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발해의 가장 오랜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를 둘러본 후 장백으로 이동했습니다.

새벽 5시, 돈화 새벽시장에 들러 간단한 아침과 점심에 먹을 음식들을 샀습니다.

출발시간이 되자 수신기로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자, 버스는 출발합니다. 늦는 사람은 택시 타고 오세요.”

청년들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스로 버스에 탄 청년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버스를 타고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에 있는 상경용천부 성터를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버스 창 밖으로 돈화벌의 넓은 평야가 드넓게 펼쳐졌습니다.

한참을 지나니 용암이 막혀 형성된 길이 23km에 달하는 ‘경박호’ 호수를 만났습니다. 등소평은 ‘중국 동북지역에 와서 백두산과 경박호를 보지 않았다면, 동북지역을 봤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넓고 아름다웠습니다.

어느덧 2시간이 훌쩍 지나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에 도착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빼곡히 일렬로 늘어선 백양나무였습니다. 스님은 백양나무를 가리키며 “저것이 상경용천부의 외성입니다. 성벽 위에 나무가 빼곡이 심어져 있는 거예요.”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조금 더 지나자 성벽이 가까워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남쪽 성벽을 넘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바깥에 성벽이 보이죠?”

“네!”

낮게 남은 성벽 위로 풀이 자라있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마치 옛 발해 궁전으로 들어가는 듯 했습니다.

상경용천부 외성 안으로 들어온 후 가장 먼저 ‘흥륭사’라는 절에 도착했습니다. 흥륭사는 발해 시대 때 세워진 절인데 불상과 석등은 발해 시대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발해 시대의 대불을 참배한 후 다같이 예불을 올렸습니다.

예불을 마친 스님은 발해 멸망 후 1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선조들을 찾아와 죄송하다고 하면서 함께 찾아온 청년들이 동북아 역사기행을 무사히 잘 마치고 남북의 평화적인 통일에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발원해 주었습니다.

법당을 나온 대중들은 발해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인 ‘석등’을 배경으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석등은 국사 교과서에도 자주 나와서 다들 기억이 나실 겁니다.

궁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상경성 박물관에서 상경용천부가 복원된 모형 구조물을 보려고 했지만 자물쇠가 채워져있었습니다. 아쉽지만 먼저 동궁 옆에 마련한 정원인 어화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 연못이 어화원입니다. 연못을 사람 얼굴처럼 만들어 놨습니다. 가만히 보시면 두 눈을 만들고, 구름다리로 안경을 씌우고, 코를 그리고, 얼굴 밖에는 양쪽 귀가 언덕 모양으로 있습니다. 현재는 두 눈과 두 귀는 있는데 코만 없어요.”

스님은 이 부분이 ‘눈’, 이 부분이 ‘귀’ 라고 하면서 이곳저곳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스님 설명처럼 정말로 언덕 모양으로 생긴 두 눈과 두 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얼굴 모양의 연못을 만든 발해인들의 재치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어화원을 나와 궁성의 정문인 오봉루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발해를 마음껏 느껴봅시다. 역사기행을 처음 개발할 때는 고구려가 중심이 아니고 발해가 중심이었어요. 왜냐하면 고구려는 여행사에서도 일부 갈 수 있잖아요. 발해는 전혀 못가니까 여기까지 오는 사람도 없었거든요. 옛날에는 도로가 안 좋아서 진짜 오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발해를 3일 동안 봤어요. 중경현덕부, 훈춘에 있는 팔련성, 동경용원부, 동모산도 다 올라가봤는데 이제 중국 정부에서 막아서 못가게 하니까 결국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오늘 상경용천부 한 곳 뿐이에요.”

발해를 마음껏 느껴보자는 말에 청년들은 무척 좋아했습니다. 오봉루에 도착해서 스님은 재미난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왕성 성벽입니다. 우리가 서있는 이 곳이 주작대로에요. 특이한 것은 성벽에 성문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오봉루는 정면에 문이 없습니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예요. 고구려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옹성을 만들었어요. 발해는 정문이 없는 대신 양쪽에 문이 있어요. 그리고 이 위에 큰 누각이 2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누각은 1800년대 말까지 남아 있었는데, 그 사진도 남아있습니다.”

오봉루 앞에서 단체티를 입고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가지런하게 잘 쌓인 발해 시대의 석축 앞에서 청년들은 발해인들의 웅대한 기상을 다시 한 번 꿈꾸며 환한 웃음을 보였습니다.

오봉루를 지나 궁성으로 들어서자 넓은 궁터에 가득 핀 예쁜 꽃들이 반겨주었습니다.

스님은 오봉루에서 1궁전으로 이어지는 회랑으로 청년들을 안내했습니다. 회랑이 얼마나 컸는지 그 크기에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이곳은 회랑이에요. 회랑이 어마어마한 크기죠? 가운데는 왕이나 왕족이 다니고, 하나는 대신들이 다니고 나머지 하나는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녔습니다.

여러분이 가서 한 번 걸어보면 내가 왕족이었는지, 귀족이었는지, 궁중의 무수리였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풀밭에 신발 버리기 싫고 옆에 따로 난 길이 더 좋다면 천민이에요.(모두 웃음) 나는 다녀보면 천민이 다니는 길이 제일 좋아요.”

스님의 위트 있는 이야기에 모두가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의 안내에 따라 1궁전에서부터 궁성의 맨 뒤쪽에 위치한 북쪽 성문 앞까지 계속 걸었습니다. 성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성을 한바퀴 다 도는 것이 만만치 않았지만, 맑은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다들 발걸음이 가벼워보였습니다.

스님은 발해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었습니다

“발해의 흥망성쇠는 통일신라의 흥망성쇠와 비슷합니다. 통일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676년에 나라가 시작되었고, 발해는 698년에 시작되었느니까, 발해의 건국이 22년 늦습니다. 그라나 망한 시기는 거의 비슷해요. 발해는 926년에 망했고, 신라는 936년에 망했습니다. 서로의 관계 때문에 망한 것은 아니에요. 발해도 오랫동안 태평성세를 이루면서 내부 분열이 생겼고, 신라도 호화롭게 살다가 왕권 다툼과 지나친 사치, 이에 대한 민중의 반란에 의해 망했어요. 당나라도 그 시기 즈음 망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를 대신해서 송나라가 일어났고, 신라를 대신해서 고려가 일어났고, 거란이 일어나서 발해를 멸망시킵니다.”

북쪽 성문에 도착해서 궁성 쪽을 바라보니 5궁성에서 1궁성 쪽으로 나아갈수록 궁터의 지대가 점점 높아져 궁터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계획되어서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이러한 설계를 할 수 있었던 발해인의 지혜에 감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북쪽 성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땀을 식혔습니다. 스님은 ‘황성 옛터’라는 노래와 ‘발해를 꿈꾸며’ 라는 노래를 함께 불러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황성 옛터’ 노래는 최고령 참가자가 멋들어지게 불러주었습니다. ‘발해를 꿈꾸며’ 노래는 청년이 불렀는데 노래도 잘 불렀지만, 가사도 귀에 쏙쏙 들어와서 ‘서태지보다 잘했다’며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두 곡 모두 딱 이 장소에서 부르면 알맞은 노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사가 너무나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나니 지금은 비록 한반도가 둘로 나뉘었지만 대륙을 경영했던 발해인들의 기상이 더욱더 가까이 느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북쪽성문에서 다시 오봉루로 걸어나왔습니다. 걸어나오는 길에 조원들과 삼삼오오 모여 성벽에서, 꽃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상경용천부를 마음껏 즐겼습니다.

입구에는 넓은 솔숲이 있었는데 돗자리를 펴고 점심 도시락을 먹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돈화 새벽시장에서 사온 음식들을 나눠 먹으며 상경용천부 성터를 둘러본 소감을 정겹게 나누었습니다.

상경용천부 관람을 모두 마치고 성터를 나가는 길에는 이곳에 성을 쌓기 위해 돌을 캐내오느라 생겼다고 하는 호수 ‘현무호’를 볼 수 있었습니다.

현무호를 지나자 목단강이 나타났습니다. 목단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지날 즈음 스님은 저 멀리 강이 굽이쳐 흘러가는 지점 가리키며 “홍수가 나서 잘 보이지 않지만 저기에 칠공교가 놓였던 기둥 7개가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칠공교는 거란족과 발해가 서로 교류했던 길인 ‘거란로’와 연결되는 다리입니다.

이제 버스는 발해진을 출발해 장백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이동시간을 활용하여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청년들은 역사기행을 하며 궁금했던 점에 대해 많은 질문을 스님에게 했습니다.

한 청년은 ‘스님은 어떻게 북한 식량난으로 인한 아사자가 300만 명이었는지 알아낼 수 있었는지?’라고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우리가 지나가는 이 길이 바로 탈북 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걸어야 했던 길이었다고 설명하면서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북한 난민들이 막 생겨날 때 조선족 사기 피해자가 생겨났고, 제가 연변에 와서 조선족 사기 피해자들의 현황을 듣고 한국에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정부와 얘기해서 조선족 사기 피해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비자 문제를 교섭해주었어요. 이렇게 해서 사기 피해자 분들의 지지를 받게 됐습니다.

그 후 북한 난민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돼서 북한을 돕다 보니까 이 일은 우리가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조선족 분들에게 좀 도와달라고 하니까, ‘우리 코도 석자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또 중국 법 때문에 못 돕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당신들 참 너무합니다. 당신들이 어려울 때는 내가 당신들을 도왔는데, 당신들보다 더 어려운 이 사람들을 당신들이 안 돕겠다고 하면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들을 도와야 합니까?’

‘스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가 돕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족 사기 피해자들이 북한 난민 돕기에 나서게 된 거예요. 중국 전역에 북한 난민이 엄청나게 넘어와 있으니까 이분들이 동네마다 난민들을 조사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지금 북한 사람들이 진짜 많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 이건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합니다’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믿지를 않았어요. 한국 정부에 얘기해도 믿지 않았고요. 그래서 제가 김수환 추기경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아무리 얘기해도 안 움직이니까 우리가 죽어야 이 일이 성사되겠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죽어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추기경님이 단식을 하다 죽으면 세상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님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려고 하면서 죽자고 하면 어떡합니까? 살릴 길을 한번 찾아봅시다.’

그래서 북한동포돕기 백만인 서명 운동이 시작된 거예요. 김수환 추기경님을 고문으로 모시고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는다. 빨리 식량지원을 해라’ 이런 내용의 백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때는 정토회 전체가 이 일에 전력투구를 했습니다.

북한 아사자 수 300만이 나오기까지

그런데 아무리 호소를 해도 사람들이 안 믿으니까 통계 자료를 준비하게 된 거예요. 북한 사람들이 굶어죽었다는 얘기를 한국 사람들은 부정만 할 뿐 딱히 증거를 내놓으라는 소리는 안 했어요. 그런데 미국 가서 이 얘기를 하니까 증거를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북한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객관적 자료를 만들기 위해 북한 난민들을 인터뷰하게 되었습니다.

북한 난민들을 인터뷰할 때 준비한 질문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1995년부터 1998년 사이에 당신 가족 중 몇 명이 죽었느냐’를 물었습니다. 둘째, ‘당신이 사는 반의 총 반원은 몇 명이며 지난 3년 동안에 몇 명이 죽었느냐’를 물어봤습니다. 북한에서는 마을을 ‘반’이라고 부릅니다. 한 반은 20호 정도 돼요. 이렇게 두 가지 통계를 내서 조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280여 명을 조사해서 전체 인구수에 적용해보니 250만 명 정도 죽었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미국에 가서 얘기를 했더니 객관적 자료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죽는다는 사실에 동의는 하는데, 280여 개의 샘플은 통계상 별로 가치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만 조사하는 데도 두어 달이 걸렸는데 증거를 더 내놓으래요.

그래서 다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470여 명을 조사해서 증거를 냈고, 그것도 부족하다고 해서 800여 명을 더 만나서 전부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는 2000여 명을 조사했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 통계를 내서 북한 식량난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적어도 300만 명 이상이라는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이 작업은 모두 통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탈북 난민 수 30만이 나오기까지

그 다음은 북한 난민이 중국에 얼마나 사는지를 조사했는데, 조선족 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6개월간 중국의 2500개 마을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두 가지 조사를 했는데, 첫째, 민족 구성을 기준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조선족 마을은 조선족 인구가 총 얼마인데 개중 난민이 몇 명 있다, 한족 마을 인구는 총 몇 명인데 난민이 몇 명 있다, 반반 섞인 마을은 어떻다, 이렇게 민족 구성을 기준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둘째, 국경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나누어서 조사를 했습니다. 국경에서 10킬로미터 안에는 난민 분포율이 얼마, 50킬로미터 안에는 난민 분포율이 얼마, 100킬로미터 안에는 난민 분포율이 얼마, 200킬로미터 안에는 난민 분포율이 얼마라는 걸 조사했어요.

이렇게 거리와 민족 구성에 따른 마을 샘플 2500개를 조사해서 통계를 내보니 최소 30만 명에서 최대 50만 명에 달하는 난민이 중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됐어요. 이 통계를 유엔 난민기구(UNHCR)에 가져가 발표하고, 설득하고, 난민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여론화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던 기적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대학을 휴학하거나 직장을 그만두고 이 일에 참여한 많은 젊은이들의 열정 덕분입니다. 둘째, 중국 조선족 중 뜻있는 분들이 이 문제에 총 지원을 해준 덕분입니다. 우리만 갖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어요. 우리는 중국 내 동네 하나의 인구 조사조차 할 수가 없잖아요. 조선족 분들은 다 현지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분들이었어요.

이런 참상을 방치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이런 자료를 전부 다 받아 통계 처리를 해서 두 가지 큰 통계를 얻었습니다. 하나는 북한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느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 내 북한 난민들이 얼마냐는 거였어요. 여기에 보태서 세 번째, 난민 인권침해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도 조사했습니다. 이런 걸 작성해서 UN에 보고하고, 미 국무성을 설득했어요.

‘인도적 지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참상을 방치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이렇게 설득을 했죠. 그때는 제가 매일 울고 다니다시피 하면서 강연회를 하고, 1년에 대여섯 차례 미국에 가서 설득하고, 이 국경 변을 매달 답사했습니다.

어쨌든 그 결과로 미국과 UN에서 인도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한국에서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인도적 지원이 이루어져서 이 문제가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됐습니다. 어쩌면 죽을 만큼 죽어서 해결됐다고 볼 수도 있고요.

그 뒤에 2008년에도 다시 북한에 식량난이 발생했는데, 그 때는 제가 70일 동안 단식을 하며 인도적 지원을 호소했어요. 또 다시 그런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작년부터 식량난이 다시 발생했다고 해서 올해 옥수수 1만톤을 보내는 일을 했는데요. 이런 활동을 하는 이유는, 1995년 그때는 몰라서 이런 희생을 치렀지만, 이제는 알면서도 같은 희생을 두 번 치르게 한다면 범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고 밝힐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협조가 있었던 덕분입니다.

목숨을 걸고 북한 식량난 해결에 뛰어든 사람들

감옥에서 탈출하는 내용을 다룬 영화 ‘빠삐용’ 아시죠? 북한 난민 중에 별명이 빠삐용인 분이 있었어요. 북한 감옥을 다섯 번 탈출했다고 해서 우리가 빠삐용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거예요. 제가 장백을 가다가 백두산에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서 차에 태워 연길에 데려왔어요. 가방 안을 보니 누가 먹다 버린 음식찌꺼기를 모아 놓았고, 옷도 형편없고, 냄새도 심했어요. 그런 사람을 우리가 살린 거예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자기 얘기를 하는데 이번이 다섯 번째로 넘어온 거래요. 이 얘기를 듣던 우리가 ‘와, 이건 빠삐용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별명이 빠삐용이 됐어요.

그 사람더러 한국에 가서 편안하게 살라고 하니까 목숨을 걸고 북한 식량난 문제 해결을 돕겠다고 나섰어요. 어차피 죽을 목숨을 살려준 것이니 북한의 식량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자기는 죽어도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북한에 의도적으로 들어가서 정보를 수집해 가져오는 일을 했는데, 마지막에는 몇 개월간 북한 전역을 다니면서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전부 기록했다가 국경을 넘어왔을 때 그 자료를 건네줬어요. 그걸 책으로 출판한 게 ‘고난의 강행군’이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북한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고, 중국으로 넘어온 난민이 얼마나 많이 생겼으며, 인권 침해가 얼마나 많이 일어났느냐를 책으로 출판한 것이 ‘두만강을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지금이야 북한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편이지만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 겪은 고난의 행군 시절을 아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 상황이 어떤지 전하는 이런 책을 우리가 출판했었던 겁니다.

또 이 사람이 북한에 들어갈 때는 돈을 가지고 들어가면 빼앗기고 잡히니까 100달러짜리를 돌돌 말아서 준비해 주었어요. 지폐를 힘을 줘서 돌돌 말면 이쑤시개처럼 되는데 이걸 얇은 비닐에 딱 말아서 이 사람이 먹습니다. (모두 놀람)

그렇게 해서 북한으로 넘어간 후 며칠 있다가 똥을 누면 그게 밖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가져간 달러를 바꿔서 경비로 썼는데, 마지막으로 들어갔다가 연락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죽었다고 봐야 하겠죠. 살았으면 안 나올 리가 없으니까요.

빠삐용 이후에도 희생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활동가 중에서도 이 일을 하다가 병으로 죽은 사람도 있고, 북한 사람도 많이 죽었습니다. 그런 희생을 통해서 북한 사람들이 겪은 식량난과 인권침해의 고통을 우리가 세상에 알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살았구나’ 했을 때 만난 검문소

우리는 지금 백두산 서편에 있는 송강하라는 지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 길을 지나서 백두산 서편에서 남편으로 가게 되는데, 가는 길에 민간인 마을은 ‘만강’이라고 하는 마을 하나밖에 없습니다. 20년 전 난민들이 많이 넘어올 당시 만강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어요. 주로 나무를 베는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살았습니다. 거기에 만강진 검문소가 있는데, 이 검문소가 난민들에게는 피눈물의 검문소였습니다. 압록강 상류인 혜산에서 장백을 건너 백두산 고개를 고생 끝에 넘어온 난민들이 ‘이제는 살았구나’ 할 때 전부 만강 검문소에서 다 잡혀서 송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길이 하나밖에 없으니 안 잡히려면 산속으로 가야 하는데, 겨울에 산속으로 가면 얼어 죽습니다. 빠삐용도 백두산 산속으로 차를 타고 가다가 만났어요. 가다 보니 무슨 동물이 ‘푸드득’ 하고 숲으로 숨는 것 같았어요. 이게 뭔가 싶어 차를 세워놓고 보니까 애처럼 보이는 새카만 청년이 숲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거예요. 길가로 데리고 나와 살펴보니까 다 죽어가는 상태예요. 길을 찾아오다가 차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고 숨었던 거죠. 만강 검문소는 통과하면 잡힐 수밖에 없으니까 차는 빈차로 보내고, 그 청년을 제가 업다시피 해서 산길을 빙 둘러갔습니다. 그렇게 검문소를 건너와서 다시 차를 태워 연길까지 데려왔어요.

그 이후에도 우리가 백두산을 넘나들면서 그런 난민들을 수없이 만났는데, 도저히 다 구제할 수가 없기 때문에 돈이든 음식이든 뭘 주고 그냥 보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번은 모자를 만났는데 도무지 데려갈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돈을 줘서 북한으로 돌아가서 살라고 돌려보내기도 했어요.”

차창밖으로 보이는 캄캄한 숲 사이로, 하나 뿐인 도로 위로 불안에 떨며 숨어다녔던 난민의 모습이 그려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버스는 곧 만강검문소에 멈춰섰습니다. 한 명 한 명 여권을 확인하고 나서야 검문소를 지날 수 있었습니다.

오전 11시에 출발해 저녁 10시에 장백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긴 시간이었지만, 청년들은 노래를 부르거나 즉문즉설을 하면서 지루하지 않게 11시간을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에 기상해서 발해 시대의 탑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영광탑을 참배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압록강변을 따라 이동하며 북한의 국경변과 뙈기밭의 모습을 버스 창밖으로나마 바라보게 됩니다. 오후에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에 도착해 환도산성과 국내성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스님의하루 텔레그램 구독하기

<스님의 하루>에 실린 모든 내용, 디자인, 이미지, 편집구성의 저작권은 정토회에 있습니다. 허락없이 내용의 인용, 복제는 할 수 없습니다.

<스님의 하루>를 읽고 댓글로 마음을 나눠보세요. 단, 욕설, 비방, 광고, 도배하는 댓글은 관리자가 임의로 삭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