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 6년간 머무른 산, 전정각산

오늘은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하셨던 발자취를 따라 둥게스와리 전정각산으로 향합니다. 전정각산 아래에는 불가촉천민을 위해 JTS가 설립한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습니다. 2600여년 전 수자타가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듯, 이제는 JTS가 이곳의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순례를 출발한지 3일째 되는 날입니다. 곳곳에 흩어져있는 바라나시 숙소의 각자 방에서 새벽 4시에 기상한 순례단은 짐을 챙겨 나와서 버스에 올라타 4시 30분에 출발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이 다섯 비구와 야사 등 60명의 대중을 사르나트에서 교화하고 전법선언을 하신 후 가섭 형제를 교화하기 위해 다시 우루벨라 마을로 향한 그 길을 따라 갑니다. 바라나시에서 가야까지 부처님이 전법을 위해 걸어가셨던 그 마음을 느껴보며 무려 250km에 달하는 머나먼 길을 이동했습니다. 버스로 9시간 동안 달려갔습니다.

이동하는 도중 잠깐 차를 세우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인도는 도로가에 화장실이라는 것이 없고, 모든 곳이 다 화장실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유채밭에 숨어 앉거나, 키 높이의 나무 뒤에 나란히 앉거나 해서 볼일을 해결했습니다. 아무튼 인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재미난 풍경이었습니다.

오전 10시 무렵에는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비가 내려 밖에서 식사하기에는 땅이 질척거렸습니다. 집안 냉장고만 열면 볼 수 있는 흔한 반찬들이었지만 모두들 서로의 반찬을 나눠먹으며 맛있게 식사를 마쳤습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서로 소개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정토회를 만나고 순례를 오게 되었는지, 어제와 그제 성지순례을 하며 느낀 소감 등을 함께 나누며 서로 친해지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늦을까봐 새벽 4시 30분에 출발했건만, 가는 도중 도로를 공사하는 곳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 아쉽지만 가야산은 오르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가며 잠시 봤습니다.

“옆에 보이는 저 산이 가야산, 또는 상두산이라고 합니다. 중간에 깃발 꽂힌 평평한 곳이 부처님께서 천명의 비구를 두고 설법하셨던 곳이에요. 오늘 원래 우리가 가야산에 오르려고 했는데 계획보다 2시간 늦게 도착해서 오늘은 못 가고 내일 일정 봐서 갈 수 있으면 가겠습니다.”

가야시에서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는 둥게스와리까지는 11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둥게스와리는 불가촉천민이 주로 사는 지역이고 여러 가지로 환경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스님도 처음에 이곳을 못 찾아 엉뚱한 마을에 옷가지와 구호품을 나눠주고 올 정도로 외진 지역이었는데, 오늘은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학교까지 들어갔습니다. 둥게스와리에 들어서자 스님은 이런 저런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이 여기서 대추를 드시고 수행했다고 하는데, 오른쪽에 보이는 이게 다 대추나무입니다. 제가 처음 여기 와서 살 때 동네 사람들이 저에게 가져다 준 게 대추였어요.”

크게 변한 것이 없을 것 같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대추나무들이 서 있었습니다. 2600년 전 부처님의 발자취가 물씬 느껴졌습니다.

“여기 왼쪽은 정부가 세운 학교입니다. 시골의 정부학교는 저렇게 두 칸짜리 학교를 지어서 운영해요. 선생님은 월급을 받는데 안 나타나요. (모두 웃음) 동네 청년한테 몇 푼 주고 관리하도록 하고는 본인은 며칠에 한 번씩 나온다고 합니다.

오른쪽을 보세요. 이 연두색 건물은 저희가 이 동네에 지은 유치원입니다. 이런 유치원이 전정각산을 둘러싸고 15개가 있어요. 동네 아이들이 코흘리개부터 유치원을 다니며 학교 다니는 연습을 해서 수자타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산 너머 마을 아이들은 오기 어렵다고 해서 분교를 만들어 그 학교에 다니게 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은 정부학교 선생님이 안 나타난다는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전정각산을 둘러싸고 수자타 아카데미와 15개의 유치원이 운영된다는 말에는 감탄을 했습니다. 스님은 인도에 성지순례를 왔다가 구걸하며 따라 붙는 아이들에게 돈을 줘 보기도하고 안 주기도 하고,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다가 결국 아이들이 구걸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방법으로 학교를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수자타 아카데미 건물은 전정각산 중턱에 자리잡은 부처님의 고행지 ‘유영굴(留影窟)’의 바로 밑에 있습니다. 둥게스와리 지역은 부처님 당대에는 ‘시타림(屍陀林)’이라고 알려진 공동묘지였습니다. 천민들은 화장을 할 만한 여력이 없었기에 시체를 그대로 시타림에 내다버리곤 했는데요. 경전에 따르면 라즈기르(Rajgir)에서 도반인 다섯 비구와 같이 가야에 이른 싯타르타는 인적이 드물고 황량한 이곳을 보시고 수행하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하시며 고행지로 정하셨다고 합니다.

현재도 이곳의 주민들은 카스트에도 속하지 못할 만큼 미천하여 접촉하기만 해도 부정을 탄다고 믿어지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에 도착하자 순례단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꽃목걸이를 손에 들고 길 양 옆으로 학생들이 서서 뜨거운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가장 먼저 스님이 걸어가자 선생님과 아이들 여러 명이 꽃목걸이를 스님에게 걸어주고, 맨 앞에 코끼리를 탄 아이는 스님의 머리 위로 꽃잎을 흩뿌렸습니다. 인도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은 풍악을 연주하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400명의 순례단 모두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었고, 순례단 모두가 꽃목걸이를 걸어 준 아이들의 손을 각각 잡고 수자타 아카데미 교문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냥 가슴이 뭉클해지고 감동이 절로 일어났습니다.

구걸하던 아이들이 스님이 세운 학교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이제는 예쁜 교복을 차려입고 이렇게 순례단을 반갑게 환영해주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 안으로 들어와서는 먼저 정문 앞에 자리한 전정각사 법당에 들어가 참배를 한 후 고 설성봉 거사님의 부도탑을 참배했습니다. 고 설성봉 거사님은 한국 JTS의 스텝으로 파견되어서 기술학교를 건축하신 분입니다. 수자타 아카데미가 생기고 나서 무장한 강도 집단으로부터 세 번 습격을 받았는데, 설성봉거사님은 세 번째 습격 때 총격에 맞아서 이곳에서 사망하셨습니다. 2002년 1월 10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부도탑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설성봉 거사님의 서거 이후로는 학교가 한 번도 습격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성봉 거사님이 돌아가신 후 이곳에 경찰 한 개 소대가 10년 이상 계속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는데 설성봉 거사님의 희생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이 지역의 치안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래서 JTS에서는 설성봉 거사님의 기일을 맞이하여 이곳에서 늘 재를 지냅니다.

학교 건물 마당 안으로 들어오니 학교 안은 마치 운동회 날인 듯 꾸며져 있었습니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던 거리와 달리 학교 안 마당과 거리가 말끔했습니다. 알고 보니 순례단을 맞이하기 위해 기숙사 앞은 소똥칠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합니다.

설 거사님의 부도탑을 지나 지바카 병원으로 학교 내를 한 바퀴 빙 둘러 운동장에 들어서니 따뜻한 짜이와 쿠키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학교의 상급생들은 언제 한국어를 연습했는지 간단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순례단을 맞이하는 학생들의 정성을 학교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짜이를 마시며 잠시 여유를 가지는 사이 운동장에서 수자타 아카데미 학생들의 환영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성지순례단을 환영해주었던 아이들이 신나게 인도 전통악기를 연주했습니다. 이어서 리코더와 멜로디언 합주, 남자 상급생들의 멋진 댄스 공연, 귀여운 초등학생들이 인도 전통 춤과 현대 탭댄스가 섞인 댄스를 선보였습니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박수가 절로 나왔습니다. 귀엽고 기특한 아이들의 모습에 박수가 점점 커졌습니다. 마지막 공연이 끝나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순례객들은 모두 쁘락보디홀로 모였습니다. 원래 전정각산에서 설명을 하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먼저 설명을 듣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전정각산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서 소개해주었습니다.

전정각산 Prakbodhi

“다른 학문은 배우면서 중간 단계를 점검할 수 있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처음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내면의 의문을 표현한 것을 경전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곳 전정각산에서 6년간 고행을 하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더위도 피하지 않고, 추위도 피하지 않고, 아이들이 와서 막대기로 때리거나 해도 꼼짝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 정도인데 벌레나 모기가 무는 것 정도는 전혀 문제가 안 되었겠죠.

그렇게 6년간 고행을 했는데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시니까 어느 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6년 동안 스스로 봐서 게을렀다고 생각이 들면 ‘더 부지런히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행을 했는데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니 그때까지의 과정을 스스로 돌아보게 된 거예요.

지금까지의 과정을 쭉 돌아보니 출가하기 전 29년 동안에는 늘 욕망을 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먹고 싶으면 먹고, 가고 싶으면 간 거예요. 쾌락은 뭔가 막 즐거움을 쫓는 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 욕구, 욕망을 따라가는 거예요. 이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쾌락이라는 것은 만족시키면 그 욕구가 더 커지는 성향이 있어요. 그것을 보고 쾌락이라는 것을 쫓지 않고, 어떠한 욕망이든 그 씨를 말려버리려는 접근 방식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떤 욕망이 일어나도 따르지 않고 그걸 억제하는 방식이 ‘고행주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욕망을 따라가는 쾌락주의만 깨달음의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억제하는 고행주의도 해탈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셨습니다. 스스로 직접 해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거예요. 쾌락도 왕자 시절에 끝까지 해봤고, 고행도 6년간 다른 사람이 감히 흉내낼 수 없을 만큼 해봤습니다.

그때 발견한 진리가, 욕구를 따라가는 것도 욕구를 억제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욕구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그 둘은 욕구가 일어난 다음 그것을 따를지 말지를 결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욕구에 반응하지 않는 길은 없을까?’를 떠올렸습니다.

쾌락과 고행 모두 욕구에 대한 반응으로, 욕구에 따라가는 길을 택하면 과보를 받고, 욕구를 억제하는 길을 택하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사실 이 두 가지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괴로움입니다. 우리는 늘 욕구에 따라갔다가 후회하고 억제했다가 터지고, 늘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면서 괴로워합니다. 성질이 나면 터뜨리고, 터뜨린 다음 후회하고, 후회하니까 다음 번에는 참았다가 또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터지고, 그런 다음 또 후회하는 과정의 반복입니다.

이 욕구에 반응하지 않는 길, 즉 욕구가 욕구인 줄 알고 욕망이 욕망인 줄 아는 길, 다만 알아차릴 뿐 일어나는 욕구에 반응하지 않는 길이 중도(中道)입니다. 즉,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억제하는 것도 아닌 다만 일어난 욕구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도예요. 이것이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제 3의 길입니다. 출가할 때는 쾌락을 버렸는데, 고행을 해보고는 고행도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고행을 버렸다고 하니까, 여러분들은 명상할 때 다리가 조금만 아파도 ‘이건 고행인데 버려야 된다’라고 생각해요. 그 둘은 성격이 다른 거예요. (대중 웃음)

이렇게 제 3의 길을 발견하시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산줄기를 따라 강변으로 내려가십니다. 그곳에서 목욕을 하다가 현기증에 쓰러지시고, 그때 수자타의 공양을 받아 건강을 회복하셔서 그때부터 새로 발견한 그 길을 따라, 긴장도 하지 않고 편안하면서도 욕구를 따라가지 않는 방식으로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되셨습니다.

카필라성에서의 29년은 욕망을 따라가는 삶이었다면, 이곳 전정각산에서의 6년은 욕망을 제어하는 삶이었습니다. 룸비니도 성지 중 하나지만 거기에서는 태어나신 것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사신 것도 아니니까 붓다의 인격이 형성된 곳은 카필라바스투입니다. 그리고 성도한 곳은 수자타의 공양 이후 49일 동안 용맹정진한 곳인데, 막상 성도하실 수 있는 기초는 바로 이곳 전정각산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서 주위를 돌아보면 이 주변에 16개의 마을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을마다 유치원을 지었는데, 그 중 둘을 하나로 합쳐서 지금은 15개의 유치원이 있습니다. 지금 안개가 껴서 잘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지은 유치원들을 일부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산 아래에서 산 위를 쳐다보면 봉우리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건 자연 봉우리가 아니라 탑으로 쌓았던 자리가 세월이 지나면서 마치 산봉우리처럼 보이는 거예요. 물론 산에서 높은 봉우리 쪽에 탑을 쌓았으니까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곳 산 전체가 전정각산이지만 여기 학교 주변에만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있습니다. 이곳 마을 사람들이 제공한 땅에 수자타 아카데미를 지었는데, 짓고 보니 이렇게 부처님의 유적과 가까이 인연이 있는 곳에 학교가 위치하게 되었어요.

산 정상에 올라갈 때 길이 넓지 않아서 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올라가기는 어려우니까 세 팀으로 나누어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설명을 마친 후 스님은 실제 경전 속에서는 이 모습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살펴보자며 경전을 펼쳐 들었습니다. 순례객 모두 다 함께 전정각산을 마주 보고 앉아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경전에는 부처님의 수행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아서 그 때의 정황을 머릿속으로도 아주 선명히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이곳에서 극도의 고행을 행했던 부처님의 구도의 정열을 되새겨보며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금 앉은 이 자리에서도 부처님께서 거닐었거나 정진을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스님으로부터 전정각산의 전체적인 조망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순례객들은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에 올랐습니다. 교문 밖을 나서자 어느 가난한 여인이 죽기 전 자신이 입었던 분소의를 부처님에게 드린 것을 기념하여 세운 탑이 있었습니다. 탑이라고 하기엔 많이 부서졌지만, 탑을 참배하고 반야심경을 독송한 후 전정각산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처음 왔을 땐 여기가 아주 좁은 산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몇 백 명이 와서 구걸을 하고 있었어요. 아니 애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학교가 없냐고 했더니 천민 마을이라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수자타 아카데미가 시작됐습니다.

지금은 구걸하는 아이들이 거의 없죠? 지금은 구걸 못 하도록 엄격하게 교육하고 있습니다. 여기 할머니들이 제가 오니까 다 뒤돌아 앉죠? 동네 사람들이라서 그래요. (모두 웃음) 요새 학교 관리가 잘 되나 봐요. 구걸하는 아이들이 진짜 없네요.”

산중턱에서 세 팀으로 나누어 산을 올랐습니다. 유영굴이 좁아 400명의 대중이 한꺼번에 참배하기도 어렵고, 몸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세 팀으로 나누었습니다.

바로 유영굴을 참배하는 팀, 정상에 올랐다가 유영굴을 참배하는 팀, 산을 둘러 정상에 올랐다가 유영굴을 참배하는 팀으로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유영굴이 참배하는 시간이 겹치니 산을 둘러 칼능선에 올랐다가 유영굴을 참배하는 팀을 이끌었습니다. 깡충깡충 토끼처럼 뛸 수 있는 사람만 함께 가야한다고 거듭 말하였는데 절반 정도의 대중이 함께 했습니다.

과연 칼능선이라 발 디디는 곳 아래에는 아찔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대중들은 재바른 스님을 따라 부지런히 능선을 탔습니다.

해질녘 무렵이어서 노을이 아주 멋있었습니다. 산 아래에는 수자타 아카데미가 한 눈에 보이고, 산을 둘러싸고 마을마다 JTS가 세운 유치원도 보였습니다.

칼능선을 따라 곳곳에 탑이 세워진 흔적도 보였습니다. 산에 있는 동글동글한 탑들은 현재 남아있는 것만 16개가 된다고 합니다. 거의 산꼭대기마다 탑이 있었습니다. 붓다가 이 산 어디서 명상했다는 걸 표시하기 위해 아쇼카왕이 쌓은 건데, 다른 데는 나중에 추가로 더 탑을 쌓았지만 여기는 오지이다 보니까 아쇼카왕 때 쌓은 원형 탑을 빼고는 손 댄 사람이 없어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은 것이라고 스님이 알려주었습니다.

산을 오르며 흘렸던 땀은 전정각산 위에 부는 시원한 바람 덕분에 금방 다 식었고, 순례객들은 기념사진을 찍거나 둥게스와리 마을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유영굴까지 참배하고 내려온 대중들을 위해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따뜻한 콩밥과 무국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오랜만에 먹는 국과 갓 지은 밥이 무척 맛있었습니다. 저녁 공양 후에는 가사를 수하고 쁘락보디홀에서 저녁예불을 드렸습니다.

인도JTS의 활동가들은 저녁 예불을 드린 후 막간을 이용하여 스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삼배를 드린 후 스님은 활동가 한 명 한 명이 어떤 업무를 하는지 물어보고 안부를 나누었습니다.

“수고들 많았습니다. 반갑습니다.”

JTS 소개

7시 30분부터는 지바카 병원 2층 홀에서 수자타 아카데미와 인도JTS 소개가 있었습니다.

먼저 인도 JTS 25년사와 둥게스와리 마을 현황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님으로부터 수자타 아카데미를 세울 당시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살아있는 역사들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가 시작한 계기를 말씀드릴게요. 제가 1991년 1월 2일에 처음으로 인도에 오게 됐는데, 캘커타로 들어왔습니다. 첫날 저녁 늦게 요즘 시가로 말하면 100루피짜리, 즉 1달러나 2달러짜리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서 짐을 내려놓고, 수돗물 그냥 먹으면 안 된다고 들었기에 물을 사러 나갔어요. 그런데 어떤 여자분이 어두컴컴한 데서 제 옷을 자꾸 잡아당기는 거예요. 1루피를 줬더니 안 받는다고 하면서 또 잡아당겨요.

그렇게 계속 잡아당기다 보니까 가로등 밑으로 오게 됐어요. 그제야 보니까 아기를 안고 있었던 거예요. 어제도 아기 안고 구걸하는 사람들 보셨죠? 처음에는 어두워서 안 보였는데, 가로등 밑에서 보니까 조막만한 애를 안고 있어요. 그러면서 손을 아기 입에다 댔다가 배에다 댔다가 반복하니까 ‘아, 이게 배고프다는 얘기구나’하고 알아들었어요. 잡아당기는 대로 따라갔더니 길거리 구멍가게로 갔어요. 벽면에 붙어 있는 작은 구멍가게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딱 가리키는 데를 보니까 애 분유통이에요. 그래서 제가 주인한테 ‘하우 머치?’ 이렇게 물어봤더니 ‘식스티 루피!’ 이러는 거예요. 60루피라는 거죠.

그래서 너무 깜짝 놀랐어요. 그때 제 기분은 전 재산 다 내놔라는 소릴 들은 것 같았어요. 들은 얘기가 있었거든요. 첫 여행이었는데, 당시 여기 인도에서 교환 교수로 6개월 살던 교수님이 스무 명 정도 되는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았을 때 1루피가 얼마나 큰돈인지 설명하고 1루피 이상 주면 절대로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루피 밑에 빠이샤라는 단위가 있습니다. 그때는 애들이 다 구걸할 때 ‘빠이샤, 빠이샤’ 그랬거든요. ‘빠이샤, 빠이샤’ 이러면 1전 달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10전이나 20전을 주면 되지, 아무리 많이 줘도 1루피 이상 주면 안 된대요. 이렇게 교육을 받고 왔는데 60루피라니까 가슴이 덜컹하잖아요. 그래서 뿌리치고 가버렸어요.

그런데 뿌리치고 왔어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애가 배고프다는데 그걸 안 사주고 온 게 마음에 걸려서, 숙소에 돌아와서 물어봤어요. ‘교수님, 60루피가 얼마예요?’ 이렇게 물어봤더니 2400원이라는 거예요. 아니, 내가 당시에 사회운동도 하던 사람인데 민중이 고통을 겪는데 외면한 거예요. (모두 웃음) 2400원으로 분유 사달라는데 화들짝 놀라가지고 거의 도망을 오듯이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딱 목구멍에 걸리는 거예요. 다시 돈을 가지고 그 골목으로 나갔더니 아기 엄마가 없어요. 그래서 그때 굉장히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안 좋았어요.

‘어린 시절에 나는 그런 거 보면 잘 도와주는 편이었는데 왜 이렇게 됐나?’ 돌아보니까 두 가지 원인이 있어요. 하나는 절에 들어온 게 문제였어요.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냉정해야 한다고 배운 게 첫째였어요. (모두 웃음)

두 번째는 제가 사회운동을 한 게 문제였어요. 사회운동이라는 건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를 해야지,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이렇게 동냥 주듯이 하면 안 된다는 의식이 있거든요. 젊은 시절에 이런 의식을 갖고 있다 보니 이렇게 어려운 사람한데 직접 뭘 주는 걸 10년 가까이 안 해봤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선뜻 마음이 딱 안 가고 경계가 된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갖는 순수한 마음을 내가 잃어버렸구나’ 하는 걸 알게 됐어요. 가난한 사람을 돕고 구제해야 한다며 이념적으로는 굉장한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이렇게 조금이라도 실제로 할 수 있는 행동은 거의 안 하는 자기 모습을 그때 보게 된 거예요. 이 잘못이 계기가 되어 지원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세 번째 왔을 때서야 어찌어찌 물어가지고 여기를 찾아왔어요. 여기까지 바로 차를 타고 오기엔 길이 없어서, 저 건너편에 내려서 여기까지 5킬로미터를 걸어왔어요. 그렇게 올라가니까 애들이 엄청나게 구걸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오늘이 무슨 요일이야? 학교도 안 가고 왜 여기 있어?’

이랬더니 학교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산을 내려와서 마을 사람들하고 둘러앉아서 학교가 없다니 말이 되냐고 다시 물었더니 진짜 없다는 거예요. 애들이 몇 명이냐 물었더니 양쪽 마을 합쳐서 한 150명 된대요.

‘150명이나 되는데 학교가 없다니... 그러면 학교 지어주면 좋겠어요?’
‘아, 지어만 주신다면 좋지요.’

그래서 이제 학교 짓기를 시작한 거예요. 그때 제가 또 그랬습니다.

‘이 애들이 내 애입니까, 당신들 애입니까?’
‘저희들 애죠.’
‘그런데 왜 나만 하고 당신들은 아무것도 안 합니까?’
‘저희는 가난해서 못 합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나라가 당신들 나라이고, 애도 당신들 애인데 왜 나 혼자 합니까? 나는 혼자서는 못 하겠습니다. 당신들도 뭐 좀 내놓으세요.’
‘내놓을 게 없어요.’
‘땅은 없어요?’
‘땅은 있지요.’
‘그 땅이라도 내놓으세요.’

그래서 땅을 받았어요. 여기는 1가타라고 해서 요만한 폭으로 길쭉하게 측량한 단위로 땅을 잘라서 소유를 구분해 놨어요. 그러니까 열 집이 전정각산 쪽으로 바짝 붙여서 땅을 도네이션한 거예요. 1가타가 45평인데 10집이 보시했으니까 450평을 해준 거예요. 그게 초등학교 앞의 운동장입니다. 제가 이 동네 거지한테 땅을 도네이션 받은 사람이에요. (모두 웃음)

아무튼 이렇게 해서 학교 짓기가 시작되고, 애들도 고사리손으로 벽돌을 갖다 날랐습니다. 처음에는 재밌었어요. 저도 여기 동네 집에 방 하나 빌려서 살고요. 방 하나 달라니까 선생 했던 아이가 자기 집에 방이 있으니 주겠대요. 그래서 집에 갔는데, 염소를 몰고 나오더니 염소 자던 방에 저더러 자래요. (모두 웃음)

염소는 어디로 끌고 가는가 보니까 염소는 자기 자는 데로 끌고 들어가는 거예요. 옛날에 시골에서는 겨울에 추우면 병아리를 방안에 두는 거 알아요? 방에서 알을 품게 하기도 하고요. 여기 사는 게 다 그래요. 바닥에 짚을 깔아서 염소가 살아요. 이제 염소를 내보내고 나서 짚을 다 꺼내고, 새로 짚을 깐 뒤에 들어갔는데 하도 몸이 가려워서 나중에 침낭을 꺼내 뒤져보니 침낭 안에 벌레들이 꽉 들어 있어요. 짚 속에 사는 다리 많은 벌레가 가득 들어 있는 거예요. 다행히 물지는 않았어요. 아무튼 그렇게 그 집에서 살았어요. 요새는 집을 고쳐서 없애긴 했지만 전에는 스님 그림을 그려놓고 스님이 이 집에 살았다고 써놨어요. (모두 웃음) 그 집에서 제가 살면서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는 이 지역에 강도가 있든지 말든지 아무것도 가져갈 게 없으니까 잃어버릴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학교가 지어지면서 손풍금도 하나 사고 다른 용품도 사면서 물건이 생기니까 강도가 들기 시작했어요. 물건이 아무것도 없으면 애초에 강도 들 일이 없잖아요. 아무튼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그러다 교실이 다 지어져갈 무렵에 강도가 들었어요. 1년 정도 걸렸는데, 시멘트 냄새가 나도 이제야 겨우 동네 집에서 나와서 이쪽에 와서 자고 하던 중에 첫 번째 강도를 만난 거예요. 강도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았던 걸 제가 와서 다시 문을 열었어요.

다시 학교 문을 연지 얼마 안 돼서 아침 조회 중에 아이들이 자꾸 쓰러지는 거예요. 의사 선생님을 데려다가 건강검진을 했더니 의사 선생님 말이, 지금 얘들한텐 약이 필요한 게 아니라 바나나 하나하고 비스켓 하나하고 우유 한 잔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영양실조기 때문이래요.
아이들 보면 콧물이 이렇게 줄줄 내려오고 머리에 종기 나는 거 있죠? 이게 영양실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우리 어릴 때도 제 친구들을 보면 사투리로 ‘헌디’라고 해서 머리에 온통 종기가 나고, 콧물도 줄줄 나와서 ‘훌쩍!’ 하면 쑥 들어갔다가 조금 있으면 또 슬슬 내려왔거든요. (모두 웃음).

그래도 저희 집은 좀 깨끗한 편이어서 저는 머리에 종기까지는 나지 않았지만 우리 집보다 더 가난한 집 애들은 머리에 종기가 엄청나게 났는데, 그게 영양실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때 여기 와서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북한 애들이 그런 모습을 봤을 때 영양실조인 줄 바로 알아서 북한에 영양식을 공급한 거예요. 3개월을 공급하니까 종기도 콧물도 싹 없어졌어요.

수자타 아카데미에서도 이제 급식을 하려고 하는데, 학교 건물 지을 돈도 없는 판에 급식비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한국에 가서 제가 그런 얘기를 했더니 경불연에서 시주를 하겠대요. 거기 있는 팀들이 한 달에 백만 원씩 시주를 해주셔서 그 돈으로 급식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게 문제였어요. 세 칸 교실에 교무실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했기에 저는 원래 여기에 아무것도 더 할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급식을 하는 바람에 학생이 졸지에 300명이 돼버린 거예요.

이렇게 해서 이 사업이 시작됐습니다. 물론 우리가 원을 세울 때 목표는 정해져 있었어요. 지구적으로는 환경, 인류적으로는 구호, 한반도에서는 평화, 개인은 수행, 이게 정토회의 창립 이념이에요. 이런 목표는 정해져 있지만, 사업이 하나하나 시작된 건 다 이렇게 우연처럼 길 가다가 걸려 넘어지면서 시작했어요.”

스님은 이 외에도 교육, 의료, 마을개발 등 각 사업이 시작하게 된 사연과 지금까지의 변화과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스님은 문맹퇴치는 유치원 과정만 밟아도 해소가 되는데 아이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공부로는 기를 못 편다고 하며 앞으로는 수자타 아카데미를 문화체육예술 특수학교로 만들어가는 게 과제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스님의 고민과 실천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한두 명 정도 질문을 받겠다고 하였고, 궁금한 것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이후 ‘나를 여래라고 불러라’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 그렇게 자기를 높여서 말씀 하셨을까요?
  • 요즘도 시신을 버리나요?
  • 이제 인도인들이 팀장을 한다고 했는데 한국 사람들은 여기서 무슨 일을 하나요? 
  • 천민과 양민이 나뉘는 기준이 있습니까?
  • 깨달음의 실체가 있나요?

한두 개만 질문을 받겠다고 했지만 질문이 계속 나와서 다섯 사람까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잠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 예불을 올린 후 수자타 아카데미를 출발해 보드가야까지 걸어서 이동할 예정입니다. 부처님이 전정각산에서 6년간 고행하다가 고행을 멈추고 보드가야까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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