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전국 좋은이웃 나들이에 참석해 새터민들에게 독립기념관을 안내하고,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경 수련원에서 발우공양을 마친 뒤 바로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출발했습니다. 스님은 새터민들보다 일찍 도착하여 독립기념관을 둘러보며 바뀐 것은 없는지 어떻게 설명을 할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행사는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인권개선을 위해 스님이 1996년에 설립한 (사)좋은벗들에서 주관했습니다. 좋은벗들은 매년 봄에는 전국의 새터민들과 함께 나들이를 하고 가을에는 통일축전을 하고 있습니다.

유모차를 타고 온 아기부터 8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의 새터민 3백 여명과 좋은벗들 봉사자들도 독립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신청자보다 참가인원이 조금 적었습니다. 겨레의 집 뒤편 넓은 공터에 자리를 잡고 스님은 송수신기를 통해 인사를 했습니다.

“오시느라다고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대신해서 지난주에 여러분의 고향을 방문하고 왔습니다.(모두 박수) 제가 일일이 다 안부는 안 물어봤는데 다들 잘 계셨습니다.”(모두 웃음)

새터민들은 고향소식을 반가워하며 와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동안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응하느라고 힘드셨죠?”

“네!”

“오늘은 힘든 거 다 잊어버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놀더라도 공부를 하면서 놀아요. 독립기념관에 왔으니까 오전에는 우리나라 역사,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을 하기 위해 어떤 투쟁을 했는지 공부하고 오후에 놀겠습니다. 공부가 싫은 사람은 구경만 쭉 해도 돼요. 여기는 눈요기 거리도 많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제가 전체 역사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대략 감을 잡고 둘러보는 게 좋아요. 여러분이 북한에서 김일성의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달달 외우면서 공부했던데, 우리나라 전체 역사는 잘 모르더라고요.

우리나라는 반만년의 역사, 정확하게는 6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스님은 한나라, 배달나라, 단군조선에서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흐름과 일제 식민지 시기의 독립운동에 대해 쉽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어서 독립기념관을 안내해줄 안내자를 소개했습니다. 3백 명이 한꺼번에 둘러보면 앞사람은 스님과 함께 보며 설명을 들을 수 있지만 뒷사람은 한참 뒤에 오기 때문에 백 명씩 3팀으로 나누어 기념관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자, 안내자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분은 평화재단 사무총장 이승용 선생입니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좋은벗들 사무국장도 했고, 중국에 파견돼서 압록강, 두만강에서 여러분이 넘어올 때 돕는 일을 주로 했어요. 그러다 중국 정부에 잡혀서 감옥을 6개월 살고 추방당했습니다.(모두 박수) 그때 두만강변에서 넘어오는 난민들에게 식량, 의복을 지원하고 받은 영수증만 2만 개가 넘어요. 그래서 여러분 처지나 식량난으로 고통받았던 고난의 행군 시기를 잘 알아요.

이 분은 경상대학교 최광수 교수님이신데, 역사에 아주 밝아요. 그러니까 세 팀으로 나눠서 둘러보겠습니다.”

다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세 팀으로 나누어 독립기념관을 둘러보았습니다. 우리 나라 전 역사를 볼 수 있는 1관을 둘러보았습니다.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나라가 발해입니다. 혜산에서 넘어온 사람 있어요? 혜산 건너편이 중국의 장백이에요. 장백에 가면 영광탑이라고 발해시대의 탑이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세요. 신라시대는 평양과 원산만을 경계로 했고, 고려시대는 의주와 함흥을 경계로 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4군 6진을 개척했어요. 지금의 자강도를 개척한 사람이 최윤덕입니다. 이분이 4군을 개척했어요. 지금도 거기 가면 자성군이 있잖아요.”

“네”

“그다음에 김종서가 함경북도에 6진을 개척했어요. 온성, 종성, 회령, 부령, 경원, 경흥이죠. 지금은 이름이 일부 바뀌었죠. 이렇게 조선 세종 때 6진을 개척해서 현재 압록강, 두만강이 국경이 될 수 있었습니다.”

북한 지리를 훤히 알고 있는 스님이 고향 땅을 이야기하며 설명해주니 더욱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외세와 싸워서 크게 이긴 3대 대첩이 있습니다. 첫째,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에요. 고구려가 수나라의 백만대군을 물리쳤어요. 두 번째가 강감찬의 귀주대첩이에요. 고려가 거란의 10만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셋째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입니다.

살수가 어딘지 아십니까? 청천강입니다. 귀주도 북한에 있습니다. 평양성에 가보니 감찬정이 있었습니다. 강감찬이 대동강변의 귀주대첩을 구상했다고 해요.

오른쪽에 보시면 거북선이 있죠? 이순신은 한산도대첩뿐만 아니라 명량대첩, 노량대첩이 유명합니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다른 사람은 다 이겨도 이순신에게는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진짜, 스님?”

아이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어봤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계속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진짜 스님? 그럼 가짜 스님일까?(웃음) 제가 평양에 갔더니 애들이 뒤에서 ‘중이다. 중’이라고 소곤거렸어요. 할머니도 ‘중님이다. 중님’ 이래요.”(모두 웃음)

2관에서는 서구로부터 신문물이 들어오던 조선말의 풍경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2관을 나와 3관으로 이동하는 데 비가 그쳐 있습니다.

“종일 비가 온다고 했는데 비가 안 오네요. 그래도 비가 와야 해요. 왜냐하면 요새 가물어서 땅에 먼지가 풀풀 나고 밭작물이 말라죽고 있대요. 다니는 데 불편하더라도 비는 와야 해요. 북쪽도 가뭄이 심했어요.”

“지금 북한에서는 모내기철이라 길가는 사람 다 잡아다가 일 시켜요.”

“평안북도 향산에 갔더니 학생들이 밭에 옥수수 영양단지를 심고 있었어요. 또 강원도 석왕사에 가니까 대학생들이 돌을 나르고 있더라고요. 저도 같이 날랐어요.”

새터민들은 얼마 전 북한에 다녀온 스님에게 이것저것 북한 사정을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사를 담은 ‘나라 되찾기’ 5관을 둘러보았습니다.

“1917년에 세계 1차 대전이 끝나자 1918년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약소국은 독립해야 한다고 선언했어요. 사실 그 선언은 전쟁에서 진 독일의 식민지를 해방시키려는 속셈이었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윌슨의 선언에 따라 1919년에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그게 바로 3.1 독립운동이에요. 그러나 3.1 독립운동은 일제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맙니다. 북한 역사에서 3.1 독립운동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죠?”

“네.”

“3월 1일에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3월 1일 당일에는 전국 7곳에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남한에는 서울 한 곳, 나머지 6곳은 모두 지금의 북한 땅이었어요.

우리나라는 저절로 독립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엄청난 투쟁과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거예요.”

평화적으로 시위했던 3.1 독립운동이 일제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자 1920년대부터 독립운동의 성격은 무장투쟁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5관에서는 3.1 독립운동 이후 무장투쟁으로 이어진 독립운동사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 김일성의 조국광복회 활동은 없습니다.(모두 웃음) 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 중에 해방된 뒤에 남한의 이승만 정권에 실망해서 북쪽에 올라가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데 참여한 사람은 남한에서 독립훈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영화 밀정에 나오는 약산 김원봉 선생이죠. 이런 분들은 북쪽에서도 인정을 못 받고 종파투쟁 때 숙청당했습니다. 남쪽에도 공훈이 없고 북쪽에도 공훈이 없어요. 앞으로 남북이 화해하고, 통일이 되면 이념에 관계없이 사실에 입각해서 독립운동한 모든 분들이 그 공훈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편안한 삶이 이분들의 희생 위에 이루어진 것이니까 독립운동가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해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지만 어디에도 지친 육신 하나 누일 곳 없는 현실이 가슴 아팠습니다. 분단의 상처는 곳곳에 있었습니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겨레의 집 아래 돗자리를 깔고 각자 싸온 음식을 맛나게 나눠먹었습니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에 돗자리를 깔지 않도록 스텝들은 잘 안내해주세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를 한 후 스님도 도시락을 꺼내 먹었습니다. 새터민들이 “이북식 음식입니다.” 하고 몇 가지를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장아찌와 김자반뿐이던 밥상이 그런대로 풍성해졌습니다.

식사를 먼저 끝낸 스님은 주위를 돌며 새터민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아니 북쪽 사람들은 지금 배고파서 난리인데 왜 이렇게 반찬을 많이 싸왔어요?”

스님이 웃으며 구박을 하자 새터민들은 멋쩍은 듯 웃었습니다. 새터민들을 차례로 둘러보며 정겹게 인사를 나눈 뒤 스님은 4,6,7관도 마저 둘러봤습니다.

오후에는 강당에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이들은 야외에서 좋은벗들 봉사자들과 함께 그림 그리기, 풍선 만들기, 입체영화 보기, 기차 타기 등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즉문즉설을 하기 전 직장인 오카리나팀 ‘비앙카’가 맑고 고운 오카리나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곧이어 사회자의 안내로 스님이 무대로 등장하였습니다.

“공부도 좋지만 재미도 있어야 하니까 중간중간에 노래 불러가면서 하겠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다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 하나 부릅시다. 우리 고향 생각하면서 ‘고향의 봄’ 함께 부르겠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리움의 깊이가 다른 고향의 봄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묻어두고 살던 그리운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지 눈시울이 붉어진 분들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그런 새터민들의 아린 마음을 다독이며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운 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어머니 품, 둘째 고향, 셋째 고국입니다. 남의 나라에 살면 고국이 그립고, 타향에 살면 고향이 그립고, 부모 곁을 떠나면 어머니 품이 그립습니다.

남쪽에 사는 사람들도 대부분 자기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면 고향에 마음껏 갈 수 있으니까 그 그리움이 덜합니다. 보고 싶을 때 못 보면 그리움이 더 하죠.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움이 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타향살이가 쉽지 않지만 이 곳에 자리를 잘 잡으셔서 고향에 갈 기회가 왔을 때 금의환향하고 싶으시죠? 오늘 그런 희망을 가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북한을 왜 식량을 지원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가 탈북하기 전인 1996년부터 이북을 많이 도와주신 정말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그건 저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도 시종일관 계속 이북을 도와주고 계셔요. 솔직히 이북을 도와주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고, 특히 쌀을 보내준다고 하면 저희들도 자기 부모 형제가 이북에 있으면서도 적극 반대해요. 그런데 북미관계, 남북관계가 경색에 이른 오늘까지도 스님께서는 일편단심으로 이북을 돕고 계십니다. 어떤 철학과 마음을 갖고 계시기에 이러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페이스북에서 스님에 대한 글을 읽고 댓글도 달았는데, 솔직히 스님을 좀 욕했어요. 댓글에 ‘그 쌀이 우리 어머니며 우리 백성들한테 가기나 할까’라고 썼습니다.(모두 웃음)

대통령 감으로 추대하고 싶을 정도로 멋있는 분이 왜 일편단심 시종일관 이북에 쌀을 주시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철학이 있는지요? 우리 탈북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질문 내용을 듣고 새터민들 모두 환호와 박수를 터뜨렸습니다.

“어미는 자기 목숨을 걸고라도 반드시 새끼를 보호하는 게 생명의 원리입니다. 그런 본능이 없으면 종족 유지가 안 돼요. 새끼가 다 죽어버리면 종이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본능이 있기 때문에 종이 유지되고, 또 종이 유지되려면 그런 본능이 있어야 해요.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는 것은 자연의 원리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를 낳으면 보호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습니다. 내가 살기 어렵다고 해서 아이를 보살피지 않고 버리면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부모가 어린아이를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이 정말로 없어서 돌볼 수가 없다면 얘기는 달라요. 부모가 없어서 아이만 남았거나, 부모가 심하게 병들었거나, 극한의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해서 아이를 보살필 수 없다면, 그게 내 아이가 아니라도 이웃집 어른이 아이를 보살펴야 해요. 내 아이를 내가 보살피는 게 첫째지만, 이 아이를 보살필 사람이 없다면 그건 내 아이가 아니라도 이웃집 사람이라도 나서서 아이를 보살펴야 해요. 어른이 아이를 보살피는 것은 인간의 양심입니다.

배부른 사람이 배고픈 사람을 도와야 해요. 배운 사람이 배우지 못한 사람을 도와야 해요.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젊은이가 늙은이를 부축해야 해요. 이건 인간의 도리입니다. 특정한 종교, 특정한 이념, 특정한 사상과 관계가 없어요.

그런데 사람이 미치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종교에 미치거나, 이념에 미치거나, 자기 믿음에 너무 빠지거나, 자기감정에 사로잡히면, 건강한 사람도 죽여 버리고, 자기 아이조차 보살피지 않고 버리고, 굶어 죽는 것도 외면하게 돼요.

나는 배불리 먹으면서 굶어 죽는 사람을 외면하는 건 정상적인 게 아니에요. 배부른 사람이 배고픈 사람을 돕는 게 정상적이고, 외면하는 건 정상적이지 않아요. 배운 사람이 배우지 못한 사람을 가르치는 게 정상적이지, 그걸 외면하는 건 정상적이지 않아요.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보살피는 게 정상이고, 그걸 외면하는 건 정상적이지 않아요. 법륜 스님은 그냥 정상적인 사람이에요. (모두 웃음)

종교적인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고, 특별한 정치 이념이 있어서도 아니고, 제가 사람으로서 비교적 정상적이기에 돕는 거예요. ‘저 사람들을 왜 도와줘? 저런 사람들은 굶어 죽어야 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비정상적인 거예요. 기독교인이 ‘저 무슬림 놈들은 굶어 죽어야 돼!’라고 말하면 그건 비정상적이에요. ‘북한 놈들! 저런 인간들은 굶어 죽어야 돼!’라고 하거나 ‘일본 놈들은 물에 빠져 죽어야 돼!’라고 하면 그건 비정상적이에요. 일본이 위안부 문제며 학도병이며 강제 징용을 해놓고 반성조차 안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지진이 나서 사람이 먹을 게 없어 굶어 죽는다면 이런 문제와는 별개로 도와야 해요.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 문제대로 풀되 당장 굶어 죽는다면 도와야 하고, 약이 없다고 하면 약을 보내줘야 합니다.

이런 사람의 도리를 인간 세상에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00여 년 전에야 비로소 깨달아서 내놓은 원칙이 ‘인도주의 원칙’입니다. ‘사람이라면 이렇게 가야 한다’라고 해서 ‘인도(人道)’, 즉 ‘사람이 가야 할 길’이라고 부릅니다. 인도주의 원칙은 정치, 이념, 사상, 종교, 믿음, 인종, 성 같은 것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프가니스탄에 갔는데, 세계 최대의 불상을 탈레반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렸어요.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약이 없어서 병들어 죽거나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는다고 하면 저는 도와요. 불상 파괴 문제와는 별개예요. 불상을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린 사람이 그곳에서는 어린애나 배고픈 사람은 아니잖아요.

북한의 탄광촌이 지금 식량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대요. 실제로 그런지 열흘 전에 제가 직접 가서 확인을 했더니 실제로 그랬습니다. 저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제가 속은 것이 되겠죠. 인도주의 원칙은 첫째,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 지원을 했더라도 정작 필요한 곳에 안 갔다면 그것도 속은 거예요. 그런데 지원한 게 실제로 그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면 이런 지원은 북한에서 미사일을 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미사일을 그 사람들이 쏜 것도 아니고, 미사일을 쐈다고 그 사람들이 배불러진 것도 아니잖아요.

인도적인 지원을 할 때는 정치나 어떤 이념을 보는 게 아니라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 배가 고프냐’, ‘우리가 하는 일이 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느냐’, 이 두 가지를 봅니다. UN기구에서 지원을 결정할 때도 첫 번째로는 인도적 위기에 처해 있느냐를 보고, 두 번째로는 지원한 게 거기에 도움이 되느냐를 봅니다. 이걸 모니터링(monitoring)이라고 해요. 100퍼센트 지원이 되었는지를 따지는 게 아닙니다. 절반만 가도 도움이 돼요. 그러나 하나도 안 갔다고 하면 지원을 안 해야 해요. 그런 경우에는 지원을 해봐야 아무 도움이 안 되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저는 북한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같은 동포이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는 것만은 아니에요. 인도도 도왔고, 아프가니스탄도 도왔고, 필리핀도 도왔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어디든 돕습니다. 미얀마에 살다가 방글라데시 쪽으로 넘어온 로힝야 난민이 많이 발생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셨죠? 지난 1월에 제가 그곳에 가스스토브 10만 개를 지원했습니다. 저는 북한만 돕는 게 아니고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 아프가니스탄 분쟁지역, 인도의 불가촉천민들도 돕습니다.

북한은 1995년에 대홍수가 있었어요. 실질적으로 기근은 1994년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하지만, 1995년 대홍수가 나서야 그 소식을 알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 기근이 그 정도로 심한 줄 몰랐거든요. 저도 중국에 역사기행을 갔다가 압록강변에서 북한 어린이를 만나고 나서 그 사정을 알게 됐어요. 가난하다는 건 알았지만 굶어 죽는다는 건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면서 어렵다는 걸 알게 되어 1996년부터 돕기 시작했는데, 그때 강릉 잠수함 사건이 났어요. 북쪽에서 잠수함을 보내서 동해안으로 간첩이 침투한 사건이었죠. 그래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원하던 게 모두 멈추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만난 그 어린아이가 강릉 잠수함 사건과 상관이 있을까? 나는 압록강변에서 그 어린아이를 보고 ‘아, 내가 이 아이를 도와줘야 하겠구나’ 이런 마음이 들어서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을 시작했는데, 잠수함 사건이 터지자 지원이 중단된다면 그 아이가 잠수함 사건을 일으켰느냐? 아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지금 배가 불러졌느냐?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은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지원을 계속했어요. 우리는 평양 쪽에 지원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주로 함경북도, 청진, 무산, 회령, 온성, 나진 같은 변방 지역을 지원했고, 나중에는 고아원을 지원했어요. 북쪽에서는 학원이라고 부르죠? 애육원, 육아원, 초등학원, 중등학원, 이런 학원 전부를 맡아서 지원을 하다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로는 지원을 못했어요. 제가 그때 가보지는 않았지만 ‘평양은 어쨌든 북한 정부가 책임지고 있고, 지방은 손이 못 미친다’라고 해서 지방을 많이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북쪽에서는 저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평양은 그래도 먹고살만하고 지방이 어렵다고 하기에 지방을 도왔지만, 북쪽 정부가 생각할 때는 ‘지방에 영향력을 끼치거나 간첩 행위를 하려고 한다’ 이렇게 오해를 했기 때문에 도와주고도 내내 욕을 얻어먹었어요. 남쪽에 있는 NGO 중에 손봐야 할 몇 번째에 제가 들어갔습니다. (모두 웃음)

그리고 제가 탈북 난민을 많이 돕는 것에 대해서도 북쪽에서 싫어했어요. 압록강이나 두만강변에서 우리가 도와준 사람이 2만 여 명이고, 인터뷰한 것만 해도 5천여 명에 달합니다. 인터뷰한 내용을 모두 정리해서 북한 난민들의 인권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북한의 식량난이 얼마나 열악한지에 대한 보고서를 제작해서 UN에 제출하기도 했어요. 이런 이유 때문에 제가 북쪽에서는 적대행위를 한다는 오해를 좀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들어오면서 북한을 돕지 말라고 해서 5년간 못 도왔어요. 그런데 작년부터 UN의 경제 제재로 인해 탄광촌의 사정이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북한 전체가 어려운 게 아니라 탄광촌이 너무 어려워서 일부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긴다고 했어요. 작년 봄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지만 지원을 못하고 그냥 있었는데, 작년 9월에 공식적으로 지원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확인해보니 실제로 사정이 많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제가 북쪽에 이렇게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돕는 단체니까 어린이 단체 중 하나를 연결해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조선어린이후원협회’라는 단체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공식적인 단체를 연결해주었기 때문에 그쪽을 통해 지금 모든 학원에 물자를 공급하고 있어요. 옛날에 우리가 해오던 일 그대로 고아원에 물자를 공급합니다. 5월 초에 지원이 잘 되었는지 모니터링을 하러 갔는데, 북쪽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학원은 최고지도자가 큰 관심을 갖고 돌보기 때문에 그래도 괜찮습니다. 진짜 어려운 곳은 광산촌입니다.’

그래서 제가 학원을 한 번 가보자고 했어요. 직접 가보니 고아원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전부 최신 건물로 바뀌었어요. 평양 하나만 그런 게 아니라 각 도에 있는 고아원 모두가 그렇게 바뀌었고, 시설도 전부 최신 시설로 새로 만들었습니다. 학원 물자 공급소에도 가봤더니 우리가 보낸 식량이 차곡차곡 다 그대로 쌓여 있었어요. 그래서 북쪽 사람들 얘기가 일리 있다 싶었습니다.

그러면 어렵다는 광산촌을 한 번 보여 달라고 해서 광산촌도 보러 갔어요. 가보니까 아이들도 그렇고 정말 사정이 어려웠어요. 어렵다는 게 사실인 줄은 확인했지만, 제가 ‘그래도 우리는 어린이 돕는 단체인데 지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라고 하니까 ‘탄광촌에 노동자만 있는 게 아니라 이곳에도 어린이들이 많습니다’라고 해요. ‘초등학생도 있고, 중학생도 있고, 유치원도 있다’라고 하면서 유치원을 보여주는데, 어린이들의 영양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습니다.

‘수출해서 먹고살았는데 제재 때문에 수출이 안 되니까 월급도 못 주고 식량 공급도 못 합니다. 그래서 여기가 급합니다.’

간곡하게 요청을 하기에 제가 그랬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준 식량 중 일부를 이쪽으로 주어도 좋습니다.’

이렇게 해서 JTS에서는 5월과 6월 두 달 동안 북한에 옥수수 1만 톤을 보내기 위한 모금 캠페인을 지난주부터 시작했습니다.

제가 10년 전에도 식량을 싣고 개성을 간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식량을 가져갔는데도 북쪽 사람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안 했어요. 태도가 ‘가져왔어요? 저기 갔다 놔요’ 이런 수준이었어요. (모두 웃음)

인사를 들으려고 간 건 아니지만, 식량을 가져갔던 사람들이 기분이 썩 안 좋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지원했을 때는 정말 진심으로 고맙다고 얘기했어요.

‘우리가 진짜 어려울 때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아무도 안 도와줄 때 도와줘서 너무 고맙습니다.’

이런 인사를 여러 번 받았습니다. 이것이 옛날과 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북한에 5일 다녀와서 뭘 알겠어요? 머문 시간이 짧고 둘러본 공간이 굉장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저는 북한에 안 가도 늘 북한 전문가들과 의논하면서 북쪽 소식을 듣는 사람이잖아요. 쌀값이 얼마다, 환율이 얼마다, 뭐가 문제다, 이런 온갖 소식을 한국에서 늘 듣고 있어요. 그래서 북한에 들어가서 대강 봐도 실제 사정이 어떤지 짐작은 할 수 있어요.

지금 북한의 식량 사정이 어렵다는 건 건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UN기구가 조사해보니 수치적으로 식량 사정이 어렵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작년부터 농업 생산량이 많이 떨어졌어요. 작년 봄에 가뭄이 아주 심해서 수확량이 떨어졌습니다. 둘째, 작년 봄부터 굶어 죽는 사람이 일부 생긴다는 정보와 식량 지원 요청이 저한테 비공식적으로 계속 들어왔습니다. 제가 아무 정보 없이 간 건 아니에요.

이렇듯 식량 사정이 어려운 건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여러분이 경험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처럼 사회 전체가 주저앉아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여기저기 건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왜 북한을 계속 돕느냐고요. 식량이 부족하니까 계속 돕는 거예요. (모두 웃음) 동포여서도 아니고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돕는 거예요. 인도주의적으로 돕는다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라도 사정이 그렇다고 하면 돕는 것입니다. 필리핀에서 그렇다 해도 돕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렇다 해도 도와요.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그렇다고 하는 건 못 돕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얼굴이 검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역량이 그렇게 먼 곳까지 가서 지원할 만한 크기나 규모가 안 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활동 범위를 아시아권으로만 제한해두고 있습니다. 지진, 화산 폭발, 큰 홍수처럼 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나는 문제나 긴급재난은 무조건 가서 활동합니다. 주로 학교를 지어주고, 지진이 나서 집이 없어졌다면 임시 텐트를 지어주거나 식량을 지급하거나 살림도구를 챙겨주기도 합니다. 급하면 숟가락 몇 개, 밥그릇 몇 개씩 챙겨주기도 해요.

그런데 이번에는 JTS가 북한에 쌀을 주지는 않았어요. 밀가루도 안 줬어요. 옥수수를 지원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사람이 먹으라고 옥수수를 지원한 겁니다. 옥수수가 그래도 값이 제일 저렴하거든요. 지금 북한에 보내주는 건 쌀이 아니고 옥수수예요.” (모두 박수)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인테리어 사업을 합니다. 업자는 제가 일을 깔끔하게 해서 좋아하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제가 깔끔하게 하자고 해도 북한에서 왔다고 무시해요. 업자와 같이 일하는 사람 사이에서 마음이 힘듭니다.
  • 북한이 핵을 포기할까요?
  • 10년 내에 통일이 될까요? 김정은도 만나고 오셨나요?
  • 스님 제가 기가 세다는데 관상 좀 봐주세요.
  • 한국에 온 지 두 달째입니다. 자꾸 위축이 되고 사회에 나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어떻게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즉문즉설 중간중간 새터민들의 노래도 듣고 새터민으로 구성된 늘 푸른 예술단의 멋진 공연도 보았습니다. 새터민들은 오랜만에 고향 노래도 소리 내어 목청껏 불러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새터민들을 격려하며 즉문즉설을 마쳤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부탁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여러분이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털끝만큼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숨기려고 하지도 말고요. 묻지도 않는데 ‘내가 북쪽에서 왔다!’ 이렇게 자랑할 것도 없지만,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속으로 숨기려고 우물쭈물하면 바보예요. 알았죠?”

“예!” (모두 크게 대답)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났느냐는 전생의 죄도 아니고, 하느님의 벌도 아니고, 사주팔자와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태어나 보니 거기에 있는 걸 내가 어떻게 해요? (모두 웃음)

내가 북한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태어나 보니 거기에 태어난 것이잖아요. 내가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사람을 차별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세요. 비록 북한의 정치체제나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내가 여기 와서 타향살이를 좀 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고향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 사람들이 옛날에 경제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가서 사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그렇다고 ‘내가 한국 사람이다’ 하는 걸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없는 것과 같아요.

첫째, 내가 북한 출신이라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둘째, 부모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한국 사회를 보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못된 짓을 많이 하잖아요. 문제를 일으켜서 신문에 맨날 나오는 사람들은 첫째, 돈 많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지위가 높은 사람들입니다. 셋째, 인기가 많은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문제이지, 청소를 하거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여러분이 미사일을 쏜 것도 아니고, 핵무기를 만든 것도 아닌데, 그걸 갖고 자꾸 위축되지 마세요. 남한 사람이 뭐라 그러거든 이렇게 말하세요.

‘야, 나는 지금 남한에 살고 있잖아.’ (모두 웃음)

나는 지금 북한에서 사는 게 아니고 남한에서 살고 있다고 얘기하면 됩니다. 그런 걸 갖고 너무 위축되지도 말고, 그렇다고 북한을 너무 욕하지도 마세요. 남한도 나라를 지켜야 하고, 북한도 자기들 나름대로 나라를 지켜야 하니까, 그런 정치 문제에 여러분은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남북관계가 개선될수록 여러분들에게 이롭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이익을 챙길 줄 알아야 해요. 예전에는 탈북자 분들이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그런 걸 지원하는 정치단체에서 지원금이 나오기도 했는데, 정권이 바뀌면서는 그런 지원도 많이 끊어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분노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마세요. 혹시라도 비판적인 활동을 하게 되면 그로 인한 불이익을 각오해야 합니다. 저는 예전에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는데, 그때 불이익을 당할 각오를 했습니다. 그래서 고문도 당하고 감옥살이도 해야 했어요. 만약 활동을 하려고 하면 불이익에 대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우선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것에 삶의 중심을 두는 게 좋습니다.

통일을 주장하는 것만 통일운동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한국 사회에서 정직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 곧 통일운동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어디서든 착실하게 살면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사람들 괜찮구나’, ‘우리 가게에 북한 사람이 일하는데, 사람 참 좋더라’, ‘회사 사장님이 북한 사람인데, 남쪽 사장님보다 좋아’ 하는 인식을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상이 계속해서 생기면 남쪽 사람들이 ‘남북한이 같이 살아도 되겠다’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돼요.

통일을 주장하는 것만이 통일운동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남한 사회에서 신뢰를 얻는 게 곧 통일운동입니다. 북한 출신 사람들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신뢰를 얻는 게 통일운동이에요. 만약 북한 사람들이 매일 술 마시고 행패를 피우거나 말썽만 일으키고 고집불통이면, 남한 사람들이 ‘저런 사람을 왜 받아들였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반(反) 통일운동이 되는 거예요. 남한 사람들의 인식 속에 ‘북한 사람들과 같이 살면 안 되겠다’ 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한국 사회에 정착해서 잘 살아가는 게 곧 통일운동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당장 통일을 위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착실하게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나중에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때 투자할 만한 아이디어도 미리 생각해두고, 돈도 조금 저축해두고, 기술과 경험도 익히면서 기다리면, 언젠가는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여러분들이 고향을 방문할 수 있는 날이 옵니다. 그때 미리 준비해놓은 아이디어로 잽싸게 들어가서 가게를 차리거나, 북한에서 잘 안 되는 회사를 인수해서 경영을 잘하면 돼요. 그렇게 생각하면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데에도 좋고, 미래를 위한 비전을 만드는 데에도 좋습니다. 그러니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너무 돈 버는 것에만 몰두하지 말고, 주말에는 시간을 내서 여행도 다니세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라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공부도 해보세요.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는데 여러 곳에 있는 산과 사찰 구경도 조금씩 하세요. 남은 인생이 실제로는 얼마 안 됩니다. 조금 지내다 보면 죽을 때가 곧 와요. (모두 웃음)

돈을 모아놓기만 해서 어떡할래요? 아무리 부자여도 하루에 세 끼 이상 못 먹잖아요. 세 끼 이상 먹으면 배만 나오지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조금 여유를 갖고 살아야지, 너무 긴장해서 조마조마하게 살 필요 없어요.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남한에 와서 살아보니까 차별을 조금 받죠?”

“네.”

“그렇다고 남한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차별을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여러분과 말투가 다르니까 그냥 하는 소리예요. 우리도 지나가다가 얼굴이 까만 사람이 지나가면 ‘저 사람 아프리카에서 왔나?’ 하잖아요. (모두 웃음)

그럴 때 그 사람을 차별하거나 비난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랑 다르니까 지나가는 말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제가 북한에 가니까 의복이 자기들과 다르니까 아이들이 저를 보고 ‘중이다!’ 하더라고요. 어른들은 ‘중님이다!’라고 하고요. (모두 웃음)

그건 저를 욕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랑 다르니까 이상하고 신기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한국에서 저를 보고 중이라고 하면 욕이지만, 북한에서는 잘 모르니까 이상해서 하는 소리예요.

남한 사람이 북한으로 가서 위축될 필요도 없고, 북한 사람이 남한에 와서 위축될 필요도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서로 싸운 다음 완전히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우리는 같은 민족입니다. 삼국시대 때 신라에는 김유신 장군이 있었고, 백제에는 계백 장군이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 경상도 사람들이 계백 장군은 전라도 사람이라는 이유로 등한시 하나요?”

“아니요.”

“전라도 사람들이 김유신 장군은 경상도 사람이라고 등한시하지 않잖아요. 신라와 백제가 서로 욕한 건 둘이 싸울 때 얘기예요. 하나의 나라가 되고 나면 김유신 장군이 어느 지방 출신인지, 계백 장군이 어느 지방 출신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둘 다 우리의 훌륭한 조상이에요.

앞으로 통일이 되려면, 남쪽 사람도 북쪽의 열사릉에 가서 참배할 줄 알아야 하고, 북쪽 사람도 남쪽의 국립묘지에 가서 참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정도로 문호가 트여야 합니다.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시선을 갖고 있으면 교류와 협력이 어려워요. 여러분은 오랫동안 북한에 살면서 흑백논리를 많이 접했기 때문에 남쪽에서도 계속 그렇게 지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말 통일을 원한다면, 생각을 조금 열고 지내야 합니다.”

스님의 따뜻한 격려에 새터민들은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즉문즉설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봉사자들이 손에 양말을 쥐어주었습니다.

스님은 입구에서 새터민 한 명 한 명과 “잘 지내세요.”하고 인사를 나눈 뒤 서울로 이동했습니다.


북한은 지금 춘궁기 보릿고개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습니다. 감자를 수확하는 7월까지 북한의 아이들은 먹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보내는 옥수수 1만 톤은 북한 아이들이 보릿고개를 넘기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함께 해주세요.

<후원 신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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