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오전에 열렸던 ‘연해주 한민족사’와 ‘신한촌 역사의 재조명’에 대한 학술회의에 이어서 오후 2시부터는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신한촌은 해외에 형성된 최초의 코리아타운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항일 민족지사들의 집결지이자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였던 곳입니다. 그러나 1920년 4월 신한촌 참변인 일제의 대습격 학살과 만행, 1937년 9월 스탈린의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로 신한촌은 해체되고 현재는 해외한민족연구소가 1999년에 세워놓은 기념탑 세 개만이 이곳이 신한촌이었다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아파트 단지 사이에 세워져 있는 신한촌을 상징하는 기념탑

 

이에 2015년 8월 15일 광복 70주년을 기하여 ‘신한촌역사회복재건위원회’가 법륜 스님을 위원장으로, 이창주 국제한민족재단 상임의장을 집행위원장으로 해서 구성되었습니다. 오늘 기공식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감된 한민족 독립운동의 역사와 선열들의 숨결을 회복 재건하고 통일 한반도로 내딛는 초석을 마련하자는 취지로 마련되었습니다.   

 

오후 2시가 되자 각계 각층의 사회인사들이 자리한 가운데 애국 선열을 위한 묵념과 함께 기공식이 시작되었습니다.  

 


▲ 애국 선열을 위한 묵념

 

먼저 법륜 스님이 앞으로 나와 개식사를 하였습니다. 

 


▲ 개식사를 하고 있는 법륜 스님

 

“오늘 이렇게 많은 종교인, 경제인, 사회인사 분들이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해서 한 자리에 모여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한국의 5개 종단 대표들이 이렇게 다 참여하기가 쉽지 않은데, 김명혁 목사님을 비롯해서 김홍진 신부님, 김대선 교무님, 천도교 교령님을 대신해서 임형진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 사무처장님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해서 지원해 주신 후원자님들도 참여해 주셨고, 또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참여해 주셨고, 또 재외 동포들에 대해 많이 연구해 오신 전문가 교수님들도 참여해 주셨습니다. 특히 이창주 교수님을 비롯한 국제한민족재단 관계자 여러분께 이렇게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각자가 믿는 모든 신들의 가호를 받아서 저희가 하고자 하는 일이 큰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각자가 믿는 모든 신들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는 스님의 이야기에 5개 종단의 종교인들은 큰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습니다. 

 


▲ 기공식에 참여한 5대 종단의 종교인들

 

이어서 이창주 교수님이 나와 경과보고를 하면서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부족하지만 함께 뜻을 모아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또 김명혁 목사님은 축사를 하면서 “우리 선배들이 개인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3.1독립운동을 이뤄냈듯이 우리들도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혼심의 힘을 다하자”며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김홍신 작가님도 축사를 통해 “이런 뜻깊은 일을 통해 후손들에게 우리들은 떳떳한 선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며 기쁜 마음을 전했습니다. 또 재외 동포를 대표해서 이원주 필리핀JTS 대표님이 “이번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통일을 위해 작은 역할을 해 나가겠습니다” 라고 인사말씀을 해주었습니다.  

 


▲ 축사를 하고 있는 김명혁 목사님

 

다음은 공사를 책임질 건축사무소 대표이사님이 나와 공사 개요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부터 3개월 동안 설계를 진행하고, 1차 공사가 3개월 간 진행된 후 다시 2차 공사가 3개월 동안 진행되어서 올해 안에 공사가 모두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먼저 담장을 제대로 친 후 담장 안에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의 얼굴 부조를 새기고, 한국적 문양으로 대문도 만들고, 전시관도 20평 가량으로 한 동을 짓고, 한국의 유적지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누각도 하나 세운다는 기본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미 기본 조감도가 나와 있어서 황량한 이곳이 어떻게 바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 신한촌 역사 기념관 건축 조감도

 

이어서 공사를 시작하는 마음을 모아 기념 시삽을 했습니다. 시삽 전에는 테잎 컷팅식도 가졌습니다. 먼저 5대 종단을 대표한 종교인들이 나와 다함께 시삽을 했습니다. “하나, 둘, 셋” 하고 외치자 삽에 흙을 얹어 힘차게 흩뿌렸습니다. 

 


▲ 기공식 시삽

 

다음은 학계와 경제계, 독립운동가 후손을 대표해서, 다음은 좋은벗들과 국제한민족재단의 실무자들이 연이어 시삽을 했습니다. 모두들 역사적인 순간을 만끽하며 얼굴에 함박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 학계, 경제계를 대표해서 다함께 

 

이어서 경제인을 대표해서 김장만님이 만세 삼창을 선창했습니다. 참석한 내외빈들도 힘차게 두 손을 높이 들면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 만세 삼창

 

마지막으로 김홍진 신부님, 김대선 교무님, 장구갑 천도교 교령사님의 축도가 있었습니다. 서로 종교는 다르지만 통일을 위해서는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이 모습만으로도 이미 무덤 속의 선조들이 무척이나 기뻐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 천주교, 원불교, 천도교, 이웃 종교인들의 축도

 

이렇게 기공식을 모두 마치고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황량하게 기념탑만 세워진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미안해하고 죄스럽고 가슴이 아팠는데, 오늘 기공식을 계기로 무거운 마음들을 모두 날려 버릴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다시 버스에 올라탄 내외빈들은 고려인들의 숨결과 독립운동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우수리스크로 이동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수리스크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법륜 스님이 이곳 연해주와 연해주에 얽힌 독립운동사, 발해 유적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 자꾸 우리 민족 하나만 생각하니까 중국에 비해 왜소하다고 생각하는데, 고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나라까지는 우리 나라가 중국보다도 앞선 문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한나라가 우리 고조선 영토의 일부를 빼앗아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동북방의 우리 영토 일부가 중국 한족한테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그에 대해서 ‘조선의 고토를 회복하자’ 하고 일어난 것이 ‘다물군’ 입니다. 다물이란 ‘옛 땅을 되찾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물군이 우리나라 최초의 구국 의병입니다. 주몽도 다물군에 속했기 때문에 고구려를 세울 때 다물사상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고구려가 당나라에 망하자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가 일어섰고, 발해가 요나라에 망하자 말갈족의 후예인 금나라가 일어섰고, 금나라가 멸망하자 청나라가 일어섰으니까 이 동북 지역은 거의 우리 민족과 우리 형제 민족들이 늘 관할을 했던 곳입니다. 

 


 

이 동북 지역이 일부라도 중국의 한족에게 지배를 받은 것은 한사군한테 넘어갔던 게 처음이었고, 두 번째는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명나라가 옛 원나라 영토를 관리하게 됐던 때이고, 세 번째는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지금 중국이 관리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연해주는 청나라 땅이었는데, 강희제가 동진해오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어서 아무르강 이남으로는 못 넘어오게 해서 막았어요. 그러다가 청나라가 약해지니까 러시아가 더 밑으로 내려와서 아이훈 조약을 맺어서 하바로스크 지역까지 차지했습니다. 결국 북경조약으로 이곳 연해주까지 러시아가 차지한 건 1860년입니다. 겨우 150년밖에 안 됐어요. 즉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지고 전후 처리 문제로 복잡할 때 러시아가 개입해서 해결해 준 것을 계기로 연해주를 할량 받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러시아가 진출해서 들어왔습니다. 

 

1860년 이전에도 이미 우리 민족이 여기에 들어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러시아 땅이 아니었고 주인 없는 땅이었는데, 1860년에 러시아가 여기를 지배하면서 여기 사는 우리 조선인에게도 등록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1863년에 처음으로 13가구가 등록을 하다 보니까 공식적으로는 1863년에 처음 이주했다고 하는 것인데, 살기는 이미 그전부터 들어와서 살았던 겁니다. 왜냐하면 두만강만 건너면 여기는 주인 없는 땅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두만강을 건너서 지금의 하산에서 조금 더 올라오면 크라스키노가 나오는데 거기가 연추 마을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단지동맹한 곳도 거기였고, 독립운동가들의 군사훈련 연병장도 거기에 있었으니 연추마을은 무장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최재형 선생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기록에 보면 최재형 선생은 1860년대에 부모님을 따라 연추 마을로 이주해 왔다가 블라디보스톡까지 오게 되었는데, 너무 가난하니까 길거리에서 구걸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블라디보스톡에서 배를 운행하는 한 선장이 구걸하는 아이를 보고 집으로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켰다고 해요. 그래서 최재형 선생은 한국사람 중에 서양교육을 제일 먼저 받은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러시아 말도 잘하고, 여러 재주가 있다 보니 여기서 사업으로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또 양부모가 러시아 사람이다 보니 후원도 받았고요. 특히 연추에 있는 러시아 부대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일을 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또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때는 러시아 해군으로 참전을 했다고 합니다. 보통 부자가 되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최재형 선생은 그런 경력이 있다 보니 일본에 대한 저항감이 많이 있었나 봅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최재형 선생이 독립운동을 한 건 아니었고, 이범윤 선생이 간도 관리사를 하다가 나라가 기울어지니까 을사늑약 이후에 여기 와서 의병운동을 할 때 최재형 선생이 부자라는 소문을 듣고 도움을 요청했나 봅니다. 

 

그 다음에 유인석 장군도 넘어와서 13도 의군을 조직했고, 그러면서 여기는 최재형 선생이 거의 다 지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최재형 선생이 돈도 많았지만 러시아 군대에 식료품을 공급하는 일을 했으니까 군대와 아주 잘 알아서 러시아의 최신무기를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사들여 독립군에 공급을 했나 봐요. 마치 최진동 장군의 형제들이 봉오동 지역을 개척한 부자이면서 동시에 봉오동 전투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재정을 모두 지원했듯이 최재형 선생도 그런 역할을 했던 겁니다. 그 이후 권업회 창설, 권업신문 발간, 상해임시정부 재정부장 등의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1920년도에 신한촌 참변이 일어나자 결국 최재형 선생도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에 잡혀 총살을 당해 죽게 됩니다.

 

우수리스크는 옛 발해의 솔빈부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시내에서 발해의 평지성이 발견되었고, 외곽에는 산성이 1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성이 2개 있었다고 해서 우수리스크, 즉 ‘쌍성자’라고 불리웠던 겁니다. 옛날 지명에는 다 쌍성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이 1㎞ 정도 간격을 두고 2개 있었다고 하던데 시내 개발을 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제대로 답사를 못 했습니다. 산에 있는 성만 지난번에 김홍신 작가님과 같이 올라가서 토성으로 쌓은 것만 확인했거든요. 

 


▲ 버스 창 밖. 꽁꽁 언 바다.

 

이렇게 봤을 때 우리가 이곳으로 역사기행을 온다면 결국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발해의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고, 둘째, 독립운동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어요. 독립운동유적지는 초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주로 운동했던 곳이 있고, 나중에 김일성이 머물렀던 B캠프 자리 등이 있어요.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당한 라즈돌리예 역에서 5분 정도만 더 가면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넘어와서 처음 머물렀다고 하는 B캠프 자리와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스님이 설명을 계속 하고 있는 사이 버스 창밖으로는 꽁꽁 언 바다가 보였습니다. 조금 더 가니 다리가 하나 보이고 도로가 길게 쭉 뻗어 있었는데, 스님은 이 길이 북한으로 가는 길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 북한까지 연결된 도로

 

조금 더 차를 달리자 1937년도에 가장 많은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당했다고 하는 라즈돌리예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황막한 기차역을 보니 지금도 한 맺힌 절규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밭에서 일하다 말고 호미를 던져둔 채, 부엌에서 밥 하다 말고 숟가락을 던져둔 채 강제로 기차를 타야 했다고 하니, 거기다가 먹을 것도 없이 수만리를 짐짝처럼 기차에 실려 가야 했으니, 그 탄식이야 말로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 가장 많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라즈돌리예 역.

 

라즈돌리예 역에서 조금만 더 가니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넘어와서 처음 머물렀다고 하는 B캠프 자리와 건물이 보였습니다. 번듯한 2층 건물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넘어와서 머물렀다고 하는 B캠프 자리

 

버스는 이제 우수리스크로 접어 들었습니다. 먼저 우수리스크 외곽에 있는 이상설 유허비를 찾았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한국 독립을 주장했으며, 연해주에서는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순국한 분입니다. 선생의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에 뿌렸는데,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에 이곳에 유허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선생의 넋이라도 조국의 품으로 안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참가자 일동은 묵념을 했습니다. 

 


▲ 이상설 유허비

 

다음은 최재형 선생이 1920년 4월 5일 새벽 일제에 체포될 당시까지 거주했던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카야 거리 38번지 옛 집을 방문했습니다.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양국의 국기를 새기고 최 선생의 업적을 담은 동판이 부착되어 있어 이곳이 유적지임을 기념하고 있었습니다. 

 


▲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1년을 지낸 옛 집

 

마지막으로 우수리스크 시내에 위치한 고려인문화센터를 방문했습니다. 센터 안에는 19세기 이후의 한인 이주사부터 시작해서 연해주에서 있었던 다양한 항일 독립운동 역사,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의 아픔, 다시 희망을 찾아 돌아온 재이주의 역사가 사진과 글로 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진 한 장, 글 한 줄을 읽으며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 고려인문화센터

 

이렇게 우수리스크 지역 방문을 모두 마친 후 다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식사 자리에서는 오늘 선조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여러 유적지를 둘러본 소감을 서로 나누며 감동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식사를 마치면서는 마지막으로 스님이 일어나서 이번 신한촌 역사회복재건 사업이 잘 추진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을 부탁했습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은 그래도 신한촌 역사회복과 재건을 위해 후원금을 많이 내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만 돈을 내었다고 끝이 아닙니다. 이 사업이 잘 되도록 주위 사람들 중에 다섯 명씩 더 모아 오셔야 합니다. 알았지요?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구한테 돈 달라는 얘기는 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정토회 법당 만들 때도 돈 내라는 소리는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창주 교수님이 하도 사정을 해서 돈을 좀 내라는 말을 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어요. 이번 한 번만 돈 내라는 얘기를 하고 끝을 내려고 하니까 대신 여러분들이 모금을 좀 많이 해 주세요. 후원금을 많이 낸 33인에게는 신한촌 기념관 준공식을 할 때 돌에 이름을 새겨 드린다고 하네요. 이걸 갖고 신문 광고까지 낼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참석한 내외빈들은 큰 박수로 스님의 뜻에 공감을 표하고 그렇게 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우수리스크를 출발한 일행은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습니다. 밤 9시 무렵에 숙소에 도착해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참석한 내외빈들 모두가 아침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스님과 실무자 몇 명은 올해 8월에 있을 동북아 역사대장정 코스를 개발하기 위해 이곳에 하루 더 남아서 발해 유적과 독립운동 유적이 있는 크리스키노 지역과 우수리스크 지역을 조금 더 답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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