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북미 서부 정토행자 대회 마지막 날입니다. 먼저 어제저녁에 진행된 즉문즉설 내용 중 하나를 소개해드립니다.

법문 들을 때는 좋은데, 현실과 마주하면 무거워집니다.

“정토회에 처음 나올 때에 비하면 마음이 많이 편해졌고, 스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가벼워집니다. 그런데 생활로 다시 돌아가 현실에서 상황과 마주하면 다시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들이 생깁니다. 지금처럼 활동하면서 계속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면 언젠가 자유롭고 가벼운 날이 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더 필요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둘 다 아닙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에 모두 크게 웃었습니다. 스님은 지금 이 순간 바로 가벼워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언젠가 자유롭고 가벼운 날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더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가벼워져야 합니다.”

“안 가벼워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안 가벼워진다는 이야기는 아직 불법(佛法)의 이치를 모른다는 말이에요.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 때는 불법(佛法)의 이치를 아는데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르는데 스스로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마음이 가볍지 않다는 것은 불법(佛法)을 아는데 잘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불법(佛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마음이 가볍지 않을 때는 불법(佛法)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법문을 다시 듣고 마음을 다시 살펴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제대로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 불법(佛法)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안 되고 있는 겁니다.

물론 법의 이치는 알지만 순간순간 나도 모르게 놓쳐서 괴로움이 생길 수는 있어요. 그럴 때는 놓치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아, 내가 놓쳤구나’, ‘아, 내가 깜빡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여기에 무슨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계속 안 될 때는 물러서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 안 되는 제 모습을 알게 되면 연습을 하기보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계속 올라옵니다. 총무 소임을 맡았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해나가기도 하고, 소임이 괴로움이 되기도 합니다. 일에 집착하게 되면 다시 정토회 일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다시 외면하고, 그렇게 집착과 외면 사이를 계속 오가며 6년을 지냈습니다.”

“6년째 헤매고 있네요. (모두 웃음) 여기에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흐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 여기서 제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지금이라도 제대로 살펴야 합니다.

오직 알아차릴 뿐

화가 날 때 ‘당신은 평생 화 안 내냐?’ 이렇게 핑계를 만들면 이건 수행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왜 화가 나는지를 계속 탐구해서 결국 화가 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꿰뚫어 아는 것,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렇게 깨닫고 나면 화가 안 나야 됩니다. 원래 화가 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는 화가 안 나지만, 나도 모르게 놓치면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 때문에 화가 버럭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 순간 ‘너 때문에 화가 났다’라고 하는 건 수행자가 아닙니다. 그건 수행자의 관점을 놓친 거예요. 순간 놓쳐서 화를 냈지만 ‘아, 내가 놓쳤구나’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는 알아차리고 돌아오는 과정만 있을 뿐이에요. 여기에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흐른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알아차리고 돌아오고, 알아차리고 돌아오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알아차림이 많아집니다. 예전에는 열 번을 다 놓쳤다면 이제는 한 번 알아차리고 아홉 번 놓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세 번은 알아차리고 일곱 번 놓치고, 또 시간이 흐르면 다섯 번은 알아차리고 다섯 번 놓치고, 시간이 더 흐르면 일곱 번 알아차리고 세 번 놓치고, 이렇게 연습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거예요. 이렇게 연습하는 과정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이런 연습이 없이 그저 시간이 흐른다고 잘 알아차려지는 게 아닙니다. 이는 마치 잠에서 깨면 깨는 것이고 아직 안 깼으면 자고 있는 것이지, 잠에서 점점 깨어나는 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드는 건 있을 수 있지만, 잠에서 조금씩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는 말은 아직 자고 있다는 뜻이에요. (모두 웃음)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깨어있거나 자고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물론 깼다가 다시 잠들 순 있어요. 그러면 다시 깨어나서 ‘아, 내가 깜빡 졸았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면 되는 거예요.”

“저도 연습을 하긴 하는데, 백 번에 한 번 정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싶어요.”

“스님이 직설적으로 말해도 괜찮아요?”

“네.”

“자기 수준에 백 번에 한 번만 알아차려도 대성공이에요. (모두 웃음) 지금 만 번을 해도 다 놓칠 수준인데 몇 년 연습해서 백 번에 한 번이라도 알아차려진다면 ‘이야, 나도 되는구나!’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자기 수준을 모르고 있으니까 ‘6년을 해도 백 번에 한 번 밖에 못 알아차리네’ 하고 한탄하는 거예요. 이야기 들으니 기분 나빠요?”

“아니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백 번에 한 번은 아니고 거의 만 번에 한 번인 것 같아요.” (모두 웃음)

“자기 수준을 제대로 알아야죠. 자기가 다생겁래 지은 건 생각하지 않고 정토회에 와서 몇 년 활동한 것으로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겠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계속 놓치면 알아차리고 또 놓치면 다시 알아차리기를 연습해서 천 번 만에 한 번이라도 깨우치면 ‘아, 나도 되네!’ 하고 기쁜 마음을 가져야 해요. 그렇게 알아차림이 많아지면 결국 백 번에 한 번 알아차리고, 열 번에 한 번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수준에 백 번에 한 번이라도 알아차리면 아주 태산 같은 깨달음이에요. (모두 웃음)

백 번에 한 번만 알아차려도 대성공

관점을 이렇게 잡아야 삶이 가벼워집니다. 예를 들어, 제가 100미터를 지금 25초에 달린다고 합시다. 3개월 연습해서 24초에 달릴 수 있게 되었다면, ‘아직 나이가 들어도 연습을 하니 1초나 줄일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3개월을 연습했는데도 1초 밖에 줄지 않네, 10초대에는 들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정신이 이상한 거예요. 자기 나이는 생각하지 않고 욕심으로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사실 한 번에 딱 알아차리는 것은 중생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북하면 다생겁래 윤회하고 산다고 표현하겠어요. 그나마 불법(佛法)을 만나서 어쩌다가 한 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살 때가 있다면 그게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늘 꿈속에 살다가 가끔이라도 눈을 뜬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잖아요. 심한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눈을 뜨는 건 기적 같은 일입니다. 눈앞에 뱀이 우글우글하고, 강도한테 쫓기다가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저 눈만 뜨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있을 때는 아무리 도망을 가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저 두 눈만 번쩍 뜨면 눈앞에 아무것도 없어요. 여러분들은 악몽을 안 꿔봤어요? (모두 웃음)

그렇게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던 일들이 두 눈만 뜨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런 경험을 살려나가면 앞으로는 어떠한 꿈을 꾸더라도 도망가지 않고 ‘아, 이거 눈만 뜨면 된다’라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안 떠지는 눈을 뜨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탁 눈이 떠지면 눈앞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부는 이렇게 중심을 잡고 해야 합니다.

공부는 관점을 제대로 잡고 해야 합니다. 이 공부는 어려우면서도 쉽습니다. 수행을 통해서 운명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입니다. 오죽하면 부처님께서도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해라’라고 하셨겠어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거 보셨어요? 지금까지 질문자가 해온 것의 천 배, 만 배는 해야지, 지금까지 한 것으로는 바위에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그렇게 중심을 잡고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조금 해 본 경험만 갖고 적당히 먹으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 관점을 잡는 것입니다. 관점을 잡는다는 것은 길을 안다는 거예요. 길만 알면 언제 도달할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헤맸다면 이제는 길을 알았으니까 가기만 하면 됩니다. 엎어지든 자빠지든 그 길로 가기만 하면 되니까 길을 모르던 때에 비하면 너무 쉬운 거예요. 이제 이 길로만 나아가면 언젠가 도달하는 것은 정해져 있는 거예요.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되고, 내일 못 가면 모레 가면 되고, 올해 못 가면 내년에 가면 됩니다. 이렇게 길을 아는 단계가 수다원과(須陀洹果)입니다.

눈을 한 번 떠보면 아무런 노력할 것 없이 눈만 뜨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나간 생각이 모두 다 번뇌 망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생이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고, 상대방이 결혼할 때 어떤 약속을 했고, 누가 바람을 피웠고, 어릴 때 성추행을 당했고, 이런 일들은 모두 눈을 뜨고 나면 다 지나간 꿈일 뿐이에요.

바로 지금 눈을 번쩍 뜬다

한 번 눈을 떠봤으면 그다음부터는 눈이 감기더라도 어떻게든 눈을 뜨려고 해야 하는 거예요. 부처님의 법을 듣고 눈을 떴다는 것은 눈을 한 번 떠보는 경험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앞으로 천 번, 만 번 악몽에 시달리더라도 도망을 다닐까요, 눈을 뜨려고 할까요?”

“눈을 뜨려고 해요.”

“눈을 뜨려고 합니다. 이것이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하고, 성인의 류(流)에 들어가는 것에 해당합니다. 이걸 선(禪)의 용어에서는 ‘초견성(初見性)’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직 이 단계에 접어들지 못한 것 같아요. 깨달음의 장에서 제대로 경험을 하면 이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살다 보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단계에 접어들면 가는 길은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흔들림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보면 아직도 눈을 감고 도망 다니는 것 같아요. 누구나 꿈속에서 강도를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을 한 번 떠 본 사람은 그 악몽 속에서도 눈을 뜨려고 합니다. 살다가 자기도 모르게 화를 내더라도 거기에 뒤끝이 있으면 수행자가 아닙니다. 화를 벌컥 내더라도 ‘아, 내가 놓쳤구나’ 하고 탁 제자리로 돌아와야지, 꽁해서 열흘이나 가지고 있다면 그건 수행자의 관점을 놓친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 성질이 있는 사람이 수행자가 되면 평소보다 더 이상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평소에는 화만 내고 말았는데, 수행자의 길을 안 다음에는 화를 벌컥 냈다가 금세 또 웃으니까 주변 사람이 보기에는 더 이상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게 곧 기적입니다. (모두 웃음)

성질을 내는 것까지는 내가 조절하지 못하더라도 화를 낸 다음에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성질을 내고 화를 내더라도 인간관계가 나빠지지는 않습니다. 금방 제자리로 돌아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상대방이 순간 기분이 나빠도 사과를 하니까 봐줍니다.

관점을 이렇게 분명하게 잡고 공부를 해나가야 합니다. 이건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흐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 바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질문자는 매사에 사고방식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거기에 빠지지 말고 벌떡 일어나서 생활해야 해요. ‘아, 일어나기 싫어, 조금만 더 자면 좋겠어’라고 생각하지 말고, 시계가 따르릉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게 제일이에요. 그러면 번뇌도 한 번에 사라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계속 번뇌에 시달리다가 죽는 거예요. 죽을 때가 다 되어서 뒤를 돌아보면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아요. 저도 지금 돌아보면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아요. 이렇게 짧은 인생인데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을 하면서 살아요?”

“이게 제 습관인 것 같아요.”

“그게 곧 질문자의 까르마예요. 인생이 불행한 건 자기 까르마에 휘둘리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활동을 해나가면서 늘 연습해야 하는 건 눈을 번쩍 뜨는 겁니다. 아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연습을 하는 것처럼요.

이렇게 털끝만 한 것도 시비를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승의 말씀 중에 ‘사람 마음이 좁아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고, 마음이 넓어지면 우주가 다 들어가도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만큼 봐주려면 아무 일도 아니고, 시비를 하려면 끝이 없는 거예요. 이는 모두 내 마음의 문제이지, 상대방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마음의 원리를 알아서 그런 자기로부터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길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좋아함도 버리고, 싫어함도 버리고

괴로움은 좋음과 싫음에서 생겨납니다. 좋은 것을 따라가는 것이 탐욕입니다. 싫은 것을 억지로 시키면 그로부터 일어나는 게 미움입니다. 그리고 이 미움이 성냄의 근원입니다. 탐욕은 좋음에서 생기는 것이고, 성냄은 싫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결국 좋고 싫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심명에도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말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진리의 깨우침은 어렵지 않다. 사람이 가려 선택하지 않음이다.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면, 세상이 저절로 밝다.

해탈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곧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는 거예요. 미워하는 것은 싫음에서 발생합니다. 해탈의 길을 가려면 이 좋고 싫음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정토행자대회 3일째

새벽 5시에 일어나니 스님 방에 이미 불이 켜져 있습니다. 스님은 행자들 보다 먼저 법당으로 가서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깥에는 비가 시애틀 법당을 포근히 감싸듯 내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스님이 예불을 집전했습니다. 북미 서부지구 정토행자들은 2박 3일 동안 시애틀 정토법당에 모여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따라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어떻게 수행 정진하고,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법을 전파할 것인지 논의했습니다. 스님은 정토행자 대회에 참가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며 축원을 해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정진한 공덕으로 미주 지역의 외국인들에게까지 이 좋은 법을 전해지기를 발원하옵니다. 우리의 이 원력이 민들레 씨앗처럼 널리 퍼져나가기를 발원하옵니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서 외국인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기를 서원해 봅니다.

기도를 마치고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오늘도 설거지는 스님이 했습니다. 행자대회 3일 내내 스님은 설거지를 도맡았습니다.

이어서 모둠별로 흩어져서 10차 천일결사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이야기하고 발표했습니다.

발표한 내용을 다 듣고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수행의 길이 개인에 있어서나 나아가 세상에 있어서나 얼마나 소중한지 여러분들이 조금 아시면 좋겠습니다. 그걸 알아야 이 길을 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당당함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자신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당당함이 없어지는 거예요.

참 소중한 존재

그리고 같이 활동하는 도반의 소중함을 알면 갈등은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런 도반이라도 옆에 있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성질을 낼 때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 같이 활동하는 도반과 같은 사람을 인류 전체에서 찾으려고 한 번 해보세요. 이런 사람들은 백 명 중에 한 명, 천 명 중에 한 명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밖에 나가서 이런 사람들을 구해오려면 힘들어요. (모두 웃음)

이런 사람들이 정말 귀한 줄 알면 자연스레 도반이 귀한 줄도 알 텐데 여러분들을 보면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정토행자의 정체성은 수행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수행자라고 생각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정토회가 하는 사회활동을 보면 NGO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고, 종교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니까 종교단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고, 진리를 추구하니까 철학을 논하는 모임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토회는 수행자들의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에는 수행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흔히 ‘수행’이라고 하면 종교라는 큰 범주 안에 들어가는 무언가라고 어렴풋이 생각하지만, 수행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수행과 종교는 천양지차가 나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은 현재 인류사회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그것을 알고 자신에 대한 당당함을 가졌으면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겸손해야 합니다. 친절하게 대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자세를 겸손히 하면 저절로 친절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당당하면서 겸손한 자세입니다. 당당함과 함께 겸손함을 갖추어야지,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않으면서 겸손하려 하면 자칫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또한 겸손하지 않으면서 당당하기만 하면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중심을 바로 잡지 않으면 교만과 비굴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수행자는 교만도 버리고 비굴함도 버리고, 당당하되 겸손해야 합니다.

평소에 제가 하는 법문을 들으면 종교를 부정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과 복을 비는 종교와는 관계가 없다는 뜻이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초한 불교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진실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 담마(dharma)입니다. 이 담마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 말, 행동이 청정해야 합니다. 담마가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을 통해 실천되어야 합니다. 담마를 안다고 해도 살아온 습관이 있기 때문에 실천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도반들에 대해서도 실천이 따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목표는 분명해야 합니다. 실천 없는 바른 인식은 세상에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른 인식이 없는 실천은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에 불과합니다. 바른 인식 위에 실천이 있을 때 자발성에 기초한 행동이 됩니다. 미래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발성입니다. 인간의 모든 창조적인 행위는 자발성에 기초할 때 나올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잠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해봐요. 눈을 감으면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있나요, 없나요?”

“없어요.”

“눈을 감으면 시간의 관념이 없어집니다. 내가 젊은지 늙은지도 없어져버립니다. 눈을 감고 앉아있으면 이곳이 인도 보드가야인지, 서울인지, 시애틀인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숨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관찰하면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한 생각 놓아버리면 시간과 공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명상하면서 왜 명당을 찾습니까. 한 생각만 놓아버리면 괴로울 일도 전혀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근심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근심하고 걱정하고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머릿속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거예요. 과거에 녹화한 프로그램이 돌아가면서 어릴 때 성추행당한 기억,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기억 또는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 등 여러 가지 영상이 돌아가는 거예요. 이렇게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영상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생각을 멈추라(stop thinking)’ 하는 얘기도 여기에서 나오는 거예요.

지금 여기에 깨어있기

지금, 여기에서 바로 해탈해야 합니다. 왜 굳이 ‘10년 뒤에 해탈하겠다’, ‘죽은 뒤에 해탈하겠다’ 이런 생각을 합니까. 지금, 여기에서 스위치만 끄면 바로 해탈입니다. 다만 스위치가 잘 안 꺼지기 때문에 평소에 스위치를 끄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그 연습을 하는 게 바로 호흡을 관찰하는 거예요. 숨이 들어올 때 들어오는 줄 알고, 나갈 때 나가는 줄 알고, 오직 그것에만 집중을 하는 것이 바로 스위치를 끄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호흡에 깨어있지 않고 계속 딴생각을 합니다. 호흡만 관찰할 때는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나든 상관없잖아요. 그런 것처럼 모기가 다리를 물거나 통증이 느껴져도 육체적인 통증일 뿐입니다. 머릿속에 영상이 돌아가도 한 편의 영화일 뿐이에요. 안 아프면 좋겠고, 소리가 안 들리면 좋겠고, 영상이 안 돌아가면 좋겠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소리가 들리든 말든, 통증이 있든 말든, 영상이 돌아가든 말든, 나는 다만 숨이 들어올 때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갈 때 나가는 줄만 알면 됩니다. 그것이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이 관점만 잘 잡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합니다. 지금, 여기에 깨어있으면 ‘어릴 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남편과 이혼했다’, ‘어릴 때 성폭행을 당했다’ 이런 기억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 가난했으면 어떻고, 남편과 이혼했으면 어떻습니까. 그건 모두 지나간 일입니다. 모두 지나간 영화와 같아요. 옛날에 사장을 했으면 어떻고, 대통령을 했으면 어떻고, 인기 많은 연예인이었으면 어떻습니까. 그것 역시도 모두 지나간 일입니다. 그러니 ‘내가 젊었을 때 어땠다’ 하는 것으로 목에 힘을 줄 것도 없어요. 젊었을 때 그런 일을 했으면 뭐해요, 지금은 늙었잖아요. (모두 웃음)

또 지금은 늙었다고 하지만 10년 뒤에 돌이켜보면 지금은 그때보다 젊은 때예요. 여든 되신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흔만 되어도 뭐든지 다할 것 같다고 해요. 그래서 젊음과 늙음도 정해진 게 없습니다. 모든 게 생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이 원리만 알면 해탈이 쉽습니다. 한 생각만 탁 놓으면 해탈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한 생(生)이고, 한 생각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윤회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얼마나 많이 거듭했을까요?”

“억겁이요.”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무수히 많이 반복하기 때문에 억겁이라는 말을 쓰는 거예요. 이렇게 모든 괴로움은 내 마음에서 짓는다는 수행적 관점을 분명히 하고, 해탈과 열반을 너무 멀게 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자꾸 ‘완전한’ 해탈과 열반을 원하는데, 이 완전하다는 말 때문에 혼란이 생깁니다. 관점을 분명히 하면 지금 바로 해탈과 열반을 향해서 나아가는 거예요. 수행적 관점만 가지면 이제 이 길에 들어선 거예요. 이제는 앞으로 가기만 하면 돼요. 넘어지고 부딪혀도 다시 일어나서 가기만 하면 됩니다. 조금 빨리 가는 사람이 있고, 조금 늦게 가는 사람이 있을 뿐 조급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시와 봉사가 꼭 필요한 이유

이렇게 해서 내 인생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졌다면, 이제는 이 좋은 법(法)을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줍시다. 미국에 와서 살아보니 많은 사람들이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결혼도 서너 번씩 하는데도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봤잖아요. 전 세계에서 물질적 풍요를 가장 많이 누리면서도 경제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이 행복의 문제는 국민소득이 5만 불에서 50만 불이 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빈부격차로 인한 괴로움이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부처님이 이 법을 전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부처님은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전법을 하려면 장소가 필요하고, 또 활동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제적인 비용도 필요하잖아요. 이걸 사람들에게 얻어서 감당하려고 하면 결국 왕이나 부자들에게 손을 벌리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왕과 부자들이 주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부처님은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했어요. 먹는 것은 얻어서 먹고, 입는 것은 버려진 옷을 입고, 자는 것은 나무 밑에서 자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법(法)도 나무 밑에서 설하셨어요. 그래서 돈이 필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돈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왕이나 부자들에게 손을 벌릴 일이 없었던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 이 법은 급속도로 확산이 가능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을 거예요.

우리도 절을 지어서 시작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활동가들을 모두 승려로 만들어서 전법을 하려면 그들을 교육시키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오라, 비구여’ 하듯이 여러분들의 인식의 틀만 바뀌면 여러분들은 지금 바로 수행자입니다. 여러분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평소에 사용하는 언어로 바로 전법을 하면 됩니다. 다른 장소를 구하거나 다른 언어를 따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봉사’입니다. 전법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봉사가 필수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봉사가 없으면 결국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간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보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전혀 모이지 않는다면 공간이 필요 없기 때문에 보시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여서 논의도 하고 같이 수행 점검도 하려면 공간이 필요하고 그에 따른 비용이 발생합니다. 이걸 다른 누군가에게 얻어서 해결하려고 하면 결국 그 사람이 주인이 됩니다.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수입이 따로 없으니 보시를 할 수 없지만 여러분들은 수입이 있으니 그중 일부를 보시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스스로 운영비를 마련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활동이 가능하려면 보시와 봉사는 필수입니다.

지금처럼 여러분들이 참여해주기 때문에 이 법이 널리 확산될 수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지하기도 어렵습니다. 정토회의 시작은 법륜스님이 했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확산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보시와 봉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여러분의 보시가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고, 여러분의 봉사가 활동의 공간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너무 소중하고, 여러분은 옆에 있는 도반 한 분 한 분이 너무 소중한 거예요.

외국인에게도 이 법을 전하기 위해서

이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전법을 본격적으로 하게 될 텐데요. 외국인 전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우리들의 ‘수행’, ‘보시’, ‘봉사’입니다. 부처님은 싸우기보다는 화합하고, 차별하기보다는 개개인의 차이를 인정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수준에서는 아직도 서로 갈등하며 지내는 것이 현실이에요. 그런데 법당에 처음 오는 외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싸우고 있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그 부작용이 큽니다. 법문에서는 분명히 서로 화합하고 다름을 인정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국인에게 전법이 가능하려면 이런 공간을 마련하는 것에 앞서 우리가 가르침에 대해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화합하고, 우리 스스로 보시와 봉사에 헌신적이고, 우리가 가르침에 맞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록 작은 공간에 외국인을 초대하더라도 떳떳하게 초대할 수 있습니다.

외국인 전법을 위해서는 아직 콘텐츠 개발과 실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 내부의 준비가 아직은 더 필요합니다. 마치 아이를 키우다 보면 엄마가 정신을 차리듯이 외국인에게 전법이 시작되면 방심하고 지내던 활동가들도 정신을 차리는 일도 생길 겁니다. 외부 손님이 오면 방청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끼리는 서로 이해하며 적당하게 활동하고 지내다가 외국인이 오기 시작하면 정진하는 자세를 가다듬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모두 웃음)

외국인 전법은 공간이나 하드웨어는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두 명이 모이든, 세 명이 모이든, 우리의 수행에 대한 관점과 태도가 전법의 힘입니다. 이 부분을 꼭 명심해서 새로운 준비를 같이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행자들은 2시간 동안 법문을 해 준 스님에게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대중들은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한 공간을 다음 사람이 잘 쓸 수 있도록 대청소도 했습니다.

점심식사 후에도 스님이 설거지를 했습니다. 설거지 후에도 스님은 도량 구석구석을 다니며 나무를 가지치기해주고 도량을 정비했습니다. 회원들이 이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으로 다 함께 사진 촬영을 하고 이번 행자대회를 마무리하는 회향식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지난 2박 3일 동안 어떤 활동을 했었는지 사진 슬라이드를 함께 보았습니다. 사진을 보니 3일 동안 얼마나 치열하고 알뜰하게 보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소감을 짧게 나누었습니다.

“행복했어요.”
“도반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스님께 혼날 기회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모두들 마음이 한 결 가볍고 편안해져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회향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먼저 부처님의 전법 선언을 읊었습니다.

“오라! 수행자들이여.
여기 좋은 법이 설해져있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
자, 이제 전법의 길을 떠나거라.
세상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도록.

그동안 수고들 하셨습니다. 법당을 확대하느라, 법당을 유지하느라, 그리고 정토회 모임이 없는 곳에서 새롭게 법회를 만들고 개척한다고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뺏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수행자입니다.

수행자로 살아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나와 도반의 소중함을 알고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정토행자로서 인류문명의 발전에 작은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가지세요. 함께 즐거운 수행자의 길을 갑시다.”

스님은 시애틀 법당을 떠나는 행자들을 일일이 배웅했습니다. 행자들도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저녁에는 따로 일정이 없어 원고 교정 업무도 하고, 전화 통화를 하며 한국과 업무를 보았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비행기를 타고 북미 동부로 이동합니다. 뉴욕에 도착해서 저녁에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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