의병이라고 불러야 해요. 국내에서는 통일의병이라고 이름이 붙어있지만, 실제로는 평화 의병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지켜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딱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의병이 됐으면 조금 달라져야 합니다. 굳이 정토회 정회원 중에서 또 왜 통일의병을 모았을까요? 정토회 정회원들에게도 사회적인 정의감을 가지라고 가르치긴 하지만, 그래도 정토회에서는 더 중요한 게 수행이에요. 굳이 정토회 안에 통일의병을 마련한 것은 통일의병은 개인 수행에 기초를 두지만 사회적인 정의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한번 통일의병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법문이 끝나고 통일의병의 서약문을 다 함께 읽었습니다.

이렇게 제9차 통일의병 대회를 모두 마친 후 각 지부별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통일이 미래의 희망이다”라는 문구의 현수막 앞에서 모두들 함박웃음을 머금었습니다.

내일은 문경에서 경전반 특강 수련, 부산에서 영남권 행복캠프가 열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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