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입니다. 오늘은 북간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와 발해의 유적지를 탐사했습니다.

새벽 4시, 연길 시내 어두운 거리 위로 부슬부슬 비가 내립니다. 청년 역사기행단은 새벽시장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청산리 전투터로 출발했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스님의 목소리가 수신기를 통해 들려옵니다.

“어제 버스에서도 강의를 못했고, 저녁에 도착해서 강의를 하고 자야하는데 늦게 와서 못했어요. 이렇게 공부를 안 하고 다니면 유적지를 아무리 많이 가도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 우리가 어디를 가고, 뭐하러 다니는 지 알고 다녀야 해요. 아침에 졸릴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공부를 좀 합시다. 정신을 차리세요.”

“네!”

정신 차리라는 말에 졸음이 달아났습니다. 스님은 먼저 일제 식민지 당시 무장투쟁의 중심이 되었던 ‘북간도’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북간도는 두만강 중류, 상류를 넘어온 우리 민족이 정착한 곳이며 현재 지명은 연변조선족자치주입니다. 한 때는 발해의 수도권이기도 했습니다. 발해가 망하고 세월이 흘러 청나라를 건국한 누르하치가 자기 조상이 태어난 백두산 근처 200km 이내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봉금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자 이 곳은 황무지로 변했습니다.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던 조선 말기, 국경지역의 조선인들은 가난과 핍박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생계형 이주가 많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한일합방을 지나며 독립운동의 뜻을 가진 사람들이 북간도로 많이 넘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유명한 봉오동 전투, 청산리전투가 일어난 곳도 바로 이 곳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다보니 청산리 근처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러나 지난 1차 역사기행 때처럼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라 청산리전투터 기념비까지 대형버스가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저 멀리 청산리 마을을 바라보며 버스 안에서 청산리 전투에 대해 배웠습니다. 버스 창밖으로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습니다.

청산리 전투터

1920년 6월 봉오동전투로 일본 정규군 150여명이 사망합니다. 화가 난 일본은 마적단을 매수해서 일본영사관과 일본국민들을 습격하도록 한 후 독립군이 한 짓이라고 조작합니다. 그리고 일본 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독립군을 토벌하기 시작했습니다. 독립군이 일본 군대의 추격을 피해 백두산 골짜기로 피신하는 중에 일어난 전투가 청산리 전투입니다.

“독립군들이 백두산 산록으로 숨어 들어가자 일본군이 계속 포위해 따라왔습니다. 해란강을 따라 계속 올라오면 백운평이라는 곳이 있어요. 청산리가 그 아래에 있고요. 청산리에서 골짜기로 6킬로미터를 들어가면 백운평이 나옵니다.

현재 기념비석은 청산리 입구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운평까지는 안 들어가고 기념비석만 보고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올해 빼고는 백운평까지 다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도로 공사를 하느라 땅을 파헤쳐 놓은 데다 지난주에 비가 많이 와서 도로가 유실되어 버스가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해요. 아예 접근이 안 되니까 들어가고 싶어도 방법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청산리까지 가서, 그 위로 버스를 못 들어가게 하면 편도 6~8킬로미터, 왕복 최대 16킬로미터 정도를 행군해서 걸었거든요. 그런데 아예 여기서부터 차단이 되니까 지금은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김좌진 장군 부대는 이 청산리 길로 쭉 올라갔어요. 백운평은 20호 정도 사는 마을입니다. 거기서 저녁을 먹고 골짜기를 따라 계속 올라간 거죠. 그 뒤를 추격해온 일본군이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바로 오늘 저녁, 몇 시간 전에 밥을 먹고 갔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계속 추격해서 올라갔는데,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등이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공격한 겁니다.

백운평 위로 계속 올라가면 직소택이라는 지역이 있어요. 골짜기가 갑자기 좁아져서 아주 협소한 골짜기가 나옵니다. 마침 때도 밤이었고요. 독립군이 도망을 가다가 ‘아, 여기서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공격하자’ 이렇게 됐던 거예요.

일본 군대는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오늘 저녁이면 이놈들 다 잡겠다’ 하면서 골짜기를 그냥 쭉 추격해 올라왔어요. 독립군이 자기들을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양쪽에서 막 총을 쏴대는 겁니다. 상대가 아무리 무장이 부족하다고 해도 유리한 고지에서 갑자기 공격을 하고, 때가 밤이다 보니 대응을 제대로 못해서 많은 전사자를 냈습니다. 그게 10월 21일 새벽에 벌어진 일입니다. ‘김좌진 지휘 하의 백운평 전투로 일본군 200~300명이 전사했다’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

그런데 김좌진 장군은 이 골짜기로 왔고, 홍범도 장군은 건너편 골짜기로 갔습니다. 건너편은 완루구라는 곳인데, 백운평 바로 옆에 완루구가 있습니다. 완루구 골짜기로 갔더니 거기도 역시 일본군이 공격해왔어요.

봉오동 전투에서도 그랬지만 홍범도 장군은 전투에서 적을 유인하는 전략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적의 선발대가 따라오면 전투를 벌이다가 전투를 끝까지 하지 않고 피합니다. 그렇게 해놓고 뒤에 가서 때려요. 그러면 적의 선발대가 ‘놈들이 여기 나타났다. 빨리 군대를 보내라!’ 해서 군대가 큰 규모로 오면 그 중간에다가 총질을 몇 번 해서 자기들끼리 싸우도록 만들었어요. 여기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해서, 자기들끼리 밤새도록 싸우도록 한 거예요. 그래서 일본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것이 완루구 전투예요. 홍범도 장군이 이끈 완루구 전투에서도 일본군 200~300명이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김좌진 장군은 전투에 승리하고 적이 후퇴할 때 추격하지 않았어요. 더 이상 뒤를 쫓지 않고 다시 피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본군이 철수하다가 백운평 마을에 이르러 보복을 합니다. 참패해서 기분이 나쁘니까 20호 정도 되는 마을에 온통 불을 질러놓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을 한 명도 남김없이 총으로 쏴 죽여 버렸어요. 이런 대학살이 일어난 곳이 백운평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이 일이 어떻게 바깥에 알려졌을까요? 마침 그날 밤에 다른 마을에 볼일을 보러 간 동네 사람이 한 명 있었던 거예요. 다음날 새벽에 돌아와 보니 동네가 없어지고 사람은 다 죽어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민간인을 학살한 것은 큰 범죄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독립군이 들으니까 천수평이라는 곳에 일본군 기병 120명 가량이 주둔하고 있다는 거예요 밤새도록 달려서 그날 새벽에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일본 군인들이 한창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습을 했고, 120명 중 4명을 제외한 일본군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 4명이 도망을 갈 때 총기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을 갔어요. 버리고 간 지도를 보고, 일본군 본대가 그 아래 있는 어랑촌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두 번의 승리에서 얻은 무기로 무장도 새로 해서 22일 오전에 산 위에서 본대를 딱 포위했습니다. 유일한 고지를 점령해서 공격을 가한 거예요.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아무리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이미 낮이 됐고, 적은 여기가 본대니까 포병이 있었어요. 포병이 막 대포를 쏘니까 아군 전사자가 많이 발생했어요. 일방적인 승리를 못하고 교전 상태가 돼서 아군 전사자가 자꾸 발생하니까, 김좌진 장군이 급히 홍범도 장군에게 연락해서 적의 뒤를 쳐달라고 했습니다. 연락을 받은 홍범도 장군이 뒤로 돌아가 적의 배후를 공격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일본군대도 견디지 못하고 천여 명이 전사합니다. 사실 청산리 전투는 규모로 따지면 작은 편이고, 이 어랑천 전투가 최대의 전투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이 후퇴하게 됐어요.

그 뒤에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 부대는 피신을 했는데, 일본군이 그새 정비를 해서 또 따라와요. 그래서 고동하에서 전투를 치렀어요.

이런 식으로 10월 21일에 시작해 10월 26일까지 계속된 전투 전체를 ‘청산리 전투’라고 합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어난 전투를 ‘청산리 전투’라고 하고, 크게는 이 전체를 일러서 ‘청산리 전투’라고 합니다. 전체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 장군뿐 아니라 홍범도 장군과 여러 독립군들이 함께 치른 전투예요. 그러니 너무 김좌진 장군 얘기만 하는 관점은 청산리 전투가 약간 축소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가 어마어마했습니다. 1개 사단 병력이 1만 2천 명 정도 되는데 죽거나 다친 사람이 3,300명이니까 4분의 1이 궤멸된 셈이잖아요. 이제 일본은 군대만 파견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독립군이 은거할 수 있는 골짜기 구석구석까지 들어가서 거기 사는 우리 조선인에게 다 소개명령을 내렸어요. ‘다들 철수하라. 시내로 모두 철수하라.’ 산에 있는 건 다 독립군 근거지가 되니까요.

그런데 여기 이민 와서 30년, 50년씩 개간해서 겨우 집 짓고 사는데 마을 전체를 철수하라니까 사람들이 그 말을 듣기가 어렵잖아요.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기 전 재산을 다 버리고 내려오라면 내려와지겠어요?

그래서 안 내려가겠다니까 집에다 불질러버리고, 식량도 불질러버리고, 사람도 총으로 쏴버렸어요. 그 결과 수천 명이 죽고, 수많은 집이 불살라지고, 식량도, 농토도 잃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극이 바로 ‘경신대참변’이에요.

전쟁에서 어떤 승리만을 생각할 게 아니에요. 우리는 그런 승리만을 칭송하지만, 그 뒤안길에 민중의 피해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 사람들은 나라가 보호를 못해줘서 이곳 남의 나라로 건너온 사람들이에요. 수십 년을 피땀 흘려 개간한 끝에 겨우 먹고 사는데, 나라 잃었다며 나라 되찾자고 찾아온 사람들이 아들 내놓으라 해서 아들 보내주고, 식량 달라고 해서 식량 보내줬어요. 그런데 결국 남은 것은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전 재산이 불타고 사람이 죽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국가가 정말로 국민들을 생각한다면 추진하는 일의 결과를 두루 생각해야 합니다. 자꾸 애국만 주장하는데, 그 애국 아래에서 민(民)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를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해요. 전투를 피해야 한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니에요. 승리만을 얘기할 게 아니라 그 뒤안길에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을 늘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청산리를 직접 내 발로 밟아볼 수는 없었지만, 자세하고 생생한 설명을 들으니 전투의 현장에 다녀온 듯 했습니다. 청산리전투로 유명한 김좌진 장군보다 처참하게 희생당한 민중이 더욱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스님은 청산리전투 이후 간도대참변, 자유시참변까지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이제 버스는 대종교 3인묘로 향했습니다. 대종교는 1920년까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묘소에는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 2대 교주 김교헌,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의 무덤이 나란히 있습니다. 버스 안에서 대종교와 세 분에 대해 미리 학습하고 내렸습니다.

미끄러운 흙길을 올라 무덤입구까지 갔는데 지난 주에는 없었던 자물쇠가 잠겨있었습니다. 무덤입구에서 세 분을 애도하는 묵념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이어서 방문한 곳은 발해의 두 번째 수도였던 중경현덕부 유적지입니다.

발해의 두 번째 수도

발해 중경현덕부 유적지는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버스를 세워두고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창문 넘어 중견현덕부를 바라보았습니다.

“자, 오른쪽을 보세요. 여기가 발해의 두 번째 수도인 중경현덕부입니다. 발해는 첫 번째 왕이 고왕인 대조영이고, 두 번째 왕이 무왕인 대무예이고, 세 번째 왕이 문왕인 대흥무입니다. 발해는 3대 문왕 때 돈화에서 이곳 화룡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사를 온 이곳이 중경현덕부입니다. 왜 이사를 왔을까요? 여러 학설이 있지만 화룡은 돈화보다 기온이 평균 2~3도가 더 높다고 해요. 그런데 14년 만에 다시 상경용천부로 수도를 옮깁니다. 그 이유는 제국의 수도로는 이곳이 좁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19세기 말에 이민을 온 조선 사람들이 옛 성터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어요. 세상에 밝혀지지도 않은 곳인데다, 그 분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잘 아는 게 아닌데 제가 25년 전에 답사하면서 참 설명하기가 어려웠어요. 멀리 흑룡강성에 있는 발해진으로 온 조선족들도 그렇고, 중국에도 광개토대왕비석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조선족 소학교를 운영했어요.“

다음 목적지는 용정에 있는 일송정이었습니다. 비가 내려 안개가 자욱한 계단을 걸어올랐습니다.

“이야, 잘 보이네요. 구름이 잘 보이네요. 구름 사진 실컷 찍으세요.” (모두 웃음)

‘일송정 푸른 솔은~’ 으로 시작하는 선구자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의 일송정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중국까지 와서 독립 운동을 해나가고 있었지만,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통합 독립군은 와해되고 일본의 탄압은 더 거세지면서 독립운동에 어려움을 겪게되자 답답한 마음에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다함께 선구자를 불러보았습니다. 안개 속에서 읊어지는 목소리는 애잔함과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당시 선조들의 마음을 작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청년 기행단 모두가 스님의 선창으로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며 고향을 그리워했던 선조들의 마음도 느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나자 신기하게도 안개가 걷혔습니다. 청년들은 기뻐하며 용정을 내려다보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어느덧 점심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고, 용정 시내로 냉면을 먹으러 갔습니다. 시내에 들어가자마자 용문교와 용두레 우물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대성중학교를 잠깐 들른 뒤 용정에서 다음 목적지인 도문으로 향했습니다.

도문에서는 조중 우호교와 봉오동전투터를 방문했습니다. 먼저 조중 우호교로 향했습니다. 이틀 전에도 이 곳에 왔었지만, 그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워진 다음이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밝을 때 다시 한 번 왔습니다. 청년 기행단은 그곳에서 북녘땅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다 볼 수 있게 된 것은 숙소를 이도백하에서 돈화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모두 박수)

원래 오늘 백두산에 오르는 날이라 백두산 근처에 숙소를 예약해두었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다시 백두산까지 4시간 이상 이동해야 했습니다. 스님은 이동하는 동선에 맞게 숙소를 옮겼습니다. 예약한 숙소를 취소하고, 새로운 숙소를 잡느라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여유있게 훨씬 많은 유적지를 둘러보고 길 위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버스는 다시 한참을 달려 봉오동 전투터에 도착했습니다.

“저기 보세요. 저 두 산 사이 골짜기가 봉오골입니다.”

봉오동전투터로 가는 입구에는 봉오저수지가 생겨 그 안으로 입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저수지 안에 기념비석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기념비석까지도 갈 수 없게 막아 놓았습니다. 저수지 앞 대문에서 저 멀리 봉오동골을 바라보며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봉오동전투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1917년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8년에 윌슨이 약소민족의 독립을 약속하는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그 목적은 독일이 지배하던 발칸반도의 약소민족들을 독립시켜서 독일의 세력을 축소시키려는 것이었지만 세계 사람들은 모든 약소민족을 해방시켜주자는 것으로 오해한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패전국인 독일에 대해서만 민족자결주의가 적용되고,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연합군에 대해서는 하나도 적용이 안 됐습니다.

우리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서 결국 1919년에 3.1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의 강력한 무력진압에 의해 평화적인 시위가 비참하게 무력으로 진압을 당했어요. 이 결과에 실망한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분개했습니다.

‘그래, 일본이 저렇게 무력으로 진압하는데 평화운동이니 만세운동 갖고 뭘 하겠느냐? 평화운동이 애초에 잘못됐다. 일본이 저렇게 무력으로 탄압하니 우리도 무력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해서 무장투쟁의 분위기가 급격히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상해임시정부 같은 경우는 망명가들이 모였으니까 무장투쟁을 할 수가 없었어요. 무장투쟁을 하려면 근거지가 있어야 하고, 그 배후가 되는 인민들의 지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로 급격하게 떠오른 곳이 서간도, 북간도, 연해주 같은 지역이에요.

그런데 연해주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굉장히 앞서긴 했지만 무장투쟁은 하기가 어려웠어요. 러시아가 일본과 같은 연합군이라는 이유로 러시아 정부의 단속이 심했기 때문에 무장투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북간도와 서간도 같은 중국 땅은 어땠을까요? 그때는 이곳이 무법천지였어요. 장작림(장쭤린)이라고 하는 군벌의 통제 하에 있긴 하지만 정부처럼 딱 떨어지게 관장이 되는 지역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여기는 전부 산이고요. 그래서 서간도와 북간도가 무장투쟁에 중요한 근거지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북간도 지역이 무장투쟁에는 가장 적합했습니다. 백두산이 있기 때문이에요. 백두산록을 따라서 골짜기 골짜기가 모두 은거하기가 쉬운 지대였고, 여기에 또 우리 교민들이 가장 많이 살았습니다. 반면 연해주는 4월 참변에 의해 민족지도자들 대부분이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홍범도 장군도 피신해서 이리로 오게 된 거예요.

이곳에는 최진동이라고 불리는 분과 그 형제들이 계셨습니다. 이분들은 일찍이 이곳에 이민 온 삼형제였는데, 청나라 때 관리는 아니지만 관리를 좀 보조하는 역할을 했기에 관리들과 친했습니다. 그런 친분을 이용해서 수십 리에 달하는 이 봉오골 골짜기의 개간권을 얻고 이 골짜기를 개발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하촌, 중촌, 상촌, 이렇게 마을을 이루고 엄청난 농토를 확보해서 부자가 됐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청나라의 군인들과 관리들 밑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약간의 민족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분들이 홍범도 장군과 만나게 된 겁니다.

군사를 훈련시키거나 지휘하는 것은 홍범도 장군이 맡고, 그걸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최진동 삼형제가 맡았습니다. 당시에 독립군 활동을 하려면 후원자가 있어야 했어요. 옷도 제공해야 하고, 총기도 제공해야 하고, 먹을 양식도 제공해야 하죠. 그렇게 이 근거지를 중심으로 해서 200~300명 가량의 독립군을 양성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바로 이곳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1920년 6월에 국경을 넘어 일본군을 기습했어요. 이 산을 넘어 삼군자라는 지역에서 두만강을 넘고 일본군 초소를 습격했습니다. 일본군이 추격해 오니까 강을 넘어서 도망을 갔습니다.

이런 식의 전투가 며칠 동안 벌어진 거예요. 제가 ‘봉오동 전투’ 영화를 안 봐서 영화에서는 전투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내용들이 나옵니까?”

“네.”

“이렇게 되니까 화가 난 일본군이 중대를 편성해서, 아예 국경을 넘어서까지 추격을 했습니다. 이 뒤에 산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독립군이 숨어서 밤에 회의를 하고 있는데 그 때 일본군이 급습을 했습니다. 일본군이 오니까 회의하다 말고 무조건 총을 쏴놓고 이리로 도망을 왔어요. 그랬더니 일본군이 대대적인 추격을 벌였습니다. 원래는 중대 병력을 갖고 독립군을 추격했는데, ‘여기에 근거지가 있어서 수백 명이 숨어 있다’ 이렇게 되니까 대대 병력을 동원해서 독립군을 추격하고 이곳을 공격한 거예요.

그러자 홍범도 장군이 지휘를 해서 하촌을 싹 비워버렸습니다. 일본군 정찰대가 먼저 들어와 보니 동네가 싹 비어 있는 거예요. 자기들도 조심해야 하니까 선두 정찰대를 보내서 중촌에 가봤어요. 그런데 중촌도 싹 비워져 있고 아무도 없었어요. 본부대는 밑에 있고 정찰대는 계속 올라갔는데, 상촌에까지 갔는데도 다 비어 있는 거예요.

그 때 독립군은 상촌에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정찰대가 왔을 때는 공격을 안 하다가, ‘아무도 없다’ 이렇게 보고하고 뒤의 본대가 따라서 들어올 때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전투가 봉오동 전투입니다.

매복해서 공격을 퍼부으니까 화력이 뛰어난 일본군이라도 견딜 수가 없죠. 날이 어두워진 데다 뒤에서 공격을 퍼부어서 도저히 견디질 못하니까 지원군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고 비는 쏟아지니까 독립군 유격대가 전투를 계속하지 않고 일단 후퇴해버렸어요. 그런 중에 지원군이 들어오니까, 일본군은 정신이 없어서 자기들끼리 교전을 해버린 거예요. 이렇게 해서 밤새도록 교전하다가 날이 샜을 때 뭔가 이상해서 살펴봤더니 자기들끼리 싸워서 희생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상대가 일본 정규군인데도 사망자 157명, 부상자 300여 명에 달하는 큰 전과를 올린 것이 봉오동 전투입니다.

그런데 이 봉오동 전투로 인해서 독립군에 대한 일본군의 대대적 추격이 벌어져요. 사단 병력이 중국으로 들어와서 독립군을 섬멸하려고 하니까, 중국 쪽에서는 군대가 동원돼서 국경을 넘는 행위에 반대를 했겠죠. 그것 때문에 일본과 장작림이 실랑이를 벌였는데, 장작림이 독립군 체포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까 일본은 결국 훈춘 사건을 일으켜서 자기 인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사단 병력을 투입해서 독립군을 추격했습니다. 그로 인해 벌어진 게 청산리 전투이고, 거기서 일본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죠.

이렇게 해서 일본이 이제는 장작림한테 완전히 협박을 하는 지경이 되자 장작림도 도저히 더 버티기 어려워졌습니다. 이러면 일본하고 전쟁을 해야 할 판이니까요. 그래서 독립군들에게 ‘더 이상 동북3성에서는 독립군에게 장소를 제공할 수 없다’ 이렇게 통보합니다.

이렇게 돼서 갈 곳을 찾아 러시아 쪽을 알아보니 받아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밀산에서 독립군 통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을 만들어서 자유시로 갔습니다. 그런데 군권 문제 때문에 다투다가 적군으로부터 공격을 당했습니다. 러시아로 건너간 독립군이 군권 문제를 가지고 싸운 게 아니에요. 러시아에 있는 독립군들이 새로 들어온 이 부대를 누가 통솔할 거냐를 두고 자기들끼리 싸운 거예요. 그러다가 일부가 러시아 적군을 동원해오는 바람에 전투가 벌어져서 독립군이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사변이라고 합니다. 이 일로 독립군이 완전히 흩어져 버렸어요. 구체적으로 얼마나 죽었는지, 얼마나 실종됐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홍범도 같은 뛰어난 장군이 그 이후로 결국은 라즈돌노예 인근 농장에서 그냥 농부로 일하게 됐고, 김좌진 장군은 암살당했고, 서일 총재는 자결해버렸고, 이렇게 해서 북간도의 독립군이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그 중 남은 일부가 영화 ‘암살’에 나오는 김원봉과 그 부대예요. 아무도 장소를 제공해주지 않으니 큰 부대로는 활동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소규모로 활동하면서 일본군 요인 암살 쪽으로 방향을 바꾼 거예요. 그리고 여기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러시아 공산군에 참여하거나 모택동(마오쩌둥) 산하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해버리니까 우리가 독립적으로 싸우는 부대가 없어져버리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일은 나중에 우리가 해방이 되었을 때 바로 독립을 하지 못하고 3년 간 신탁 통치를 받고 분단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됩니다.”

설명이 끝나고 청년들은 철문 사이로 멀리 봉오동 골을 바라보았습니다.

긴 버드나무잎이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지듯 우수수 목숨을 잃어야했던 수많은 분들이 겹쳤습니다.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루어졌으나 우리 선조들은 많은 희생을 거치며 접경 지역인 중국, 러시아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이런 소중한 독립 운동의 역사를 민족의 자긍심으로 끌어안아야겠습니다.

버스는 이제 안도현으로 향했습니다. 안도현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스님은 역사 즉문즉설을 열었습니다.

청년들은 지금까지 역사기행을 하며 궁금했던 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했습니다.

  • 안중근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사살이 한일합방을 앞당겼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 서일 총재가 자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염주성은 굉장한 습지였는데,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었어요. 발해 당시에도 그 정도로 습지였나요?
  •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역사 왜곡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 중국은 영토로 나라를 구분하는 반면 우리는 만주에 살았던 여러 민족이 우리와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영토 구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동북3성은 어느 지역을 말하는 건가요?
  • 도서관에서 고구려가 우리 나라였는지 모르는 고등학생을 만났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역사를 잘 배울 수 있게 할 수 있을까요?

궁금한 것이 서로 달라서 더욱 풍부하게 역사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즉문즉설을 한참 하고 있는 사이 안도현에 도착했습니다. 안도현에서는 일제의 만주침략을 대처하기 위해 명월구회의가 열렸고, 조선인 청년 중심의 친일 군사조직 간도특설대가 활동했던 곳입니다.

용성조사님이 대규모 농장을 운영해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명월촌과 봉녕촌도 안도현에 속합니다. 명월구회의와 간도특설대는 도시 가운데 덩그러니 비석으로 남아있었고, 명월촌과 봉녕촌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스님은 용성조사님이 어떻게 210만평에 이르는 선농당 두 곳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하셨는지, 어떻게 일제에 의해 괴멸당했는지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있기까지 수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기록이 곧 죽음이던 시대였어요.”

밀정에 의해 선농당이 발각되자 일제는 마을을 불살라 버렸다고 합니다. 마을 전체가 절단났다고 해서 한때 절단부락이라고 불렸다는 곳은 이제 푸른 논밭으로 변해있었습니다. 명월촌은 현재 안도현 명월진, 봉녕촌은 현재 안도현 량병진 일대로 불립니다.

안타까움도 잠시 안도현을 벗어나자 스님은 다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 환단고기에 대해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증거가 없다고 비판하는데,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요?
  • 역사적으로 일본보다 중국에 침략을 더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왜 우리 국민은 반일감정이 더 심할까요?

버스는 발해의 첫 수도가 있었던 돈화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발해건국사에 대해 간략히 알려주었습니다.

돈화에 도착해서 먼저 시내 한 가운데에 있는 강동 24개석 유적에 도착했습니다. 24개석은 발해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유적입니다.

강동 24개석은 돈화 시내 한 가운데에 철장으로 둘러쳐져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철장에 손을 얹고 과연 이것은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다시 한 번 의문을 가진 채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이제 청년 역사기행단은 돈화시 중심을 벗어나 동모산으로 향했습니다. 동모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발해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정혜공주묘가 발굴된 육정산을 먼 발치서 잠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산이 육정산입니다. 하나, 둘, 셋.... 여섯. 봉우리가 여섯 개입니다. 그래서 육정산이라고 하는 겁니다. 저기서 3대 문왕의 셋째 딸인 정혜공주묘가 발굴되었습니다. 그동안 발해의 역사는 남의 나라의 역사서에서만 언급되었지 발해인들의 손으로 쓴 기록이 없었거든요. 처음으로 발해인들이 쓴 기록이 발굴된 것이 정혜공주묘입니다.”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동모산은 고구려 유민이 된 대조영이 유배지를 탈출하여 먼 길을 달려와 새롭게 나라를 세웠던 발해의 첫 수도입니다.

멀리서 바라본 동모산은 삿갓을 없어놓은 형태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동모산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성벽이 어떻게 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성벽 가까이에 가보면 정말 좋겠지만, 역시 중국 정부로부터 접근이 금지되어 있어 먼 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스님은 하루 종일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 버스 안에서 계속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26년 전부터 쌓아온 스님의 역사적 지식과 지혜가 쏟아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역사기행단은 스님의 열정과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모산을 끝으로 오늘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돈화에 있는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로 돌아와서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스님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발해의 역사’에 대한 스님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내일은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를 비롯해 발해 유적지를 주욱 둘러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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