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34번째 강연이 캐나다의 온타리오주인 런던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께서는 미국에 도착하신 이래로 건강을 회복하여 강연에 집중하기 위해 계속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오전에는 충분히 휴식을 취한 다음에 행사장으로 이동하셨습니다. 저희는 아침 식사를 하고, 휴식 및 빨래 등 개인 업무를 보고 난 다음에 점심 식사를 하고 행사장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스님은 캐나다 런던으로 떠나기에 앞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숙소를 제공하고 스님 일행에게 식사를 준비해주신 정연희님께 스님 사인을 한 인생수업 책을 선물로 드리면서 감사의 인사를 한 후에 둘째 아드님과 기념 촬영을 한 후 12시에 런던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정연희님과 둘째 아드님>

캐나다 런던은 인구가 약 43만명인 비교적 작은 도시이나 인근에 유명한 워털루 대학이 있고, 미국 국경과 가까워서 그런지 한인들이 오타와 보다 많은 약 4천명 정도가 거주한다고 합니다. 어제 묵은 숙소에서 런던 행사장까지 2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하였습니다. 런던으로 오는 길은 한국의 가을 걷이를 끝내고 있는 어느 농촌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처럼 마음이 평화로워졌습니다. 



오늘 캐나다런던 강연장은 조그만 호텔 (Ramada Inn)의 Conference Room을 예약하여 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는 행사장에 도착하여 행사팀에서 마련한 휴게실에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행사를 진행하는 자원봉사 두 분이 스님께서 이곳 런던을 방문해 주심에 감사드린다고 휴게실에서 삼배로 스님께 인사를 올렸습니다. 

“캐나다 런던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 것 자체가 처음있는 일”이라며 행사장에서 총괄하는 책임자는 “한 50명정도 오지 않겠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행사를 시작하자 계속 사람들의 입장이 이어져서 의자를 계속 셋팅하고도 의자가 모자라 바닥에도 앉게 되어 최종적으로 약 160명의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환영 영상과 소개 영상이 나오자 2시 50분에 무대위로 올라가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일요일인데 놀러 안가시고 이곳에 오셨네요. 교회는 다녀오셨어요? 교회 다녀오신 후에 강연 오시라고 오후 3시에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이곳에 절은 없지요? 절에 다녀오신 분은 없을 것이고요. 저도 이번에 강의를 잡으면서 캐나다에 런던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런던에서 한다고 하니 영국 런던 강연과 얼마 떨어지지 않아서 강연이 또 있으니 잘못되었다고 고치라는 문의가 많이 왔고, 영국 런던과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런던에 사는 소감이 어때요?” 

“아주 좋아요” (청중 대답) 

 

오늘 제가 여러분들께 특별히 전달할 메세지가 있는 것은 아니예요. 인생은 자기 좋을대로 살면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혹시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든 것이 있다면 대화를 통해서 조금 더 나은 길을 찾아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 저렇게 살아야 된다는 너무 많은 주장이 있어서 오히려 인생살이가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그냥 자기 좋을대로 살면 됩니다. 다만 몇가지 제한이 있는데 같이 살기 때문에 이것은 어쩔수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은 다 누구나 자기가 살 방도를 마련할 수가 있지만 남을 헤칠 자유는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지만, 남의 이익을 침해할 권리는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하고 사랑할 권리가 있지만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 마음껏 말할 자유가 있지만 남을 속일 자유는 없어요. 이런 정도의 한계를 제외하고는 사람은 좋은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쥐가 쥐약을 먹듯이 쥐는 살려고 먹는데 결과적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나쁜게 아니라 어리석은 것으로 자기가 자기를 손해끼치고, 자기가 자기를 해치고,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고,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것은 깨우쳐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인생을 잘 살도록 어른들이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어른이 되었는데도 자기가 자기를 해치는 분이 의외로 많은 것 같아요. 더 행복할려고 한 행동이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면 이럴 때는 조정을 해보고, 원인 규명을 해보면 좀 더 나은 결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하고 여러분들이 제기하는 문제, 그것이 개인 문제든, 사회 문제든, 종교 문제든, 과학 문제든, 인간역사 문제든, 자연 문제든, 환경 문제든 주제에는 전혀 구애받지 말고 자기가 평소에 의문이 있거나 얘기하고 싶은 고뇌가 있으면 자유롭게 얘기해보도록 합시다. 대화방식도 제한이 없고, 주제도 없고, 그냥 대화하듯이 두서없이 얘기해도 됩니다. 자, 누구든지 시작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시면서 3시부터 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총 9명이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의 영문저서 True Freedom을 읽었는데 한국의 예가 아닌 중국의 맹모삼천지교의 예를 들어서 섭섭하다는 분, 고집과 믿음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분, 요즘 시대는 돈이 없으면 살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는지 묻는 분,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꿈꾸는 일이 반대일 때 현실을 생각해야 할지 꿈을 따라가야 할지 고민인 분, 대학을 지원할 때 하고 싶은 게 많아서 결정을 내리지 못해 고민인 분, 언니가 피해망상증으로 보호시설에 있는데 언니를 사회에 맡겨야 할지 어느 정도 도와줘야 할지 고민인 분, 선행을 할 때 보상을 바라고 자만심이 생기는데 이것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세월호 사고가 난지 6개월이 지났지만 특별법 제정이 안되고 있는데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정성껏 답변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기독교의 적극적인 전도 사상으로 인해 친구 관계에서 갈등이 생긴 기독교인의 고민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저는 기독교입니다. 가족들도 다 기독교입니다. 제 친구들 중에 절친한 중국 친구도 불교인데요. 제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친구들을 기독교로 전도를 못했어요. 그 대신 저는 캐나다에서 어려서부터 생활해 왔으니까 불교, 힌두교 등 다른 종교를 가진 친구들은 각자의 믿음이 있으니까 그것을 존중해줘야겠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기독교는 ‘무조건 전도해야한다’ 고 강조하니까 거기서 갈등이 생겨요. 한국 신문을 보니까 신부님, 목사님, 스님이 함께 토론회를 하던데, 불교에서는 기독교의 적극적인 전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종교 때문에 전쟁도 나고 하잖아요.”

“종교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세속적 이익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족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종교를 이용하죠. 예를 든다면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 하는 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하는 소리이지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거든요. ‘절에 와서 기도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이것도 부처님이 한 번도 그렇게 얘기한 적이 없어요.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건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깨달은 성인이 출현하기 전에 일어났던 현상으로, 원시 종교의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갖는 배타성도 무지에 기반을 둔 원시적인 종교 신앙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크리스트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 아닙니까? 구약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죠. 구약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을 안 들었다고 징벌을 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 이후의 하나님은 징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창을 갖고 오른쪽 옆구리를 찔러 피흘리게 한 사람, 그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했나요? 만약에 구약의 하나님 같으면 “주여, 저 두 놈을 지옥에 보내주세요” 이렇게 얘기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이랬단 말입니다. 교회 안 가는 정도가 아니고 자기를 죽인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얘기했단 말입니다. 여기에는 이 두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온전한 이해가 있어요. 그 두 사람은 요즘 같으면 그냥 교도소의 공무원이었어요. 판결이 나면 그냥 형을 집행하는 사람이었어요. 늘 아침에 출근해서 사형장에 사람이 나오면 십자가에 못 박고 하는데 빨리 죽어야 새로운 사람을 또 매달을 수 있으니까 빨리 안 죽으면 창으로 찔러서 죽이고 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도실장에 근무하는 사람, 생선가게에 근무하는 사람을 지옥에 보낸다고 하면 자기들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것 아니겠어요. 그것은 직업이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온전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그들이 나쁜 놈이지만 용서해주라는 것이 아니라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이렇게 말했단 말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성격이 이렇게 전혀 다른데 오늘날 기독교의 대부분은 구약의 하나님으로 다 되돌아가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어떤 사람이 스님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옥에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교회 안 오면 지옥에 간다 이런 논리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구원의 기준이 유대 민족이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유대 민족이면 구원을 받고 유대 민족이 아닌 모든 민족은 이방인이라고 하죠.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유대교의 전통입니다. 그러니 유대교는 유대인 말고는 아무도 안 믿잖아요. 유대인이 아니면 구원을 못 받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의 특수성을 보편화시킨 분입니다.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물으니까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이방인을 앞에 두고 얘기했으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유대인을 앞에 두고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얘기하니까 유대인의 전통에서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이교도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얘기하면 기독교에서 쫓겨나겠죠?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은 전통 종교로부터 배척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어요. “이방인에게 어떻게 구원이 있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중환자가 하나 있다. 바리새 교도와 율법 학자는 지나가면서 돌보지 않았는데,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잘 돌봐주었다. 그리고 자기 갈 길이 바쁘니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돌봐달라고 하고 돌아와서 또 돌봐주었다. 이럴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가 더 좋아 보이시겠느냐?” 그러자 청중들이 다같이 “사마리아인이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얘기이고,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구원의 기준이 민족과 인종에서 보편적으로 변한 것입니다. 어느 민족이냐 어느 인종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했느냐가 구원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준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요. 

 

마태복음 25장에 “최후의 심판 날 왕께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다 일으켜 세워서 양 때와 이리 때를 나누듯이 둘로 나누고 한편에 앉은 자들에게 ‘너희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지리라’ 하니, ‘주여, 왜 우리가 지옥에 떨어져야 하니까?’ 하니까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주여, 주가 언제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하니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기준이 아주 명백합니다. 유대인이라고 구원 받는다든지, 교회 다닌다고 구원받는다든지 이렇게 안되어 있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너가 어떻게 했느냐, 이것이 구원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한다면 오늘날 제3세계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을 돕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물 없는 마을에 가서 식수를 파주고, 국제 난민들을 돕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가 더 나으냐, 기독교가 더 나으냐, 하는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불교 신자들도 부처님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것을 믿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죽어서 돼지가 되고, 미련하면 소가 되고 이런 것은 대부분 힌두교적인 사고입니다. 성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냐 기독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각각 본래 성인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간다는 관점만 갖는다면 서로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공통점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불교에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라”는 얘기가 성경에도 다 있습니다. 성경에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라.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옥까지 내어주라.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대주라” 이런 말은 주어진 상황에서 주인으로 살아라는 가르침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불교적으로 보면 인연과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너가 어떤 인연을 짓느냐에 따라서 과보가 생긴다는 얘기거든요. 용어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용어만 다르지 그 핵심 내용은 일맥상통해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불교냐 기독교냐 하는 논쟁이 아니라 진리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불교적인 지혜도 필요하고, 기독교적인 지혜도 필요하고, 과학적인 지혜도 필요하고, 인류가 지금까지 발견한 많은 지혜들을 모아서 우리가 어떻게 더 자유롭고 행복한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가 연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랬잖아요. 유대인들은 편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는 줄 알지 못했는데, 예수님은 그 편협함을 깨어버렸기 때문에 진리를 인류 보편적으로 적용하신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기 전에는 불교나 힌두교를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다른 신앙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야 자유의 폭이 넓어진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오늘날은 멀쩡하던 사람이 불교나 기독교를 믿으면 더 폐쇄적이 되고 배타적이 된다면 그것은 원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질문자가 진실로 기독교 신자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가 실천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실천할까?’ 여기에 삶의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신앙을 갖고 살아갈 때 옆에 있는 친구들이 감화를 받습니다. 놀러가도 휴지를 줍고, 청소도 하고, 허드렛일은 다 하고, 그래서 감동이 되어서 ‘나도 교회에 한번 가볼까?’ 이렇게 되는 것이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배고픈 사람한테 가서 빵을 딱 내어놓고 기독교 믿으면 주고 안 믿으면 안 준다 하는 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요즘 개신교의 지나친 배타성은 국민적 저항을 불러오잖아요. 우리가 평화를 유지하려면 개신교가 각성을 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각성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지 옆에서 강제로 시키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런 개신교의 배타성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배타성마저도 포용해줘야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평화로 가는데 이익을 논해서는 안 되거든요. 남북 간에 대화를 하려면 우리는 북한의 배타성을 인정해줘야 해요. 북한의 처지를 이해하고 대화를 해야 대화가 되지 “내 한번 갔으니, 너도 한번 와라” 이렇게 하면 대화가 안 됩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님과 북한동포돕기를 같이하면서 친해져서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찾아가서 찬송가도 부르고, 목사님도 절에 와서 설교를 해주시고, 초파일 날에는 성당에서 성가대가 와서 노래를 불러주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 세계 100강을 할 때도 성당에서 강연하는 것이 열 번이 넘습니다. 또 강연 주선을 목사님이 많이 해주셨어요. 이렇게 교류를 하고 있는데, 친구를 자꾸 종교로 접근해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는 아닙니다. 친구는 그냥 친구로서 지내야 합니다. 불교든 힌두교든 무슬림이든 인종이나 민족을 차별하지 말고 친구는 평등하게 대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친구 중에 자기가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교회에 가고 싶다’ 할 때는 굳이 “오지 말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은 자기 행복이 더 우선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에 유럽에서 강연을 할 때도 부인이 스님의 유튜브 법문을 듣고 삶의 자세가 바뀌는 것을 보고 감동을 한 외국인 남편들이 강연 준비를 많이 도와주었거든요. 유럽의 어떤 가족은 아내가 짜증을 내면 남편이 “법륜 스님 법문, 법문...” 그런다고 합니다. 이렇게 삶의 자세가 바뀌면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이 관심이 생겨서 찾아가게 되거든요. 신앙의 핵심은 삶의 행동입니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독실한 불교신자라고 하더라도 고집이 세고 아집이 강하면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싫어서 불교도 싫어집니다. 선교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제는 안되지만 알림은 필요합니다. 몰라서 그 길을 못갈 수 있잖아요. ‘여기 교회가 있습니다’, ‘여기 이런 공부가 있습니다’ 이렇게 알릴 뿐이지 오고 안 오고는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사람을 끌고 오는 방식은 상업적인 호객행위와 같습니다." 

이렇게 하여 스님께서는 5시 10분에 질문자의 모든 질문에 답변을 마치고 다음과 같이 정리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살이는 너무 무거우면 안됩니다. 가볍게 살아야 합니다. 신부님, 목사님, 스님들이 일반 재가 신자들보다는 평균적으로는 욕심이 적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행복할까요? 신부나 스님들이 행복할까요? (신자들이요). 왜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신부님이나 스님들은 굉장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요. 인생을 무겁게 산다는 거에요. 무거우면 행복해질 수 없어요. 어깨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특히 엄마가 너무 잘해 주면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에 인생이 무거워집니다. 자기 인생를 살지 못합니다. 부모가 볼 때는 효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부모의 노예입니다. 자유인이이 아니예요. 누구도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고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스님, 신부님들은 사명감이 크기 때문에 무거워요. 스님은 깨달아야 한다, 목사님은 선교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크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복도도 떨어지고 웃음이 적어요. 늘 긴장되어 있고 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 무겁게 보입니다. 스님이 된다고 신부님이 된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예요. 인간은 다 똑같아요.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피부색이 검고, 희고, 남자도, 여자도, 기독교도, 불교도, 무슬림도, 장애자도, 비장애자도, 성적취향이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도, 그 무엇이든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예요. 이것은 일체 중생은 다 부처다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유와 행복이라는 것이 우리는 늘 밖으로 구하기 때문에 늘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종속적으로 살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기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어요.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요. 결혼한다고 이민 온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자기 하기 나름이예요. 

지금 연세드신 분들은 고국이 그립지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가면 또 살기 어렵습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서도 이방인 저기서도 이방인이라고 하는데 남한테 자꾸 견주어서 자기 정체성을 쌓기 때문에 그래요. ‘캐나다 사람 중에 나는 한국을 가장 잘 알고, 나는 한국 사람 중에 캐나다를 가장 잘 알고, 나는 두 개 다 안다.’ 이것을 정체성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강연을 마무리 하니 건강도 좋지 않는데 2시간 25분 동안 강연을 해주신 스님께 청중들은 큰 박수로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젊은 학생에 대한 따뜻한 격려의 말씀, 그리고 스님의 애정어린 답변이 끝날때 마다 참석자들이 큰 박수로 스님께 화답을 해주어서 보는 내내 집중된 분위기 속에서 화기애애하고 행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바로 스님께서는 책 사인을 할 자리로 옮겨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많은 분들 한사람 한사람 사인을 해주시고 기념 사진촬영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어제 캐나다 토론토 강연장에서 밖에서 자원봉사하느라 스님 강연을 듣지 못했던 토론토 자원봉사자들은 오늘은 강연장이 아주 작고 소박한 덕분에 강연장 안에서 함께 안내하면서 스님의 강연을 들었는데, 소감을 들어보니 모두들 "너무 좋고, 특히 스님께서 젊은 학생의 눈물어린 질문에 상세하고 자상한 답변을 해주시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자원봉사자들과 단체사진 촬영을 한 다음에 자원봉사자 모두들에게 단주를 선물로 손목에 끼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런던강연을 맡아 행사진행한 워털루열린법회의 김재명법우님과, 캐나다런던 지역에서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준비해주신 정정완님과 최용구 한인회장님께 사인을 한 책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정정완님>

스님께서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몸이 좋지 않아 함께 나누기도 못하고 먼저 숙소로 들어가니 묘덕법사님, 김정란 총무님과 함께 나누기를 하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한 후 오늘 숙소가 있는 캐나다 나이아가라 폴로 6시에 출발을 하였습니다. 내일 미국으로 넘어가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바로 미국-캐나다 국경 지역인 나이아가라 폴로 2시간 정도 운전해 갔습니다. 
 
오늘 하루 밤을 묵게 될 Inn에 도착하여 짐정리를 한 후에 스님께서는 간단히 죽으로 요기를 하고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짐정리를 하고 보니 거의 10시가 다 되었는데, 호텔에서 오늘 밤 10시에 불꽃놀이가 있다고 하여 스님을 모시고 폭포 근처로 가니 5분만에 싱겁게 불꽃놀이가 끝나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일 강연을 위하여 충분히 휴식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저는 스님과 잠깐 내일 일정에 대해서 의논을 하고 제 숙소로 돌아와서 스님의 하루를 정리하고 저의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늘 런던 자원봉사자들은 18명 정도 되었는데 마음나누기에 10명 정도 참석하였습니다. 스님의 즉문즉설 유튜브를 본다는 젊은 커플과 가족들이 참가하였는데, 이분들은 "런던에서 이런 행사를 하게 되고, 또 함께 자원봉사를 해서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행사를 준비함에 있어서 함께 마음을 맞추어서 하는 곳이 잘 없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마음을 맞추어서 행사가 잘 끝나서 기분이 굉장히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녀지간에 참석하신 분은 "가족들이 다 자원봉사에 참가하고 싶었는데 남편이 미국 출장으로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런던에도 모임이 생겨서 함께 마음공부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왼쪽 제일 끝이 런던 강연 총책임을 맡은 워털루열린법회 담당자 김재명님>

이렇게 많은 분들의 정성과 자원봉사로 오늘 34번째 캐나다 런던 강연도 성황리에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내일은 35번째 강연이 미국 뉴욕주의 버팔로에 열립니다. 내일은 미국 버팔로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지난 날짜 소식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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