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있었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본 후 저녁에는 이번 동북아 역사기행을 총정리하는 강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침 7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이상설 유허비입니다. 이상설 선생은 성균관 교수, 장관급 고위관리였는데 관복을 벗고 독립운동에 앞장 선 분입니다. 유허비 앞에 선 대중들을 향해 스님은 이상설 선생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습니다.

“저희가 도착한 이곳은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입니다. 이상설 선생은 여러분이 다 기억하듯이 헤이그 밀사의 대표였습니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이렇게 세 분이 헤이그 밀사로 갔는데 그 중 이상설 선생이 대표였어요. 이상설 선생은 조선조 마지막 과거에 급제하고 정부 관리가 되어서 나중에는 요즘 말로 하면 차관급 정도 되는 지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고 5적을 척결할 것을 상소하다가 결국 관직에서 파직당합니다.

한국 안에서는 독립운동을 할 수가 없으니까 먼저 연해주로 와서 여기서 독립운동을 합니다. 이범윤 선생과 의기투합해서 의병을 모으기로 하고, 북간도에 가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이라는 학교를 개설하기도 했어요.

1908년에는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펼쳤는데,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안중근이 중심이 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벌였어요. 안중근이 총대장이 돼서 국내 진공 작전을 벌였지만, 작전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후 선생은 13도의군, 성명회, 권업회, 대한광복군 정부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1917년에 결국 병을 얻어 목숨을 마치는데, 목숨을 마칠 때 이런 유언을 남겼어요.

‘내가 이뤄놓은 게 아무것도 없고, 조국은 광복도 맞지 못했으니, 무덤도 쓰지 말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마라. 나를 화장해서 솔빈강(수이펀강)에 뿌려다오. 내가 아무것도 이루어놓은 게 없으니 내가 쓴 것도 다 의미가 없다. 책이고 뭐고 다 불살라버려라.’

그러나 광복을 맞고, 한러 수교가 되면서, 재를 뿌렸다고 하는 솔빈강변에 이상설 유허비를 세워 선생을 기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게 솔빈강이에요. 여기서 간단히 기념식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함께 이상설 선생의 뜻을 기리는 묵념을 했습니다.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남을 비통해 하며 모든 유품을 불사르라고 한 말씀이 가슴 속에 애잔하게 다가왔습니다.

유허비를 참배한 후 선생의 재를 뿌린 솔빈강을 바라보며 잠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하염 없이 내리는 비가 남북통일을 통해 이 한을 풀어달라고 간절히 울부짓는 것 같았습니다.

이어서 발해 시대에 솔빈부가 있었다고 알려진 성터를 찾아갔습니다. 이상설 선생의 재가 뿌려진 솔빈강 건너편 넓은 언덕에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차는 세워두고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걸어갔습니다. 빗물이 고여 흐르는 흙길을 만나자 어제 염주성 늪지대가 떠올랐습니다.

“버스타고 다니면서 따로 운동한다고 하지 말고 지금 운동하면 돼요. 돌아가서 보면 다 추억이에요. 고생을 많이 할수록 추억이 많아지는 거예요. 정강이까지 물이 차는 늪을 지나보니까 이제 늪이 무엇인지 알겠죠?”

모든 일이 다 좋은 경험입니다. 몸은 힘들고 귀찮지만 이렇게 빗 속으로 걸어보는 일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될 겁니다.

“이번 팀에 용신이 접신된 사람이 있나봐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역사기행 내내 비가 오네요. ”(모두 웃음)

스님은 선두에서 활기차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긴 행렬을 이루며 나지막한 언덕 위로 올라가자 저 멀리 우수리스크 시내가 한 눈에 펼쳐졌습니다. 솔빈강을 자연 해자로 이용할 수 있게 축조한 것이 고구려의 여러 성들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초원 위에서 야생 말이 풀을 뜯고 있는 한가로운 풍경도 볼 수 있었습니다. 광활한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잠시 발해인이 되어 초원 위를 말타고 달리는 상상을 해 봅니다.

외성에서 내성 쪽으로 15분 가량 걸어 보았습니다. 비가 계속 내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내성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향해 걸었습니다.

“노래 한 번 같이 불러볼까요?”

스님의 제안에 한 명씩 순서를 바꿔가며 어릴 적 추억의 노래를 한 소절씩 불렀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내성은 생각보다 높고 규모가 컸습니다. 내성 바로 앞에는 작은 덧성을 쌓아서 그 사이에 해자를 만든 겹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을 이끌고 성벽 위를 잠시 거닐어 본 후 솔빈부성을 나왔습니다.

다음은 우수리스크 주위에 있는 다양한 독립운동 유적지를 참배했습니다. 우선 발해 시대의 유물인 거북이 조각이 있는 거북공원을 둘러보았습니다.

이어서 최재형 선생이 체포되어 사살되기 직전 1년 여 간 머물렀던 집무실을 참배했습니다. 태극기 말고는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어떤 표시도 없어서 늘 아쉬웠는데, 예년과 달리 내부에 전시관과 영상실을 마련하는 등 많이 정비된 모습이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연해주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최재형 선생입니다. 스님은 최재형 선생이 어떤 분인지 간략히 소개했습니다.

“러시아의 극동지역인 연해주에 우리 교민이 많이 살 때는 30만 명 정도까지도 살았습니다. 인구수로 따지면 북간도, 즉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제일 많고, 두 번째가 이 연해주인데, 독립운동의 기여도를 따지면 연해주가 훨씬 높습니다. 북간도는 청산리 전투가 유명하고, 인구가 많아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어요. 또 오늘날 우리가 백두산을 많이 가면서 연해주보다는 중국에 있었던 활동들이 더 많이 알려진 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는 연해주가 더 활동이 활발했어요.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곳은 러시아, 즉 서양 땅이니까 국제 정보를 더 빨리 입수할 수 있었어요. 교민들의 상황은 자기가 사는 나라하고 관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연해주에 사는 사람들이 나라의 독립을 추구하는 활동에 있어서는 훨씬 앞서갔다고 보시면 돼요.

둘째, 이 지역 유지였던 최재형 선생이 재정지원을 많이 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재정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분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곳이 앞서간 측면이 있어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건물은 큰 부자였던 최재형 선생이 전 재산을 털어서 독립운동에 다 쓰고 돌아가시기 전 1년 동안 머물렀던 집입니다. 태어난 집도 아니고, 일상적으로 살았던 집도 아니고, 돌아가시기 1년 전에 근무했던 집무실이라고 이해하시면 돼요.

1905년의 을사조약 이후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분을 찾아왔는데, 그 이유는 이분이 재정지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앞에 잘 나서지 않고 주로 재정지원을 했어요. 안중근 의사 가족도 지원했고, 유인석, 홍범도, 이범윤 등 우리가 이름을 아는 독립운동 했던 분들의 재정이 모두 이분의 뒷받침으로 나왔습니다.

또 러시아 군대와 관계를 잘 맺어 두어서 러시아 군대가 가진 신무기를 몰래 구입해서 독립군에게 제공해주었습니다. 덕분에 독립군의 무기 조달이 굉장히 수월했습니다. 특히 1904년 러일전쟁에 패배한 러시아 군대가 가진 무기가 많이 유출된 것을 구입해서 독립군에 제공하는 등 실질적인 독립운동의 대부 역할을 했습니다.

독립운동이 점점 확대되면서 아예 본인이 회장도 하고, 대표도 했어요. 의병활동에 직접 나서진 않았지만 아까 말씀드린 권업회(勸業會)에서는 이분이 대표를 맡아서 러시아 정부와 교섭도 했습니다. 이러면서 나중에는 상해임시정부의 재무부장, 요즘 말로 하면 재무장관까지 역임했다가, 상해임시정부가 제대로 안 돌아가자 이곳으로 돌아와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4월 참변 때 희생된 분입니다.”

스님은 최재형 선생의 일생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교과서에는 한줄로 실려있어 잘 몰랐던 분이었습니다. 감동과 함께 안타까움이 밀려왔습니다.

우수리스크 곳곳에 이런 역사가 깃든 곳이 많았습니다. 다음은 전로한족중앙총회가 열렸던 장소를 찾았습니다. 이 건물은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족 해방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이곳 연해주에 살던 우리 교민들은 마음으로는 혁명정부를 지지해도 겉으로 어떤 편을 들지는 못했어요. 당시 혁명정부가 장악한 곳은 모스크바뿐이지, 이 지역을 비롯한 지방 정부는 아직도 제정러시아, 즉 황제의 군대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거든요.

러시아 혁명정부군을 붉은 군대라고 해서 ‘적군(赤軍)’, 황제의 군대를 ‘백군(白軍)’이라고 하는데, 적군과 백군 사이에 전투가 계속 벌어졌습니다. 일본은 백군을 지지했습니다. 1904년 러시아 제국과 일본은 전쟁까지 하긴 했지만 1차 세계대전 때 서로 협력관계, 즉 동맹관계에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니까 한인들도 눈이 뜨인 겁니다. 공식적으로 어느 쪽을 지지한 건 아니지만, 마음으로는 다 혁명정부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어요. 러시아 혁명정부가 인민의 지지를 받아서 인민정부를 구성해가니까 ‘아, 여기 사는 우리 조선인들도 정부를 만들어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중국에서는 주로 ‘조선족’이라고 불렀지만, 연해주에서는 대한제국 이후 전부 ‘한인(韓人)’이라고 썼어요. 안중근 의사도 ‘대한국인(大韓國人)’이라고 썼잖아요. 일제 강점기 때는 ‘대한’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 자체가 독립운동에 해당되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지칭하는 말을 ‘조선’이라고 바꾸고 ‘대한’이라는 말을 못 쓰게 했습니다. 그러나 연해주에 사는 사람들은 다 ‘한인’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전로(全露)’는 ‘전국 러시아’라는 뜻이에요. 러시아를 한자로는 ‘로(露)’라고 썼습니다.그리고 한국 사람들을 여기서는 ‘한족(韓族)’이라고 해요. 그렇게 해서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를 결성했습니다. 각 지역에서 전부 대표를 뽑아서 임시정부를 구성할 하나의 토대를 마련한 거예요.

학교 강당을 빌려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개최했는데, 그 학교 강당이 지금 앞에 보이는 이 건물이에요. 저기 보면 태극기와 러시아 국기가 새겨져 있죠?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전로한족중앙총회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됩니다. 대한국민의회라는 것은 벌써 민중의 지지를 받아서 대표자를 구성했다는 뜻이에요. 즉 의회를 구성한 것이죠. 이것은 벌써 임시정부를 구성했다는 얘기예요. 대한국민의회는 3월 17일에 구성이 되었으니까 4월 11일에 출범한 상해임시정부보다 빨랐던 겁니다. 이들은 3.1 독립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러다가 4월이 되자 상해임시정부가 들어섰고, 한성에도 임시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다음은 고려인 문화센터를 방문했습니다. 고려인 문화센터에는 고려인들의 역사에 대해 많은 사진과 기록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전시관 입구에서 ‘연해주의 불꽃, 고려인’이라는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영상은 조선후기 굶주림과 핍박을 피해 연해주를 찾아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연해주는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꽃 피운 곳입니다. 그러나 연해주의 독립운동은 소련과 일본에게 궤멸당하고, 고려인들은 무자비한 강제이주를 당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새로 알게 된 역사에 놀라고, 지금까지 잘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죄송했습니다.

고려인들과 이곳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보고 들으며 이곳이 우리 민족이 숨 쉬는 곳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고려인들이 고향 땅을 그리워하며 자주 불렀다는 아리랑 노래가 가슴을 아련하게 했습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들이 아리랑을 많이 불렀지.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고 거기서 살 때 일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던 게 기억이 나오.
생일을 보내거나 집에 앉아 있을 때 부모님들이 이 노래를 많이 불렀지.”

“속이 아프면 아리랑을 부른다오.”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다음은 4월 참변비에 도착했습니다. 4월 참변은 일본군에 의해 한국독립군이 학살당한 사건이라는 설명을 얼핏 들어서 우리나라 말이 있는 비석이 있을 줄 알았는데 러시아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서 왜 그런지 알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지 3년이 지났는데도 이 곳에는 아직 황제를 따르는 군대(백군)들이 남아있었습니다. 백군과 일본군이 협력을 해서 적군(혁명군)을 퇴치한다면서 독립운동가 300여명을 학살했습니다. 그걸 4월 참변이라고 합니다. 우리 땅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비석은 세우지 못하고, 러시아혁명정부가 희생된 사람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식민 지배를 받았던 선조들의 고통만 생각하며 다니다가 다른 나라 사람들의 희생도 접하게 되니 전쟁이라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곳을 둘러보았지만 아직 반나절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한카 호수를 향해 달렸습니다. 우수리스크 시내를 벗어나 덜컹 거리는 도로 위를 1시간 30분을 달리자 마치 바다를 만난 것 같은 거대한 호수가 나타났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러 오는 곳인데, 비가 내려 노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들 어린 아이가 된 마냥 점프를 하고, 브이자를 그리며 8박 9일 동안 정든 조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한카 호수를 보고 다시 우수리스크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스님은 어제, 오늘 유적지에서 단편적으로 배운 연해주의 이민사와 독립운동사를 전체적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연해주에 기행을 온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연해주에 온 것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발해시대 15부 가운데 4개부가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5부 중 솔빈부, 정리부를 비롯한 4개부가 있으니까 전 행정구역의 4분의 1이 이곳 연해주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발해의 성터가 많이 있어요. 각 부마다 주가 두세 개씩 있었으니까요. 그중 염주성은 어제 우리가 직접 가봤죠. 나머지는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묵은 우수리스크 시내에도 발해 고성터가 있어요. 대부분 파괴되고 남쪽 성벽만 조금 남아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다녀온 솔빈부 성은 발해 시대의 성인지 여부를 두고 이견이 있어요. 원래 발해 때 성이 있었고, 후세에 이르러 그 위에 더 쌓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성터만큼은 발해시대의 성터라고 봅니다.

또 이곳은 이후 동화국 시대의 수도였습니다. 수도였기에 그렇게 성벽을 높이 쌓은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조금씩 다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살펴보는 게 여기 온 이유 중 한 가지입니다. 여기서는 자유롭게 볼 수 있지만 중국에서는 자유롭게 보기가 어렵잖아요.

둘째, 이곳은 독립운동의 역사가 아주 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해외 독립운동 지역 중에 가장 앞서서 독립운동을 했던 곳이지만, 우리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등 북간도 중심으로만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곳 연해주 독립운동의 역사를 더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셋째, 이곳은 미개발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국이 북방정책을 쓴다면 이곳은 한국이 앞으로 널리 개발해야 할 투자처로 중요한 곳입니다. 한때는 북한 식량난이 심하다 보니 한국이 자본을 투자하고, 북한 노동자가 와서 농사를 짓도록 해서,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자는 제안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이 먼 곳까지 한 번 둘러보러 왔습니다. 한카호는 우수리스크에서 120킬로미터가 채 안 되니까 사실 그렇게 먼 곳은 아니지만요. 여러분 중에도 특히 젊은이들은 이런 뜻을 가지고 이곳을 한 번 개척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요.”

창밖에는 넓은 농토와 평원이 펼쳐졌습니다.

다시 우수리스크로 돌아온 기행단은 지난 8박 9일의 역사기행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왜 역사기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목적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역사기행은 곧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25년 전부터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한국 사회 안에 통일 담론이 사라졌어요. 지금 25년 전으로 돌아가 당시의 상황을 얘기해 보면, 우리의 국가 발전은 통일이 기본이 돼야 하지만 통일을 추진할 세력도 없었고, 통일에 대한 담론도 없었고, 남한과 북한 사이의 사회 시스템도 공통점이 없었습니다. 태국처럼 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국부가 통일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가 하나인 것도 아니고, 시스템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서로 다르고, 이념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로 달랐어요.

‘그러면 무엇이 통일의 기초가 될까? 앞으로 통일운동을 추동시켜 낼 남한과 북한의 공통점은 무엇이 될까?’

이런 고민에서 나온 게 역사예요. 역사는 부정할 수가 없잖아요. 어제까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였으니까요. 전체 역사에서 볼 때 분단은 눈 깜짝할 정도의 잠시에 불과한 거예요.

남북이 만나 보면 많이 다르죠? 그러나 우리가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은 사실 큰 차이가 아닙니다.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을 만났을 때와 비교해 보면 그건 털끝만큼 다른 차이에 불과해요. 콩과 콩을 비교할 때는 다른 콩이지만 콩과 쌀을 비교해보면 콩은 다 같은 콩이잖아요. 색깔이 파란 색이여도 같은 콩이고, 노란 색이여도 같은 콩이에요. 그런데 콩끼리 비교해보면 노란 콩 사이에서도 다른 콩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끼리 비교하니까 많이 달라진 것 같지만, 전체 인류사의 측면에서 보면 분단의 시기도 짧고 남북이 벌어진 간극도 사실은 매우 짧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역사관을 올바르게 가져야 해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이런 목표 때문에 이 역사기행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방에 앉아서 얘기해봐야 가슴에 다가오기 어려워요. 현장학습을 해야 깊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실제로 현장을 둘러보는 역사기행을 기획한 거예요.

우리 역사에서 극복해야 할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 고대사 부분에서 중국에 대한 열등의식입니다. 둘째, 근대사에서 일본에 대한 열등의식입니다. 셋째, 현대사에서 서양 또는 미국에 대한 열등의식이에요. 우리는 이 세 가지를 극복하기 위해서 역사를 살펴봐야 합니다. 우선 현대사는 지금 진해 중이니까 우선 놔두고, 그 중 고대사와 근대사를 먼저 살펴봐야 해요.

첫째, 고대사는 우리 역사의 뿌리를 정확하게 아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민족사는 너무 왜곡된 나머지 우리가 우리 역사를 잘 모르고 있어요.

둘째, 근대사는 지워진 부분이 많습니다. 자주독립을 위해서 엄청난 투쟁을 했지만, 분단과 좌우 이념대립으로 인해서 실제로 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지워졌어요. 남쪽은 남쪽대로 지워지고, 북쪽은 북쪽대로 주체사상을 내세우는 가운데 지워졌습니다. 남북 모두 자기 권력의 유지에 유리한 아주 일부분만 지금 공식화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독립운동에 대한 자긍심이 없습니다.

‘비록 힘이 부쳐서 식민 지배를 받았더라도 우리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줄기차게 투쟁했다’

이런 자긍심이 없고, 그냥 미국 등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독립이 공짜로 주어졌다고 생각해요.

셋째, 남한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체제가 미국에 의해 지켜지고 유지됐기 때문에 현대사에서 미국에 대한 의지가 거의 절대적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명나라를 부모 국가라 부른 것과 비슷해요. 그때는 글자도 우리 글자를 쓰면 불경하다고 하고, 중국보다 불교가 먼저 들어왔다고 해도 불경하다고 하고, 우리 역사가 중국보다 길다고 해도 불경하다고 했어요. (모두 웃음)

‘어떻게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될 수가 있느냐?’

이런 수준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사대주의는 500년간 형성된 것인데 반해 미국에 대한 사대의식은 50년 만에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어요.

이렇게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자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미래에 세계 인류, 즉 여러 민족 및 여러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해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어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런 왜곡된 부분,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형성된 열등의식을 좀 극복해야 우리가 당당한 삶의 자세를 가질 수 있지 않느냐는 거죠.

이것의 치유에 제일 좋은 방법은 우리가 직접 통일을 해내는 겁니다. 이렇게 역사기행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그게 더 좋아요. 통일을 우리 손으로 자주적으로 해결해버리면 과거의 상처가 있더라도 자신감이 있으니까 치유가 돼요. 그러나 지금 상태에서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좀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우선 좀 치유가 돼야 그런 활동을 할 수가 있어요. 이렇게 통일에 대한 원을 세우고 실천하게 되면 상당부분 치유를 할 수가 있어요. 이런 취지에서 역사기행이 시작됐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우리가 왜 통제를 받으며 역사기행을 다닐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앞으로 통일의병이 해야할 과제가 무엇인지 강조하며 강연을 마쳤습니다.

“우리가 역사기행을 다니면서, 중국에서는 애국가도 하나 못 부르고, 절도 한 번 못 하고, 플랜카드 하나도 못 붙였어요. 이렇게 일반적인 어떤 여행과 다른 이유는 첫째,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여서 생긴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이곳이 역사 분쟁의 현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것도 다 이런 것과 관계가 있어요. ‘나는 그런 가운데서도 어쨌든 자유롭게 행동하겠다’ 하는 것도 좋지만, 이게 현실이라는 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곳에 와 보니까 ‘왜 대국이 그런 사소한 문제 갖고 그러나’ 하고 여러분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통제가 심하죠? 사진만 찍어놓으면 뭔지 모르니까 밑에 ‘장군총’이라고 써놓는 것도 안 된다고 하고, 설명도 못하게 해요. 전 세계에서 이런 곳이 또 있을까요? 인도에 가도 부다가야 대탑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누구든지 설명할 수 있고, 로마에 가도 콜로세움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누구든지 설명할 수 있고, 미국에 가도 자유의 여신상을 누가 만들었는지 누구든지 설명할 수 있잖아요. 그걸 설명하지 못하게 한다는 게 말이 돼요? (모두 웃음)

그런데 그걸 못하게 하는 게 중국이에요. 그것도 조그마한 나라도 아니고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가 그래요. 대국에 가서 우리가 그 정도 얘기도 못한다니 당황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을 겁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현장에 가서 보고 반중 감정을 느끼라고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게 결국은 정치 문제예요. 중국은 미래를 보고 미리 이렇게 철저히 방비하는데 우리는 역사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있는 역사도 제대로 못 밝히고 정리도 못 하는 거예요.

이건 여러분이 맡아서 해야 할 일인데, 여러분이 안 하니까 스님이 지금 나서서 이렇게 안내하는 거예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과거사를 회복할 수 있으니까요. (모두 웃음)

앞으로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 새로운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합니다. 통일된 새로운 대한민국은 남한이 갖고 있는 많은 문제를 극복하는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더 발전되고, 경제 불평등은 더 개선되고, 환경 문제도 개선되고, 평화가 확고히 지켜지고, 국제협력도 이루어지는 등 내용적인 면이 새로워져야 해요. 3.1운동을 통해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을 수립했듯이, 통일이 되면서 새로운 국가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이게 ‘새로운 100년’을 향한 우리의 비전입니다.

그런 쪽에 내가 가진 재물이든 재능이든 뭔가를 써야 해요. 지금까지는 내 개인이 먹고 사는 데만 100퍼센트 썼다면 이제는 90퍼센트만 쓰고 10퍼센트를 내놓든지, 80퍼센트만 쓰고 20퍼센트를 내놓든지요. 적어도 십일조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십일조를 받으려고 제가 지금 이렇게 애쓰고 있는 거예요. (모두 웃음)

저는 나이도 있으니 떡 앉아서 ‘아이고, 나는 몸이 안 좋고 단식도 했으니까 너희만 염주성 다녀오너라. 너희만 탑산에 올라갔다 오너라’ 이래도 돼요. 그런데 일일이 같이 가서 설명도 하고 야단도 치는 건 이유가 있어요. 사람이란 누구나 다리가 아프고 힘에 부치면 하기 싫어지잖아요. 그런데 늙은 제가 뒤에서 따라다니고 지팡이 짚은 채 고함을 지르면 없던 힘도 생겨요. 물론 야단맞으면 기분은 좀 나쁘죠, 저도 알아요. (모두 웃음)

기분은 나쁘지만 그래도 어떡할 거예요? 어제 염주성에 갔을 때도 물웅덩이 투성이라 걷기가 힘들었는데, 뒤에 처지는 사람들에게 제가 재촉을 좀 했어요. 내버려두면 자정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테니까요. 그렇게 하는 것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에요. 우리가 좀 강인해져서 지금 당면한 난관들을 뚫자는 뜻입니다.

지금 한일 관계의 갈등 문제도 그래요. 너무 흥분해도 안 되고, 너무 비굴해도 안 되고, 목표의식이 분명하되 유연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일본의 저항을 적게 받으면서 난관을 뚫고 나가야지, 괜히 건드려서 저항이 많은 가운데 힘들게 뚫고 나갈 이유가 뭐가 있어요? 적이 공격을 할 핑계거리를 가능한 주지 말되 ‘아, 일본의 의도가 이렇구나’ 하고 알았으면 방비를 철저하게 해나가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 통일일꾼을 키우고자 이 역사기행을 준비했습니다. 잘 아시겠어요?”

“네!”

“힘들기는 하지만, 안내는 이만치 해주는 곳이 없어요.” (모두 박수와 환호)

스님의 정리 강의를 듣고 나니 역사기행을 온 스스로에게 더 큰 자부심이 들었습니다. 통일의병이 되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학습과 체험의 장은 없겠다 싶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북한 청소년과 남한 청소년이 함께 동북아 역사기행을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며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제 소감문 작성의 시간입니다. 조용히 지난 일정을 돌아보며 하얀 종이 위에 감동의 순간들을 적어내려 갑니다.

소감문을 발표하는 시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소감이 내 이야기 같습니다. 그 때의 느낌과 감정이 중중첩첩 쌓여가며 더 큰 울림을 만들어냈습니다.

“역사기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았습니다. 쏟아지는 장대비에 백두산 산문이 열리지 않아 돌아와야했고 차 사고가 났습니다. 봉오동, 청산리전투터는 아예 올라갈 수 없었고, 염주성은 무릎까지 물이 차올라 유격훈련 수준이었습니다. 국경에서 화장실을 가려다 불법입국이라며 벌금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차분히 대응하는 스님과 도반들이 보여준 수행자의 모습에 감동받았습니다.”

“북한 난민, 이주민,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우며 내 감정은 깊이 움직였습니다. 나에게서 벗어나 크게 보고 크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소심하고 유약한 마음에 배포와 깡이 생겼습니다.”

“지식으로 이해했던 역사가 살아숨쉬는 역사로 다가왔습니다.”

“대륙을 경영했던 선조들의 기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 바쁘다고 언제 한 번 진지하게 통일을 나의 문제로 받아들여본 적이 있었던가. 나를 돌아보고 통일 대한민국을 돌아보게 되었다.”

소감문 발표가 모두 끝나자 스님은 “운전 기사님들이 우리를 많이 기다렸어요. 내일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니 어서 빨리 숙소로 갑시다” 라며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버스에 올라타 숙소로 향했습니다. 스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주 재바르게 움직이는 기행단을 보니 제법 의병 훈련이 잘 된 것 같습니다.

내일은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합니다. 신한촌, 권업회 터, 독립문 터를 둘러보며 독립운동의 흔적을 더 깊이 느껴본 후 공항 출국 수속을 밟아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스님은 바로 이어서 블라디보스톡 공항으로 입국하는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팀을 맞이한 후 두 번째 역사기행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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