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초대석맑은마음,좋은벗,깨끗한 땅을 실현하는 정토회


친구 : 이번에 내가 나가는 모임에서 스님 강연을 여는데
         한번 와보지않을래?

나 : 거길 왜 가냐? 뻔히 좋은 말 할걸! 그런 말 나도 하겠다!

이 대화가 나와 정토회의 첫 인연이었다.

그때 난 어둡기가 땅을 뚫다 못해 지구반대편으로 튀어 오를 기세였다. 퀭한 눈과 배신감에 젖은 분노와 세상에 대한 적개심. 성공에 대한 집착과 동시에 패배감에 찌든 피해망상까지. 말 그대로 내 생애 최악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싫었다. 최소한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근근이 유지해갈 때 걱정해주던 후배가 검도장을 권유했다. 돈 없어도 자기가 말해줄 테니 그냥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운동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한 친구가 나의 힘들어 하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는지, 법륜스님의 여의도 즉문즉설을 소개했다. 물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다. 좀 기분대로 살며 알뜰하게 살진 못했지만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했으며 즐겁게 살아왔다. 시골 어촌에서 자라며 이렇다 할 학업에 욕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누가 ‘공부 열심히 해야 된다’고 강요한 적도 없었다. 인생은 어떻게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선단을 이끌며 어촌에서 목소리깨나 크시던 아버지를 도와 주말마다 뱃사람이 모자라면 뱃일도 하고 나름 시골살림에서는 부족함 없이 잘 살았다. 가난하게 자라 온 아버지는 어렵게 자수성가 하셨지만, 버신 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시고 모두 보증서주고, 빌려주고 못 받고. 모든 건 수순대로 뻥뻥 터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세가 기울어 고3 때부터는 빚으로 버티고 있었다.


하여튼 나는 당시 유망직종인 실내디자인과를 전공으로 선택해서 진학했다. 시골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컴퓨터는 실습실에서 잠시 구경 해본 게 다였는데, 켜고 끄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내 앞에서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질 않나, 미술학원근처도 못 가봤고 디자인수업들은 또 어쩔 것이며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주유소 총잡이 하겠다, 군대에 가자. 이왕 갈 거 빨리 갔다 오고 군대에 갔다 오면 뭔가 절실해질 거야, 그러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입대했다. 나름 소싯적에 교회도 다녀본 나다. 훈련소에 들어가면서 하나님께 맘속으로 기도드렸다. ‘하나님 절실하게 해주세요.’ 아멘


그때까지 나의 기도 발은 잘 먹혔던 모양이다. 집안상황은 정말 더 절실해 졌다.

직장을 1년 동안 5군데 옮겼다. 길게는 6개월, 짧게는 일주일. 그러면서 마지막 사무실을 다니던 중 생각했다. ‘이렇게 박봉에 노동일 할 거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 나름 학창시절 남들 앞에 잘 나서고 많이들 웃어 줬으니, 그래 TV에 나오는 사람이 되자! 그건 집안이 힘이 없어도, 학벌이 없어도, 인맥이 없어도 자기 실력만 있으면 될 거야!’

그렇게 단순 무식한 결정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방송아카데미, 연기학원 등을 다니며 오만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친구, 대학동기들에게 훗날 꼭 갚겠노라며 당당히 신세지며 하루하루 채워나갔다.


그러다 알게 된 한 연기자 선배가 극단을 만들었다. 함께 하자며 갖가지 제안을 다 해주었다. 나름 공채탤런트 출신이었던 그 선배는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도 해주었다. 나란 촌놈이 그런 거에 약했다.
그 선배로부터 뭔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2여년을 뛰어다녔다. 전국 지방공연을 다니고, 나이가 있으니 어린배우들을 챙기며 극단 내부 행정업무도 보고, 나름 인테리어 출신이라고 무대며 소품까지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그 선배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게 그 시절 마음이었다.
잘 보이고 싶으니 주변 어린 동생연기자들은 깎아내리고, 내가 윗사람에게 비위 맞추듯 대우받길 바라며 거만하게 굴며 한편으로 비굴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한 순간 그 선배와 관계가 ‘토사구팽’의 꼴로 끝이 났다. 누명을 쓰다 시피 관계가 끊기고 나니 그동안 해온 모든 것들이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배신감과 분한 마음에 이를 갈고 있을 때쯤, 옆에서 항상 힘이 되어준
연인의 이별통보도 있었다.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 쯤, 그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되었던 캐스팅관계자의
‘형이 하나 넣어 줄 테니까 기다려봐’하는 배역약속에 분한 마음과 기대감을 동시에 가지고 아무것도 안하면서 진짜 집에서 가만히 대기만 했다.
밤낮없이. 방송 쪽 일은 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그런 약속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못해줘도 큰 문제 안 되는 빈 말 정도임을 몰랐다.
그 당시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만 있으니 폐인 되는 건 금방이었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바닥에 떨어진 것 만 같았다. 믿고 의지하며 충성하다시피 했던 선배와 아끼던 연인의 배신. 그 당시 마음으로는 배신이었다.
막막해진 미래. 어느새 서른을 넘긴 나이와 고향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 모든 게 부정적인 요소들로만 느껴졌다.


그때, 그 즈음에 그 친구가 스님법문 들으러 가자는 얘기를 했던 것이다. 이미 난 내 생각에 가득 차있었다.
분노와 배신감과 패배감. 세상에 대한 적개심. 그 친구의 강연초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는데, 그 친구의 뒷말이 귀를 쫑긋하게 했다.

‘유명한 작가님들이랑 감독님들도 와’



나는 그 길로 정장을 차려입고 강연장에 나타났다. 불순한 마음으로. 그런데 이런 젠장... ‘500여명 사람 중에 누가 감독이고 누가 작가지?’ 순간 어이없는 실소가 나왔다. 속으로 ‘이런 한심한 놈’ 싶었다.
 
‘이놈의 거지근성’. 그렇게 가만있다 무기명 질문지가 오기에 생각 없이 내 지금 사정을 적나라하겐 말 못하겠고 애 둘러서 적었다.

이게 뭔가? 내질문지가 제일 먼저 읽혀지기 시작하고 그 질문을 가지고 1시간을 넘게 법문이 이어졌다.
나머지 질문은 그 질문에서 하셨던 말씀들에 곁 대서 설명하시고 강연을 마치시는 스님을 보는 내 눈, 내 머리는 잊어 버렸던 걸 다시 찾은 듯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성인들의 가르침을 배워야겠다. 내가 너무 건방지게 살았구나.’

그 길로 주일에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공부하고 평일엔 법당에 나와 부처님의 법을 배웠다.

혼자 오디션도 보러 다니고 그렇게 다시 공연도 하고, 다시 아르바이트도 찾고 틈틈이 프로필 돌리며 드라마며, 영화제작사 찾아다니고. 삶이 다시 바빠졌다.

어느 열린 법회에 참석했을 때 적어낸 접수장 때문이었는지, 우연히 ‘법문 들으러오세요’라는 문자한통 받고, 대중부 보살님들과 어딘지도 모르고 대전까지 같이 버스를 타고 내려갔다.
알고 보니 매일 108배를 하겠다는 약속하는 자리라나? 그때까지 나는 법당에 나와서 일체 절을 하지 않았을 때 이었다.
나름 교회 다니던 사람인데. 삼귀의고, 삼배고, 관음정근이고 일체 의식에서 절은 하지 않고 법문만 듣고, 나누기정도 하고 나갈 때 이었다.
근데 이거 막상 입재식이라는 데를 오니 염주도 공짜로 주고, 뭐 책도 주고... 안하기도 모하고 하기도 썩 내키지는 않고 올라오는 버스 내내 고민스러웠다.

‘그래 내가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 하다 말겠지! 공짜로 이런 거도 받았는데 한 며칠 해보지 뭐’

그렇게 6-10차를 입재로 시작한 천일결사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고 이젠 습관처럼 일상이 되었다.

신규 입재자 교육에 참여를 안했더니, 염주를 어떻게 쓰는지 절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정말 머리 찍고 일어나기만 엄청난 속도로 해댔다.
하다 보니 몇 개를 했는지 헷갈렸다. 염주는 자취방 TV 위 인형 목에다 걸어두고, 108배까지 속으로 세면서 절을 하려니 한 순간 놓치면 또 몇 번을 더하고...또 다 시하고...
그렇게 그 당시 수행일지에는 염주사용방법을 알 때까지 첫 한 달 내내 그 절한 횟수를 세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또 절하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잘 모르기도 했던 때라 일단 하기로 한 거 하는데 까지 하자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루는 아침기도를 마치고 TV를 켜니 불교방송에서 ‘108참회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무엇에 감사합니다, 한배 누구에 감사합니다, 한배
 
~에 참회 합니다’하며 절을 하는 것이다. 따라했다. 감사하고, 참회하고. 그렇게 작게 내 안의 평화를 찾아가고 있었다.
 일하는 곳의 납품시간이 당겨지면 3시에도 일어나서 기도하고, 멀리 가는 날이면 2시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어쩌다 아침에 놓친 날은 납품 갔다 와서라도 하고.


길벗으로 정토회를 알게 됐지만 청년정토 도반들과 함께 활동을 많이 할 기회가 생기다 보니 자연스레 정토회 이런저런 행사에 봉사자로 참여할 기회가 많아졌다.
 잡일과 운전 정도야 어릴 때부터 해오던 터라 늘 회의가 많은 이 친구들에게 나는 나름 필요한 존재였던 거 같다.
“이 회의주의자들” 나는 그 친구들을 그렇게 불렀다.
‘2010 방황해도괜찮아’, ‘2011 청춘콘서트 1,2’, ‘2011 희망세상 만들기100강’ 등 행사에 운전봉사를 하며 시간을 채워나갔다. 어딘가에서 필요한 존재로 잘 쓰이니 나 역시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정진은 왠지 놓고 싶지 않았다. 하기로 했으니까. 어쩌다 빠지게 된 날은 마음이 찜찜하기가 영 편치 않았다. 그래서 기도를 챙겨 하려다보니 재밌는 일도 많았다.


2011년 전남대에서 있었던 청춘콘서트 때에는 새벽같이 움직여서 대전 청콘을 마치고 광주로 내려가던 터라 기도시간이 애매했다.
그 전날도 늦게 귀가해서 수면도 부족한 상태여서 먼저 일어나기도 핑계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 봐서 해야지’ 하면서 못하다가 결국 광주까지 내려갔다.
 전남대 교정에 들어갔는데 그 어느 곳에서도 할 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해는 져서 어둑어둑한데 기도는 해야겠고, 이리저리 교정을 뒤지고 다니다 테니스장 옆 인적이 드문 숲길이 보였다.
‘그래 저기야’ 조금 외진 그곳에서 수행일지를 펴고 혼자 108배를 시작했다.
 멀리 큰길로 학생들이 지나가기도 하고, 속으로
‘쟤들이 나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혼자 풀밭에서 절하며 웃기기도 했다.
여름 이었던 것 같다. 모기한테 제대로 피 보시했다. 명상하려 앉으니 2분을 못 넘기고 동네모기들은 잔칫상이라도 본 듯 몰려들었다.
내가 무슨 대단한 고승도 아니고 이런 고행은 참아 낼 수 없었다. 다시 자리를 옮겨 강연장 주변, 구석구석을 돌며 나머지 명상시간을 채우고 온몸을 긁적이며 기도를 마쳤다.

또 한 가지는 이야기는 촬영장에서의 기도였다.

지방촬영이 몇 일째 이어져서 숙소에서 생활을 하는데, 선배연기자분의 매니저와 숙소를 같이 쓰게 되었다. 20중반의 아직 어리다면 어린 친구였는데 나는 절을 해야 하므로 바닥에 그 친구는 침대에서 잤다.
촬영은 보통 마치는시간이 정해진 게 없으니 촬영마치고 돌아오면 일단 자고 일어나는 대로 기도를 했다. 몇몇 같이 방을 썼던 동료 연기자들에겐 자기 전에
‘난 1시간 먼저 일어나 108배 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자!’ 하고 이야기를 해줬더니 큰 문제가 없었는데, 이 매니저 친구와는 갑작스레 방을 쓰게 되서 말을 못 해줬다.
 그러곤 먼저 일어나서 절을 했다. 한 시간여 기도시간을 마치고 씻고 나왔는데 그 친구는 먼저 촬영장으로 가고 없었다.
뒤 늦게 현장엘 갔더니 그 친구가 나를 슬슬 피하는 느낌 이었다.
‘왜 저러지?’ 조금 있다 보니 그 선배 연기자분이 오셔서 ‘아침에 뭐 하신다면서요?’ 하면서 웃으셨다. ‘우리 애가 겁먹었어요.’ 그러는 것 이었다.
혼자서 뭐라고 주문도 외우면서 절을 하더라는 것 이었다.
나는 그렇게 촬영장에서도 108배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해 물어오면 설명하다보니 전법 아닌 전법을 하고 있는 나를 보기도 했다.
결혼 한 지 얼마 안 된 그 선배 연기자에게는 촬영 마치는 날
‘스님의 주례사’와 내가 하는 기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 스님의 책 ‘기도’까지 두 권을 선물로 드렸다. 그 매니저에게도 ‘기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주며 웃으며 헤어졌다.

그런 일 저런 일 챙기며 벌써 700일 가량을 해오고 있다. 입재식에 오며 수행일지를 제출하고 돌려받을 때 마다 참 감회가 새롭다. 700일. 어릴 때 일기도 열흘이상 써 본적이 없었는데.

불순한 마음으로 찾아갔던 ‘길벗’ 열린법회. 그래서 그 무거움에 길벗법회를 한동안 안 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청년법회를 찾았다. 그리고 불대를 입학하고 법문을 들으며 ‘내가 생각으로 스스로를 불편하게 하는구나.’ 를 느꼈다.
그리곤 불편하지만 안 갈 이유도 없다는 마음에 길벗법회에도 다시 나갔다. 한번은 길벗 행사준비로 아침 일찍 길벗사무실에 행사물품을 실으러갔을 때 편안한 미소로 그런 나의 무거웠던 마음을 받아준 길벗 선배도반이 있었다.
그 후 마음도 많이 편해 졌다. 그렇게 길벗과 청년정토회에서 활동하며 많은 시간이 정토회에 쓰여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좋은건 안으로 여물어져 가는 내 자신이었다.
여러 수행프로그램, 운전봉사로 강연장 마다 따라다니며 듣는 좋은 법문, 강연. 접해보지 못했던 문화들. 사람들.

그 속에서 나는, 자빠지면 자빠지는 대로, 주저앉으면 주저앉은 대로 내가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

정토회를 나온 지 1여년을 버티다 ‘깨달음의 장 깨달음의 장 깨달음의 장’ 그놈의 ‘깨달음의 장’을 가게 됐다. 불대 도반이 수입이 변변찮은 나에게 깨달음의 장 등록금을 흔쾌히 빌려주었다.
아직도 그 돈 반은 못 갚았다. 자기는 그냥 자기가 보내주고 싶었다지만 미안한건 미안 한거다. 돈이야 언젠가 꼭 갚겠지만 ‘깨달음의 장’을 가게 해준 그 은혜는 갚을 길이 없지 싶다.
‘깨달음의 장’그 보다 더 큰 감동은 없었던 거 같다. 나름 1여년 정토회를 꾸준히 나오고 법문도 들을 기회도 많았고, 불대도 법회다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천일결사도 우연히 입재해 아침마다 기도하던 때라 나는 굳이 거길
‘가라가라’하는 도반들이 유난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아침기도도 제대로 안하는 것들이’ 이러면서 삐딱하게도 보며.

깨달음의 장에 들어가던 날 ‘갔다 와서 별거 없으면 두고 보자’ 라고 페이스북에 글 남기고 수련장으로 들어갔던 ‘나’다. 깨달음의 장을 마치고 온 다음날 아침 기도에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수행문을 읽으면서부터 흐른 눈물은 108배를 마칠때 까지 흘렀다. 깨달음의 장가기 전 늘 하던 아침 기도가 아니었다.

안 갔다 온 사람은 모른다. 해 줄 수 있는 말은 ‘깨달음의 장, 빨리 갔다 와라’

그렇게 그 친구를 통해 ‘길벗’을 알게 되고, ‘길벗’을 통해 정토회를 알게 되고, 정토회를 통해 바른 불법을 배우게 된 지난 시간들이 이렇게 글로 쓰며 돌아보니 감사 할 뿐이다. 이 글로 나마 그 친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처음에 수행담발표 제의가 들어왔을 때 ‘내가 무슨 수행담!?’ 하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돌이켜 한편으로 보니 가볍게 내가 수행에 발을 들였던 거처럼 다른 누군가도 이 이야기를 듣고, 이 모습을 보고 가볍게 시작할 수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 나는 감동의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우스꽝스럽고 엉뚱한 일상의
청년 차종호가 나와서 수행담을 이야기하면 아마도 조금은, 수행이 가깝게 느껴지지 않을까 해서 감히 이렇게 이 자리에 섰다.
지금도 날마다 자빠진다. 엎어지고. 절은 정말 하면서도 하기 싫다. 그래서 한다.
그 냥.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매일 붓는 물. 다 먹지도 않고 흘려버리는 콩나물시루의 콩나물이, 어느날 부쩍 자라있는 것처럼 내안에는 돌이키는 힘이, 바른 법을 보고 듣는 눈과 귀가 생겼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넘어져 바동대던 지난날에 비하면 이것이야 말로 정말 대단한 수행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눈깔 돌아가 이를 갈며 ‘나도 백 한번 만들어보자’ 갔던 길벗 열린 법회,

나는 그날 부처님을 백으로 얻어왔다.

그런 부처님을 보여주신 큰 스승님 법륜스님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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