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통일의병 동북아 역사기행의 마지막 10일째인 동시에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의 1일째 날입니다. 스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통일의병 역사기행팀을 배웅한 후 곧이어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청년 역사기행팀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녘, 마지막날 기행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숙소에서 출발하기 10분 전 모든 기행단이 탑승을 했습니다.

“잘 주무셨어요?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시간을 다 지켰네요. 마지막 날 지키면 다 지킨 것과 같아요.” (웃음)

버스를 타자마자 수신기로 들려오는 스님의 목소리가 정겹습니다.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고려인들이 최초로 강제 이주 당한 라즈돌노예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쉬지 않고 내리던 비가 잠시 그쳤습니다. 여름날 같지 않게 선선했습니다.

“가을 날씨 같죠? 한국은 더워서 힘들다는데 피서 잘하네요. 첫 이틀만 조금 덥고 역사기행 내내 시원했네요.”

기행단은 스님의 말에 공감하며 웃었습니다. 비가 내려 불편하기도 했는데, 더워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160여 명이 다 모이자 스님은 라즈돌노예역에서 고려인들이 강제이주를 당한 당시의 풍경과 배경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텅 빈 철로 위로 고려인들을 태운 열차가 지나간 듯 씁쓸했습니다.

이어서 이번 역사기행의 마지막 일정인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으로 향했습니다. 신한촌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벌어진 항일독립운동의 중추기지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신한촌을 상징하는 기둥 세 개가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기행단이 도착했을 때,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참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본 한국인들은 더욱 반가웠습니다. 그 분들이 가고 기행단 160명은 신한촌 기념비를 빙 둘러싸고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연해주에 공식적으로 고려인의 이민이 시작된 것은 1863년부터입니다.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 고려인이 와서 살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 들어와서이고요. 처음에는 대부분 땅을 개간해서 농사짓고 살다가 이때부터 도시에 와서 살기 시작한 거죠. 도시가 점점 개발되고 커지는 과정에서 도시 건축도 하고, 철도도 놓고, 항구도 개발하니까 노동자가 필요했고, 그 영향으로 한인들도 점점 늘어난 것 같습니다.

자연히 항만 건설지에서 가까운 곳에 한국 사람들이 거주했는데 그 수가 몇 십 명에서 몇 백 명, 몇 천 명으로 늘어나게 됐어요. 한국 사람이 와서 산다고 해서 그곳을 ‘한인촌’이라고 불렀고, 우리는 우리가 가서 개척했다고 해서 ‘개척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다가 1911년에 개척리가 강제 철거를 당하게 됩니다. 아마 도시가 점점 확대되면서 외국인들이 시내 가운데 있기 때문에 생긴 문제 같은데, 이 지역에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중국 사람들도 많다보니 지저분해서 콜레라가 발생했다고 해서 한인들을 원래 살던 곳에서 2킬로미터 밖인 이곳 외곽으로 강제로 철거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이곳 산비탈에 와서 다시 집을 짓기 시작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5년 경에 벌써 1만 명 정도가 거주할 정도로 급속도로 한인 집성촌이 만들어졌고, 제일 많을 때는 이 블라디보스토크에 10만여 명의 한국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요. 초기 이민자들은 대부분 우수리스크에서 농촌을 기반으로 했는데 후기에 도시가 커지면서 도시를 기반으로 많이 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의 중심이 됐어요.

4월 참변이 있은 후에는 이곳 한인사회도 거의 붕괴가 됐습니다. 혁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어쨌든 1937년 강제이주 당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이곳 신한촌이 융성했어요. 강제이주 당하면서 신한촌 자체가 없어져버렸다가,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다시 개발이 됐습니다.

한러 수교가 되자마자 여기 보시듯이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무명비를 세 개 세웠습니다.”

기행단이 참배를 하는 동안 뒤이어 다른 한국팀이 왔습니다. 기행단은 스님의 설명을 듣고 이 곳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써주신 분들을 떠올리며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묵념을 했습니다. 뒤에서 기다리던 한국 분들도 함께 애국가를 부르고 묵념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석조 기둥이 세워진 이 터를 기부한 고려인 3세의 아내를 모시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려인 3세 분은 몸이 안 좋으셔서 그 분의 아내가 대신 나와주셨습니다.

“이렇게 신한촌 기념비를 찾아주시는 것이 저희 고려인들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와주셔서 신한촌 기념비의 의미가 더욱 뜻깊어지고, 기념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신 분들의 노력을 헛되지 않게 만듭니다. 감사합니다.”

기행단도 고마운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습니다. 기다리는 분들이 계시기에 개별로 자유롭게 사진을 찍기보다, 다같이 단체사진을 한 번 찍었습니다.

“자, 사진은 대강 나와도 돼요.” (모두 웃음)

사진을 얼른 찍고 나오며 뒤이은 한국팀들과 반갑게 인사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혁명광장으로 향했습니다.

혁명광장에 내려 기념사진을 찍고 한 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조원들과 자유롭게 블라디보스톡 시내를 구경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우비와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가 비를 쫄딱 맞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비가 오네!” (모두 웃음)

독수리 전망대에 오르기로 했지만, 비가 많이 내려 바로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비행기를 탑승하는 역사기행단 한 명 한 명 손을 꼭 잡아주며 “수고했어요.”라고 인사했습니다.

이번 기행단은 고생을 많이 한 만큼 추억도 많이 쌓였는지, 돌아가는 얼굴이 환했습니다. 역사기행단을 무사히 배웅한 후 곧이어 오후 3시부터는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막 도착한 청년 역사기행단을 마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내를 맞은 법륜입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블라디보스톡 공항을 나와 청년 역사기행팀은 혁명광장을 방문했습니다. 스님은 블라디보스톡과 연해주, 러시아혁명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톡입니다. 블라디보스톡은 동쪽의 부동항을 추구하는 러시아의 야망이 만들어낸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이란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이랍니다. 연해주는 면적이 16만km로 남한 면적의 1.5배, 인구는 200만 정도입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고 30분의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광장에 모여 특색 있는 조별 사진을 찍고 혁명광장 곳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청년들은 혁명광장에서 BTS의 음악에 맞춰 다함께 춤을 선보였습니다. 혁명광장을 지나던 러시아 시민들도 신기한 눈으로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독수리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돌계단을 오르자 서늘한 바람과 함께 아무르만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즐겁게 사진을 찍으며 러시아에서 만난 첫 풍경을 마음속에 한가득 담았습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근교에 있었던 신한촌을 방문했습니다. 신한촌을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둘러서서 참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념비 앞에는 태극기와 무궁화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이곳에 활동한 독립투사 분들을 생각하며 태극기에 대하여 경례를 하였습니다. 스님의 선창에 따라 청년들도 목소리를 보태어 애국가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애국 선열들에 대한 묵념의 시간도 가졌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스리스크 방면으로 두 시간 가량을 달려 버스에서 내리니 눈앞에 기차 길이 펼쳐졌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라즈돌노예역이라고 소개하면서 고려인들을 강제 이주시킨 첫 기차역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금 저희들이 서 있는 곳은 라즈돌노예 역입니다. 왜 우리가 시골에 조그마한 이 역에 왔느냐? 그 이유는 이곳이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피맺힌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1937년 9월 17일 새벽 4시부터 시작해서 10월 말까지 두 달이 채 안 되는 동안에 여기에 살고 있던 17만 명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킨 소련의 정책이 집행된 곳이에요. 방금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 보셨죠?

“네.”

“화물칸에 칸막이를 8개로 쳐서 한 칸에 여덟 가족씩을 태워서 기차를 출발시켰어요. 강제 이주에 대한 통보를 4일 전에 했어요. 무조건 이 역에 모여라고 했기 때문에, 농사지어 놓은 고구마도 못 캐고, 옥수수도 못따고 다 내버려둔 채로 가제 도구 몇 개만 챙기고 옷가지 몇 개 보따리로 싸서 기차에 타야 했어요. 1인당 160루불을 받았다고 해요. 방금 지나간 긴 기차로 124번 수송을 해서 짧은 시간에 이주를 시켰어요.

카자흐스탄에 10만 명, 우즈베키스탄에 7만 명 정도를 이주시켰는데, 거의 황무지에 버린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1만1천 명이 죽었고, 도착하고 나서도 많은 수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땅굴을 파고 버텼다고 해요. 이런 대참극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 30만 명 중에 17만 명이 이주되었으니까 나머지는 여기 남아 있지 않았느냐 하는데, 실제로 주거지가 공식적으로 파악된 사람이 17만 명 정도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도망을 간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 때 기차를 못 탄 사람들을 다시 모아서 11월에 또 이송을 했습니다.

소련은 이런 강제 이주를 미리 준비했습니다. 1936년에 갑자기 소련 정부에서 한인 중에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이유를 불문하고 체포해서 2500명을 처형했습니다. 강제 이주 정책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때 구심점이 될 만한 사람들을 미리 제거시킨 거죠.

이로 인해 연해주에 있는 동포 사회가 완전 괴멸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부터 북한 땅까지 정말 넓은 좋은 땅이 많은데, 그 땅은 우리 민족이 넘어와서 개간한 논밭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제 이주가 된 후 이 땅은 손도 못 데고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해서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삶이 뿌리채 뽑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러시아 정부가 들어서자 1993년에 옐친이 이에 대해 사과를 했고, 그 후 고려인들이 다시 이곳으로 재이주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당사자들은 죽고 없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고향의 얘기를 듣고 고향을 그리워한 후손들이 다시 이곳에 돌아왔는데, 그 수가 3만여 명 정도가 되었다고 해요. 그 후 현재 연해주에는 고려인들이 대략 5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이곳에 돌아오니까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땅도 없고, 집도 없다 보니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이분들을 우리가 많이 지원해줘야 하는데, 지원이 쉽지 않습니다.”

스님이 설명하는 동안 멀리서 화물칸이 달린 기차가 한 대 지나갔습니다.

그 당시 고려인들이 실려 가는 듯 그때의 기차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재배한 농작물을 수확도 하지 못한 채 일방적인 통보로 떠나게 된 고려인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느껴봅니다. 추운 겨울날 연고지도 없이 기차에 몸만 실은 체 떠나게 된 고려인들의 삶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제 고려인 문화센터에 갔을 때 보았던 한 고려인 할머니의 인터뷰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데 약 40일이 걸렸어. 우리는 식량부족과 병에 시달렸고, 차량마다 있던 원형난로는 달리는 중에 사용하지 못했고, 옷도 이불도 받지 못해 너무도 추웠어. 변소도 없어 기차가 멈추면 기차 밑에서 급히 볼일을 보다 깔려 죽기도 했어. 특히 위생 상태가 불량해 많은 사람들이 앓았는데, 병자가 생기면 그 즉시 실어 내갔고 모두 실종자가 되었지. 식량도 물도 받지 못했기에 오는 동안 풀과 뿌리를 모아 으깨서 먹었어. 아이들이 특히 많이 죽었지.”

먹먹해진 가슴을 뒤로 하고 다시 버스에 올랐습니다. 너른 들판 사이로 막힘없이 난 도로를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해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시간이 늦어진 관계로 저녁식사를 진행한 강당에서 첫째날 저녁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연해주의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대해 1시간 30분 동안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곳 연해주에 정착한 초기 이민자는 민족이나 독립에 대해 특별히 의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넘어온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905년부터 이 양상이 좀 달라집니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맺어지잖아요. 우리가 일제 식민지 지배를 36년 겪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40년 겪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후자는 을사조약 때부터 이미 식민지 지배에 들어갔다고 보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을사조약이 부당하다고 항의했지만 힘이 없어서 먹히지 않으니까 국내에서 저항하는 사람과 국내를 떠나서 남의 나라로 가서, 즉 국경을 넘어가서 저항하는 사람으로 나뉘었어요.

국경을 넘었다고 해도 아무데서나 독립운동을 할 수는 없잖아요. 한인들이 이미 가서 살고 있는 이민사회에 기반을 두고 독립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첫째, 사람이 있어야 하고, 둘째, 후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이민사회가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됩니다.

그래서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한국 안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이곳 연해주로 많이 넘어왔어요. 지식인, 조금의 재산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목표를 달성하려고 넘어온 겁니다. 넘어와서 보니 이미 정착해 있는 사람들이 전부 글자도 모르고 먹고 살기에만 급급한 실정이었어요.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학교를 세우는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서 의식을 깨우쳐서 나중에 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한 거예요. 그래서 1905년부터 1912년 사이에 학교가 제일 많이 생겼습니다.

그 후 정미칠조약이 맺어지고 구식군대가 해체되면서 한국 안에서 2차 통일의병이 일어납니다. 한국 안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날 때, 해외 이민사회에서도 사람을 모아서 의병투쟁을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이것을 가장 먼저 주도한 곳이 국외에서는 연해주입니다.

그 일을 제일 먼저 시작한 사람이 이범윤입니다. 이범윤은 원래 함경북도의 관리였습니다. 간도관리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어요. 두만강을 건너가서 농사짓고 사는 조선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직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간도를 두고 조선에서는 조선 땅이라고 하고 청나라에서는 청나라 땅이라고 해서 분쟁이 생겼습니다. 청나라에서 우리 민족에게 국경을 침해했다며 계속 압수를 하니까 간도관리사가 파견돼서 이런 일을 막고 우리 주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 거예요. 또 하나의 역할은 이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것이었어요. 이런 두 가지 목표로 간도에 사는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 임명한 게 간도관리사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분이 을사조약이 맺어지는 것을 보고 분개를 하게 됩니다. 함경도의 포수들을 모아서 의병투쟁을 시작하고, 국내에서는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힘들어지니까 이곳 연해주로 건너와서 연해주를 기반으로 의병투쟁을 계속한 거예요.

이범윤이 연해주에 왔을 때도 연해주에 한인이 많이 살긴 했지만 그 가운데 특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최재형이라는 분이에요. 이분이 러시아말도 잘하고 부자였기 때문에 이분의 지원을 받았어요. 최재형 선생은 일찍 러시아에 귀화해서 러시아말도 잘하고, 러시아 교육을 받은 사람인데, 러시아 국적자로서 군대에 갔다가 러일 전쟁에서 패배를 경험하게 돼요. 자기 민족이 한족이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있긴 했지만, 러시아 국민으로서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던 거예요.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했던 건 아니었고, 이런 뜻있는 사람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최재형 선생의 지원을 받아서 이범윤 선생이 의병부대를 만들고 국내 진공 작전을 시도한 겁니다.

이렇게 이범윤 선생이 연해주 의병 활동을 제일 먼저 시작했고, 조금 있다가 국내에서 유명한 의병장이었던 유인석 선생이 연해주로 건너왔어요. 최재형 선생의 지원으로 이범윤, 유인석 두 사람이 의병을 지휘하고 있을 때 함경도에서 포수들을 모아 의병 투쟁을 벌이던 홍범도도 이곳으로 넘어왔고, 황해도에 있던 안중근도 이리로 넘어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의병 부대를 만들었고, 1908년에는 두만강을 건너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때 안중근이 그 부대를 끌고 가는 현장 군사책임자였어요. 그런데 몇 번의 전투는 승리했지만 회령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해서 대다수가 죽고, 몇몇이 겨우 살아남아 연해주로 돌아오게 됩니다. 대다수가 죽고 소수만 살아왔으니까 일본에 대한 적개심도 더 커지고, 다른 사람들 볼 면목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 사람들이 안중근을 중심으로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했습니다. 왼쪽 무명지 손가락을 자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맹세를 한 거예요. 12명이 이렇게 1909년 3월 초 연추마을 하리에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조직했습니다.

그런 뒤 그 원흉으로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지목합니다. 이 사람이 동양 평화를 깨는 주범이라고 해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계획합니다. 결국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에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성공했고,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하게 됩니다. 그때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모두 돌보았던 사람이 최재형 선생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면에 나서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어요.

이곳 연해주가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러시아 땅이어서라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위치상으로는 동쪽에 있지만 러시아가 유럽 국가 중의 한 나라다 보니까 세계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가 아주 빨랐어요. 그런데 북간도나 서간도 같은 곳에서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거의 모르거든요. 특히 국제 정보를 빠르게 접했기 때문에 이곳이 임시정부도 제일 먼저 만드는 등 모든 분야에서 가장 앞서갔던 거예요. 둘째, 최재형 선생 같은 분이 있어서 재정지원을 해줄 수 있는 조건이 됐다는 점입니다. 이런 것들이 배경이 돼서 이 지역이 독립운동에 선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핑계로 한일합방을 서두르게 됩니다. 한일합방을 할 거라는 소식도 이곳 연해주에서 제일 먼저 들었어요.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합방 절차를 아직 시작하기도 전인데 이곳에서는 한일합방을 반대하는 성명회를 조직했습니다. 일제가 그런 음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이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의병의 국내 진공 작전이 실패하자 더 크게 의병을 모았습니다. 그게 13도 의군(十三道 義軍)이에요. 우리나라 전국이 8도였다가 그중 5도가 둘로 나뉘면서 13도로 바뀌었잖아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충청남도와 충청북도,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평안남도와 평안북도, 이렇게 5도가 더해져서 13도입니다. 8도라고 하면 전국을 뜻하고, 13도라고 해도 전국을 뜻하거든요. 즉 ‘13도 의군’이라는 말은 전 조선 의군을 통합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힘을 모아서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했는데, 일본이 러시아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해서 러시아 정부가 13도 의군을 해산시켰어요. 그래서 전쟁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발족만 한 뒤 바로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명회도 1909년 6월에 발족했다가 일본의 강력한 간섭 때문에 러시아 정부가 해산 명령을 내립니다.

이런 일을 두 번 연달아 당해보니 정치적인 문제를 앞세우면 러시아 정부로부터 늘 간섭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11년에는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했어요.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산업진흥연합 같은 걸 만든 거죠. 여기 사는 한인들의 직업 알선이나 농지 구입 등 산업을 육성하는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 모임의 회장을 최재형 선생이 맡았습니다. 이런 정도의 명분이라면 직접 나서도 괜찮잖아요.

이렇게 해서 권업회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어요. 가입 회원도 금방 수천 명이 늘어나고, 그 아래에 학교도 세우고, 언론기관과 극장도 만드는 등 한인사회를 총괄하는 역할로 급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원래 뜻이 조국의 독립이니까, 그 아래에 비밀리에 대한광복군 정부를 구성했어요. 일종의 임시정부 같은 걸 구성한 겁니다. 1914년도에 이 권업회가 굉장히 발전하고 또 그 아래에 광복군 정부까지 두니까 이 정보가 새나가서 일본이 또 러시아에게 강력하게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마침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일본은 그전부터 영일 동맹을 맺고 영국의 힘을 빌려서 러시아를 견제해왔는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니까 영국과 독일이 싸우고 러시아도 독일과 싸우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과 러시아가 연합군이 된 거예요. 그런데 일본도 영국 때문에 연합군의 일원이 됐죠. 이렇게 러시아와 일본이 같이 연합군이 되니까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강력한 항의에 러시아가 외교적으로 부담을 느끼고 권업회에 해산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공산주의 이념 없이 그저 민족주의만으로 독자적으로 해나가는 활동 중 가장 성과가 있었던 게 권업회였고, 그런 민족주의 활동이 이때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고 볼 수 있어요. 13도 의군도 러시아 정부에 의해 해산됐고, 성명회도 해산됐고, 이제 권업회마저도 해산 명령이 떨어진 거예요.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 이 지역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민자가 점점 늘어나고 인구도 점점 늘어나서 1920년에는 30여 만 명이 한인사회를 구성했습니다. 북간도 다음으로 한인 인구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러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 정부는 식민지의 해방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니 한인들은 다 마음속으로 혁명 정부가 성공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죠. 그런데 이 지역은 아직 혁명 정부가 장악하지 못했고, 제정 러시아의 행정체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인들도 이제 눈이 트이니까 ‘우리도 인민을 기반으로 한 조직을 만들자’ 이렇게 돼서 1917년에 각 한인 지역 단위마다 대표를 뽑았어요. 이렇게 러시아 전국에서 뽑은 대표 100여 명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국회 같은 게 이루어진 셈이죠. 이게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입니다. 학교 강당을 빌려서 개최했는데 그 건물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내일 가면 볼 수 있습니다. 거기 가보면 전로한족중앙총회를 한 장소라는 표시가 붙어 있어요.

이런 가운데 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나왔어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나오니까 이곳 한인사회에서도 ‘아, 우리도 해방되어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인 독일이 보유하고 있던 발칸반도 식민지를 해방하기 위한 얘기지,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같은 나라들의 식민지 해방을 얘기한 건 아닌데, 그냥 다 흥분한 거예요. 이게 계기가 돼서 3.1운동이 일어나기도 했고요.

그런데 3.1운동 직후에 전로한족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바꾸었습니다. 대한국민의회라는 명칭은 임시정부를 염두에 뒀다는 얘기죠. 1919년 3월 1일을 기해 국내에서 3.1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니까 전로한족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이름을 바꾸고 한인촌에서부터 적극적인 만세운동을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 이곳 연해주에서 가장 먼저 임시정부를 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달 뒤인 4월에야 상해임시정부가 생겼고, 국내에 생긴 한성임시정부도 그 뒤에 생겼으니까요.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은 상해임시정부로 모두 통합하기로 하고 대한국민의회는 해산합니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가 제대로 안 돌아가자 최재형 선생 같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돌아와 대한국민의회를 복구하려고 노력했고, 그때 일제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바람이 확 불었습니다. ‘무장투쟁을 해야지, 만세운동이나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런 주장이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1920년 4월 들어 일본 제국주의가 백군을 앞세워서 적군을 타격한다는 구실로 한인 지도자들을 주로 타격했습니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 및 우수리스크 지역의 우리 민족 지도자들 300여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물론 러시아의 적군도 백군에게 많이 학살당했고요. 이것을 러시아에서는 ‘4월 참변’이라고 불러요. 우리도 이 일을 4월 참변이라고 부르는데, 4월 참변 기념비는 러시아 정부가 세운 겁니다. 이 4월 참변 때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사망하고, 홍범도를 비롯한 일부는 북간도 쪽으로 넘어갑니다. 그후 홍범도는 6월에 봉오동 전투를, 10월에 청산리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처럼 4월 참변 이후 러시아 안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많이 위축된 것이 연해주 독립운동이 가라앉게 된 하나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을 하게 됩니다. 1922년이 되면 연해주까지 다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섭니다.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서니까 한국 사람들의 민족 해방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지고 전체 사회의 흐름이 ‘러시아 혁명을 어떻게 완수할 거냐’로 가버렸어요. 그러니 한국 청년들도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다 ‘러시아 혁명을 어떻게 할 거냐’라는 문제, 즉 ‘민중 해방을 어떻게 할 거냐’가 주 관심사였습니다. 이처럼 민족해방 문제는 주 관심사가 못 되면서 연해주의 독립운동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연해주가 가장 앞선 독립운동 집단이었어요. 특히 대한광복군 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구성했을 때 이 사람들은 연해주를 1관구, 북간도를 2관구, 서간도를 3관구로 분류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해외 독립군 근거지가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 이 세 곳이었잖아요. 이렇게 해서 제대로 된 정부의 모양새를 갖추려고 하고, 군대도 정상적으로 마련해서 일본에 저항하려는 뜻을 품었고, 임시정부도 가장 먼저 제안하고, 민중 대표를 뽑아서 의회를 구성하는 등 우리 독립운동사 또는 대한민국의 수립 과정에서 가장 앞선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러시아 땅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측면이 있지만, 또 그 모든 것이 실패한 것도 러시아 정부의 간섭 때문이었어요. 러시아 땅인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에는 이와 같은 장단점이 모두 있었습니다.”

잘몰랐던 연해주 독립운동사에 대해 새롭게 배웠습니다. 여행을 시작한 지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보고 듣고 느끼게 될 곳들에 미리 공부하고 느껴보는 소중한 시간이였습니다. 항상 열정적으로 강의를 해주시는 스님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첫째 날 일정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통일의병들과 9박 10일 동안의 역사기행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청년들과의 8박 9일을 다시 시작하는 바쁜 날이었습니다. 내일은 청년들과의 역사기행 2일째를 맞이해 우수리스크 주변에 있는 독립운동과 발해 유적지를 둘러볼 예정입니다.

스님의하루 텔레그램 구독하기

<스님의 하루>에 실린 모든 내용, 디자인, 이미지, 편집구성의 저작권은 정토회에 있습니다. 허락없이 내용의 인용, 복제는 할 수 없습니다.

<스님의 하루>를 읽고 댓글로 마음을 나눠보세요. 단, 욕설, 비방, 광고, 도배하는 댓글은 관리자가 임의로 삭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